- Introduction
이해가 지식과 구별되는 인지적 상태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차이점을 든다. (1) 지식과는
달리, 이해에는 정도차가 있다. (2) 지식과는 달리, 어떤 형태의 인식적 운에 면역이다. (3) 증언(testimony)와의 관계가 지식과 다르다.
저자는 이해에 대한 환원주의를 주장한다. 저자에 따르면 지식은 이해의 필요충분조건이다.
- Some Clarifications
환원주의는 이해에 지식이 전부이며, 지식 외의 별도의 인지적 상태를 상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입장이다.
이해는 지식처럼 wh-절과 that-절 형태를 취할
수 있다. 각 형태의 이해는 그에 대응되는 지식의 필요충분조건이다. 따라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i) 행위자는 왜(why) p인지 이해한다 iff 그
행위자는 왜 p인지 안다.
(ii) 행위자는 무엇(what)이 일어났는지 이해한다 iff 그
행위자는 무엇이 일어났는지 안다.
(iii) 행위자는 p라는 점(that)을 안다 iff 그 행위자는 p라는 점을 안다.
등등...
이 논문에서는 주로 왜 p인지에 대한 이해 및 지식에 초점을 맞춘다.
- Is knowledge Necessary for
Understanding?
Pritchard (2008, p. 37), Hills (2009, p. 204), Kvanvig은 특정 종류의 인식적 운이 지식과는 양립
불가능하지만, 이해와는 양립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왜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를 이해하면서 동시에 왜 그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지 못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Hills의 예: 잘못된 교과서가 많이 있는데, 우연히 그
사이에 있는 올바른 교과서에서 스탈린이 수백만 명의 사망에 책임이 있다는 내용을 읽고, 스탈린이 악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Hills는 위의 예에서 주체가 수백만 명을 죽였다는 점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스탈린이 수백만
명을 죽였기 때문에 나쁜 사람이다>라는 점을 알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왜 그가 나쁜 사람인지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Hills는 주체가 왜 스탈린이 나쁜 사람인지를 이해한다고
주장한다. 왜 그가 나쁜지에 대한 이유들에서 그가 나쁜 사람이라는 결론을 이끌어낼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Pritchard도 구조적으로 Hills의 예와 동일한 예를 든다. - 화재의
원인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 들었는데 마침 그 사람이 소방관인 경우.
요약하자면, 환경적 운(environmental luck)이
있는 경우에, 행위자는 왜 p인지 이해하게 될 수 있다. 그러나 지식은 환경적 운에 면역이 아니기 때문에, 행위자는 q 때문에 p라는 점을 알게 되지 못하며, 따라서 왜 p인지 알게 되지 못한다.
- In Support of the Necessity
Claim
만약 지식 없이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나는 왜 스탈린이 악인인지 이해한다'는 문장과 '나는 왜 스탈린이 왜 악인인지 모른다'는 문장을 결합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다음과 같은 문장들을 고려해보낟.
(1) 나는 왜 스탈린이 악인인지 이해하지만, 나는 왜 스탈린이 악인인지 알지 못한다.
(2) 나는 스탈린이 수백만 명을 죽였다는 점을 이해하지만, 나는 스탈린이 수백만 명을 죽였다는 점을
알지 못한다.
(3) 나는 스탈린이 수백만 명을 죽였기 때문에 악인이라는 점을 이해하지만, 나는 스탈린이 수백만
명을 죽였기 때문에 악인이라는 점을 알지 못한다.
이 문장들은 모두 부적절해 보인다. 1인칭이어서 그런 것만이 아니다. 3인칭인 경우도 마찬가지로 부적절하게 들린다. 다음과 같은 사례를
고려해보자.
저널들: 제인은 과학 저널 무더기에서 하나를 골라 B형
간염에 대한 효과적인 새 치료법에 대해 읽었다. 그런데 제인이 읽은 저널이 그 무더기에서 유일하게 정확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다른 저널을 골랐다면, 그 새 치료법이
별로 효과적이지 않다고 믿게 되었을 것이다.
