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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2월 28일 화요일

[요약] Stalley, R. F. (1994), "Persuasion in Plato's Laws"

Stalley, R. F. (1994), "Persuasion in Plato's Laws", History of Political Thought.

 

<법률>718a-723d에서 아테네인은 입법가들이 입법을 할 때 전문 혹은 '서곡을 붙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의 목적은 강제와 설득을 결합하는 것이다. law proper는 불복종을 처벌하고 강제를 행사하지만, 전문은 설득을 한다. 전문은 청자를 더 나은 마음 상태로 만들고 배울 준비가 되게 한다(723a). 법률 전체에 정교한 전문(726-734e)이 붙어야 하고, 법에는 많은 양의 설득하는 내용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내용은 많은 경우 전문 형태를 띤다.

(*각주 5: 명시적으로 전문이라고 언급되는 구절들은 다음과 같다. 773a-e (the law on marrage); 854a-c law on temple robbery); 869e-870d (law on voluntary homicide); 879b-c (law on assault); 888a-907d (law on atheism); 916d-917d (law on selling adulterated goods); 923a-c (law on wills); 927a-c (law on orphans); 930e-931a (law on caring for one's parents); 931e-932a (law on respect for parents))

플라톤이 말하듯 이것이 더 온화할(gentler)뿐만 아니라, 관련된 사람들의 자유도 존중하는 것처럼 보인다. 만약 그들이 옳은 일들을 하도록 설득된다면 그들은 강제 하에서가 아니라 자유롭게 행위하는 것이다.

R. W. Hall (1981, Plato, pp. 93-4)은 이 점이 플라톤이 정보를 얻은 시민들의 동의를 얻는 것에 관심을 가졌다는 점을 보여준다고 간주한다. 그러나 플라톤의 제안은 매우 논쟁적이다. 포퍼는 플라톤이 거짓 프로파간다를 이야기한다고 보았다(Popper, 4th ed. p. 270). 모로우는 좀 더 온건한 입장을 취한다(Morrow 1960 pp. 552-7; Morrow 1953). 그는 설득이 거짓을 포함해야 한다는 제안이 없음을 인정하지만, 설득이 끔찍한(appalling) 함축을 가진다고 주장한다(Morrow 1953, p. 237). , 플라톤적인 지도자는 진정으로 신성하거나 끔찍한 힘을, 인간들을 자기 맘대로 하기 위해 가질 것이라는 함축이다(Morrow 1960, p. 559). 스탤리도 마찬가지로, 설득에 대한 옹호가 자유(liberty)와 개성(individuality)에 대한 위협이라고 본다(Stalley 1983, pp. 42-3).

보보니치는 전문이 합리적 설득하는 것이라고 본다. 보보니치에 따르면 합리적 설득은 합리적 고려에의 호소에 의존한다. 이런 방식으로 설득되는 사람은 그들이 따라야 할 행위와 그들이 채택해야 할 믿음들에 대한 좋은 이유들을 인지하고 받아들이게 된다(Bobonich 1991, pp. 365-6). 이는 감정에 호소하거나, 거짓이지만 유용한 믿음을 심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이성에 근거하지 않은(non-rational) 설득과 대조된다(ibid p. 366). 그런데 모로우가 이런 의미의 합리적 설득이 <법률>편에서 옹호된다는 점을 부정할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그는 "플라톤이 설득적 구절을 "주문"이라고 언급하는 부분에 대한 논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플라톤이 이성에 호소하지 않는다는 암시를 하고 싶지도 않고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것들은 지적으로(intelligently) 설득적이다. 그것들은 감정과 함께 퍼지는, 합리적 통찰의 높은 수준에 있는 설득이다(Morrow 1953, p. 242). 조금 뒤에 그는 "[플라톤의] 나라에서 사용되는 설득은 의문의 여지 없이 instructing과 관련되어 있다. , 참된 믿음을 심는 것(ibid p. 243).

여기서 모로우와 보보니치 사이의 논쟁이 '합리적 설득'의 정의와 관련된 것이며 따라서 사소한 verbal matter에 불과하다고 생각될 수도 있다. 그러나 저자는 이 문제가 플라톤의 정치 철학의 핵심과 닿아 있는 중요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Persuasion before the Laws

<고르기아스>편에서 고르기아스는 가르침 없이 설득하는 능력이 레토릭의 가장 큰 힘이라고 보았다. 왜냐하면 그것에 숙달된 사람이 특정 주제에 대한 전문가도 이길 수 있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고르기아스>456a-c). 이것은 웅변가가 진리의 문제나 타당한 합리적 논증에 관심 가질 필요가 없다는 점을 함축한다.

소크라테스는 진리에 관심이 있다. 그는 긴 연설을 하지 않고 질문과 답변에 의존한다. 그는 대중이 생각하는 것에 관심이 없고, 대화 상대자 한 사람에게 관심이 있다. 다른 말로, 그는 대화 상대자의, 강제되지 않은 동의를 추구한다(471e-472c). 이 중 많은 주제들은 소크라테스가 자신이 사람들을 더 낫게 만드는 진정한 정치가라고 이야기할 때 반복된다(521d-522e).

<고르기아스>편은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이해되는 경우가 많지만, 소크라테스는 군주정에 대해서도 많은 비판을 한다. 소크라테스의 철학 스타일은 정치에 대한 철저히 개인주의적 접근을 시사한다. 소크라테스적인 정치가는 시민들의 좋음을 추구한다. 그의 방법은 시민들 각자와 함께, 삶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문제들을 논의하는 것이다. 그는 각자의 자유롭고 진정한 동의를 추구한다.

그가 보기에 고르기아스와 그의 동료들에게는 매우 자유를 제한하는(illiberal) 무언가가 있다. 그들은 레토릭이 시민들을 착취할 수 있는 무제한적인 힘을 주기 때문에 레토릭을 가치 있게 여긴다. 그들이 보기에 웅변가들이 하는 설득은 강제와 근본적으로 다를 게 없다. 둘 다 다른 사람들을 통제하는 방식이다. 그렇다면 단순한 설득과, 소크라테스가 옹호하는 가르침 사이의 구분은 중요하다. 전자는 노예를 만드는 방식이지만, 후자는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진정으로 소크라테스적인 정치는 불가능하다. 소크라테스적 방법은 사람들이 경청하려고 하고, 자기-검토를 하려고 하고, 상당한 정도의 진지함과 진정한 지성을 갖춰야 한다. 그리고 진정한 소크라테스적 정치에는 오직 작은 사회에서만 가능한 면대면 토론이 필요하다. 따라서 <국가>편에서 플라톤이 설득에 대한 매우 다른 설명을 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철학자와 웅변가의 구분의 기저에 있는 지식과 믿음의 구분은 <국가<편의 도덕철학 및 정치철학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진정한 지식은 형상에 대한 이해를 요구한다. 그리고 형상을 이해한 소수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덕을 갖출 수 있다. 그러나 더 많은 사람에게, 지식이 아닌 믿음에 기반을 둔 다른 종류의 덕이 열려 있다.

수호자 계급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교육을 받는데, 오직 그들이 믿어야 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이야기만 들어야 한다. 소크라테스는 당시의 시에서 아이들에게 들려주기 부적절한 내용을 지적한다. 그의 목적은 아이들이 옳은 의견을 채택하도록 하는 것이다(<국가>378c0d, 391d). 그런데 이것은 아이들이 듣는 이야기들이 그들의 감정적 특성에 영향을 준다는 아이디어와 긴밀한 연관성이 있다. "rhythm and harmony penetrate deeply into the mind and have a most powerful effect on it and, if education is good, bring balance and fairness, if it is bad the reverse"(401d-e). 교육의 목적은 옳은 의견과 바르게 질서지어진 감정의 조화를 확보하는 것이다. 의견은 철학적 논증을 통해서가 아니라 옳은 종류의 이야기들을 통해 심어진다. 감정들은 옳은 종류의 예술적 그리고 신체적 훈련을 통해 옳게 질서지어진다. 그들은 배운 것에 대해 빠르게 의견을 형성하지만, 좋음에 대한 자신만의 통찰을 가진 것은 아니다.