비환원주의자들은 제인이 왜 그 치료법이 효과적인지 이해하지만, 왜 그 치료법이 효과적인지 알지
못한다고 해야 한다. 그리고 (5)~(7)도. 이런 진술은 부적절해 보인다.
[비환원주의자 입장에서,] 이러한 문장들이 부적절해 보이는 이유는 화용론적인 요소 때문일 뿐이라고
반론할 수도 있다. 만약 그렇다면, 이러한 문장들을 포함하면서
말이 되는 문장을 만들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다음과 같은 문장을 만들어도 여전히 부적절해
보인다.
(8) 만약 제인이 왜 새 치료법이 효과적인지 이해하지만 왜 그것이 효과적인지 알지 못한다면, 제인이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다.
이 점은 여기서 문제가 의미론적이라는 점을 시사한다.[왜 의미론적이라는 건지 이해 못 함.] 이런 문장들이 부적절하게 들리는 이유는 그것들이 모순적이기 때문이다. 이는
이해가 앎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Sliwa, P. (2014), "Understanding and Knowing", Proceedings of Aristotelian Society.
비환원주의자의 가능한 대응: 위와 같은 사례는 드물다.
저자의 반론: 드물지 않다.
e.g., 형사가 우연히(거미가 지나다니는 것을 보고) 새로운
증거를 발견하고 누가 진짜 범인인지 알아냈다. 이 경우 운 덕분에 범인을 알아낸 것이지만, 그래도 안다고 할 수 있다.
> epistemic luck 이야기할 때는 비슷한 것들 사이에 섞여 있는 상황을 말하는 것 아닌가? 이 사례와 구조가 다른
것 같다.
그렇다면 가짜 헛간 사례에 대해 환원주의자들은 그것이 지식이라고 답해야 하는가? 저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몇몇 사례들에서 운을 통한 지식이 있다고 하면 되고,
제인의 사례는 가짜 헛간 사례보다는 그런 사례에 가깝다고 하면 된다. 둘 사이의 차이는
지식에 대한 설명에서 해야 할 작업이다.
> 여기서 설명해야 될 것 같은데...
- Is Knowledge Sufficient for
Understanding?
모든 비환원주의자가 지식이 이해의 필요조건임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실상 모든 비환원주의자가
지식이 이해의 충분조건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특히 증언과의 관계에서 지식과 이해는 다른데, 신뢰할 만한 증언자의 증언에 기반을 두고 왜 p인지 알게 될 수
있지만, 이해에는 충분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사례를 든다.
잘못된 배선: 소방관이 집이 불이 난 이유가 배선이 잘못되어서라고 말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부모와 아이는 화재가 잘못된 배선이라고 믿게 됐다.
비환원주의자들은 이 사례에서 부모와 아이가 모두 왜 화재가 발생했는지 알지만, 이해는 다르다고
주장한다. 그들에 따르면 왜 그런지 아는 것은 유관한 명제적 지식을 갖는 것이고, 명제적 지식은 증언을 통해 전해질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왜 그런지
이해하는 것은 유관한 명제적 지식 에 더해 추가적인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 추가적인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비환원주의자들 사이에서 의견이 다르다. Hills, Grimm, Strevens ...
잘못된 배선 사례를 통한 비환원주의자의 논증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P1. 잘못된 배선 사례에서, 부모와 아이는 모두 잘못된 배선 때문에 화재가 일어났다는 점(that)을 안다.
P2. 만약 부모와 아이가 모두 잘못된 배선 때문에 화재가 일어났다는 점(that)을 안다면, 부모와 아이가 모두 왜 화재가 일어났는지에 대해 같은 명제적 지식을 갖고 있다.
P3. 만약 그들이 왜 화재가 일어났는지에 대해 같은 명제적 지식을 갖고 있다면, 그들은 모두 왜
화재가 일어났는지 안다.