수호자의 덕은 분명 지식이 아니라 옳은 의견과 옳게 질서지어진 감정을 산출하는 설득에서 유래한다. 이런 종류의 덕은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지식에 기반을 둔 진정한 덕이 소수만이 성취할 수 있는 것이라면, 의견에 기반을 둔 덕의 존재도 필요하다. <국가>편에서 설득에 대한 이러한 설명은 자유주의적 관점을 가진 사람들에게 불쾌하게 다가온다. 문학의 검열, 국가가 기반을 둔 원리들에 반하는 의견들의 금지 등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소크라테스는 때때로 거짓을 말하는 것을 허용한다(377b, d, 389b-d, 414b-c).

플라톤은 설득의 본성을 <파이드로스>편에서 가장 명시적으로 논의한다. <고르기아스>편과 마찬가지로 <파이드로스>편에서 플라톤은 웅변가를 비판하는데, 왜냐하면 그들이 진정한 지식 없이 설득하는 것을 목표로 삼기 때문이다. 레토릭은 영혼을 이끄는 기술(psuchagogia)이다(<파이드로스>261a). 진정한 설득 기술을 행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좋은지에 대한, 그리고 듣는 사람이 어떤 종류인지에 맞춰 어떤 설득적 기술이 적절한지 말하는 사람이 판단할 수 있도록 해주는, 인간에 대한 체계적인 지식이 필요하다(259e-262c, 269c-272b). 그런데 참된 수사술사(rhetorician)에게 이런 지식이 있지만, 그가 그 지식을 청중에게 전해준다는 제안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대신 그는 그 지식을 무엇이 최선인지 보고 설득의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무엇인지 고를 때 이용한다(*각주 38: 설득에 대한 플라톤의 취급에서 이 점이 모로우가 특히 문제적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Morrow 1953, p. 237). 이런 측면에서 <파이드로스>편의 참된 수사술사와 <국가>편의 철인왕 사이에 유사성이 존재한다. 철인왕은 설득적 기술을 이용해 시민들이 옳은 의견을 갖게 하지만, 시민들에게 지식을 전해주지는 않는다.

<고르기아스>편은, <국가>편과 <파이드로스>편과 명백히 다른 점이 존재한다. <고르기아스>편에 따르면 이상적인 정치가는 자유로운 토론에서 개개인의 강제되지 않은 동의를 추구한다. <국가>편과 <파이드로스>편에 따르면 참된 정치가는 좋음에 대한 이성적 통찰을 갖췄지만 그 통찰을 다수의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을 추구하지는 않는다. 대신 그는 사람들이 옳은 의견을 가지게 하고 옳은 성격을 개발하도록 하는 기술을 갖추고 있다.

그렇다면 <법률>편의 전문들은 <국가>편과 <파이드로스>편에 내재된 권위주의를 행사하는 또다른 방법인가, 아니면 <고르기아스>편의 소크라테스가 요구한 것과 같이 개개인의 이성적 힘에 호소하는 것인가?

 

 

 

 

Virtue and Persuasion in the Laws

<법률>편의 중심 주제는 입법이 전체로서의 국가의 좋음을 추구해야 하며, 이것은 시민들을 덕이 있게 만드는 문제로 이해된다. 크레테와 스파르타는 전체로서의 덕이 아니라 용기라는 한 가지 덕에만 집중했다는 문제를 가지고 있다. 이상적인 것은 모든 요소가 이성의 지도 하에 서로 평화와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이 구절의 함축은 덕이 appetitedesire가 옳은 이성과 함께 있는 조화에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시민의 영혼의 더 나은 요소들이 더 나쁜 요소들을 통제하도록 하는 제도들이 있어야 하고, 시민들은 고통과 즐거움에 저항하도록 훈련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교육(paideia)은 아이들에게 처음으로 생기는 훌륭함(훌륭한 상태, )이라고 저는 말합니다. 쾌감(즐거움)과 좋아함(사랑: philia), 고통(괴로움)과 싫어함(미움)이 아직 그 이유(논거: logos)는 알 수가 없는 그들의 혼에 올헥 생기게 될 경우에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그 이유(논거)를 알게 되었을 때, 그것들이 적절한 습관(버릇: ethos)들에 의해 옳게 버릇 들이게 되었다는 것에 이성과 찬동하게 될 경우에, 이 찬동이 전체적인 훌륭함(훌륭한 상태, )입니다(653b-c).

 

아테네인은 국가의 모든 측면이 이런 종류의 덕을 [시민들에게] 심기에 적합하도록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논의는 <국가>편과 유사하다. <법률>편에서 교육의 목적은, <국가>편에서 수호자들의 교육과 마찬가지로, 옳은 믿음을 심고 성격이 그에 따라 만들어지도록 하는 것이다. 두 대화편에서 모두 시가와 음악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런데 두 대화편 사이에 한 가지 중요한 차이가 있다. <국가>편에서 철인왕은 단지 옳은 의견이 아니라 지식을 가지고 있다. 이는 지식에 기반을 둔 덕과 의견에 기반을 둔 덕 사이의 대조가 있다는 것이다. 반면 <법률>편에서는 철인왕이 없고 의견과 지식의 대조가 매우 작은 역할만 한다. 이 점은 689a-b의 예에서 분명하다. 여기서 아테네인은 가장 큰 어리석음을 비판하는데, 이 어리석음은 한편으로는 고통과 즐거움 사이의 불화에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합리적 의견에 있다. 조금 뒤에서 그는 이 상황을 고통과 즐거움을 경험하는 영혼의 부분이 지식, 의견, 이성에 대립하는 것으로 특징짓는다.

법에 대한 아테네인의 설명은 그의 덕에 대한 설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철인왕이 없기 때문에 법이 최상위 권위를 갖는다. 적절하게 이해된 법은 이성의 분배이며(644c-d, 713e-714a), 옳은 의견의 원천이다(632c). 따라서 시민들이 법에 따를 때 그는 이성에 따라서 행위하는 것인데, 그러나 그들에게는 법의 원천에 대해 그들 자신의 이성적 통찰이 필요하지 않다. 호법관들조차도 그런 것이 필요하지 않다. 아테네인은 호법관 중 일부는 의견을 가지고 다른 일부는 지식을 갖는다고 상정한다(632c).

덕과 법에 대한 이런 설명을 고려할 때, 합리적 설득과 이성에 근거하지 않은 설득의 구분이 <법률>편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는다. 보보니치는 플라톤이 <국가>편에서 덕에 합리적 정당화가 필수적이라는 강한 관점을 내세웠으면서 덕에 합리적 정당화가 필요하지 않다는 반대쪽 극단으로 바꾼다면 놀라울 것이라고 말한다(Bobonich 1991, p. 384).

그러나 <법률>편의 설득에 대해 의구심을 던지는 사람이 꼭 플라톤에게 그런 변화가 있었다고 할 필요는 없다. <국가>편에서도 플라톤은 대부분의 시민들이 가질 수 있는 하나의 덕은 지식이 필요하지 않으며, 영혼의 낮은 수준의 요소들과 옳은 의견의 조화를 포함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법률>편에서도 플라톤은 비슷한 종류의 덕과 비슷한 종류의 훈련을 상정한다. 따라서, 많은 시민들과 관련해서는 <국가>편과 <법률>편에서 덕의 원칙 사이에 큰 차이는 없다.