P4. 그럼에도, 부모와 아이 사이에 인식적 비대칭이 존재한다. 왜
화재가 일어났는지에 대해 부모는 이해하지만 아이는 이해하지 못한다.
C1. (P2, P3, P4에 의해) 이 인식적 비대칭성은 부모와 아이의 지식에 의거해 설명될 수 없다.
C2. 따라서, 왜 p인지 아는 것은 왜 p인지 이해하는 데 충분하지 않다.
- Defending the Sufficiency
Claim
P4는 논쟁의 여지가 없다. 논증을 위해 P1도 받아들이자. 환원주의자는 P2와 P3을
공격할 수 있다.
P3을 거부하기 위해, 환원주의자는 왜인지 아는 것은 명제적 지식으로 환원될 수 없는 특별한 종류의
지시기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저자는 이런 입장은 아니다. 저자는 P2를 공격한다.
소방관의 증언을 듣기 전에 부모와 아이의 인식적 상황은 다르다. 부모는 잘못된 배선이 화재를
일으키는 여러 가지 방식들에 대해 알고 있고, 잘못된 배선 외의 원인으로 화재가 일어나는 방식들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 이런 배경 지식들은 명제적인 지식으로 보이며, 이런
배경 지식들 덕분에 부모는 화재를 무엇이 야기했는지에 대해 많은 인식적 가능성을 고려할 수 있다.
그러나 아이는 이런 지식이 부족하다. 따라서 소방관의 증언을 듣기 전에도 인식적 상황은 비대칭적이다. 아이도 몇 가지 가능성을 고려하긴 하고 일부는 부모가 생각하는 가능성과 겹치기도 하겠지만, 얼마나 세분화되어 있느냐에서 다르다.
따라서 소방관의 증언을 듣고 부모와 아이가 무엇을 배우느냐도 다르다. 증언을 듣고 부모와 아이가
모두 여러 인식적 가능성들을 배제하겠지만, 남아있는 가능성에 대해 다를 것이고, 따라서 그들의 인식적 상황은 여전히 비대칭적이다.
부모는 화재에 대해서 더 많이 안다. 그리고 이 지식은 명제적이다. 따라서 P2를 기각해야 한다.
환원주의자들은positive한 설명적 작업을 더 할 필요가 있다. 명제적 지식에서의 비대칭으로, 이해의 비대칭을 설명할 필요가 있다.
지식의 양의 차이가 이해의 차이가 된다. 따라서 이해에 정도차가 있다는 점을 지식의 양의 차이로
설명할 수 있다.
가능한 반론 1: 환원주의자들에 따르면 아이가 왜 화재가 일어났는지 안다면, 아이가 왜 화재가 일어났는지 이해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는 아이가
화재의 원인을 전혀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는 직관에 반한다.
ㄴ 저자의 답변: 우리 직관은 그렇지 않다. 아이도
아주 조금 이해하는 것.
가능한 반론 2: 환원주의가 참이라면, 다음과 같은
문장이 적절하지 않다고 해야 한다. 환원주의에 따르면 지식이 이해를 함축하기 때문이다.
(9) 존은 왜 화재가 일어났는지 알지만, 이해하지는 못한다.
(10) 존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만, 이해하지는 못한다.
그런데 위 문장들은 문제가 없는 것 같다.
ㄴ 저자의 답변: 어떤 맥락에서는, 행위자가 왜 p인지 안다는 것이 '행위자가
"p가 q 때문이다"라는 문장이
참임을 안다'와 '행위자가
p가 q 때문임을 안다' 중 무엇을 의미하는지
애매하다. 전자의 경우 이해한다고 말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따라서
이런 경우 (9)와 (10)과 같이 말할 수도 있다.
이 점을 뒷받침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추론을 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해보자.
(11) 존이 화재가 왜 일어났는지 알지만 이해는 못한다면, 화재에 대해 존이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는 것이다.
....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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