덕과 법에 대한 이런 설명은 전문에 포함된 설득의 종류와 관련해 명백히 관련이 있다. 아테네인의 대부분의 조치들(measures, 정책들)은 시민들이 적절한 종류의 느낌을 갖도록 설계되었다. 그러나 한 가지 의미에서 시민들의 이성의 힘이 관여해야 한다. 그들은 그들이 배우는 의견들을 이해하기 위해 그리고 법들을 이해하고 그들 자신들의 삶에 적용하기 위해 이성적 역량이 필요하다. 따라서 우리는 전문이든 다른 설득적 장치든 이성에 대한 의존이 없다고 할 수 없다. 플라톤은 우리 의견과 느낌 사이에 밀접한 관련성이 있다는 점을 매우 잘 알았다. 욕구가 의견을 왜곡하기도 하고, 잘못된 욕구는 잘못된 의견과 관련되어 있기도 하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 전문에 의해 행해지는 설득은 합리적이어야 한다. (*각주 55: 여기서 한 가지 어려움은 그리스어 단어 'logos''이성'이나 '논증'으로 번역되기도 하지만, ''로 번역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플라톤이 염두에 둔 것이 말에 의한 설득인지 이성에 의한 설득인지 아는 데 어려움이 있다.) 다른 한편, <법률>편의 전체 체계가 옳은 의견에 의존한다는 점과 이를[옳은 의견을?] 나이 든 사람의 지혜와 동일시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전문이 철저한 철학적 근거를 준다는 의미에서 법에 합리적 정당화를 제공하여야 한다는 요구는 없다. 대신 입법가는 느낌과 appetite이 옳은 의견과 조화되는 영혼 상태를 만들기 위한 어떠한 가능한 방법이라도 찾아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성에 근거하지 않은 설득이 적합할 것이고, 이것이 아테네인이 아이들의 놀이와 음악 같은 것들을 강조하는 이유이다. 이런 설득 방법들을 묘사함에 있어, 아테네인은'epode'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하는데, 이것은 ''spell', 'enchantment', 'incantation' 등을 의미하며 따라서 지식이나 동의 없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마법적 과정을 함축한다. (*각주 58: 모로우는 이 점을 강조한다. 이에 대해 보보니치는 (a) 플라톤의 언어 사용이 장난스러울 때가 많고, (b) 'epide'라는 단어의 사용은 한 번만 제외하고는 법과 관련된 설득에 대해 논의하는 맥락이 아니라고 주장한다(Bobonich 1991, p. 374). 두 가지 다 옳지만, 이것들은 아테네인의 일반적 목적이 어떤 이용 가능한 방법으로든 시민들이 바른 성격을 갖추도록 하는 것, 그리고 이런 방법들이 영향 받는 사람들의 의식적인 협력을 포함할 필요가 없는 이라는 인상을 없애는 데 별 역할을 하지 못한다. 903b에서 이신론에 대해 반박하면서 아테네인은 여전히 신화적 주문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보보니치는 아테네인이 '신화적 주문''논증'을 구분한다는 점과, 신화적 주문이 사실은 논증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그런데 여기서 '논증'이라는 것이 옳은 번역인지 분명치 않다. 왜냐하면 'logos'의 근본적인 의미는 ''이며, 아테네인이 사실 제공하는 것은 우주의 신적인 통치에 대한 설명으로서의 논증이 아니다. 따라서 아테네인이 가상의 젊은이를 말로써 동의하게 했고(해당 대사 앞에 나온 내용), 거기에 더해 말로써 추가적인 주문(해당 대사 뒤에 나오는 내용)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점을 고려하고 다른 부분에서 음악, 시가 등을 이용하는 것에 대한 묘사를 보면, 아테네인이 특별히 합리적인 설득 방법/비합리적인 설득 방법의 구분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것으로 보이며 그보다는 말로써 혹은 음악으로써 동의를 얻어내는 것/물리력으로 동의를 얻어내는 것의 구분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Persuasion and the Preludes

아테네인은 법에 전문을 붙여야 한다는 제안을 설명하면서 의학적 실천과 비교한다(719e-720e). 두 가지 종류의 의사가 있다. 자유인 의사는 환자가 동의하도록 설득할 때까지 어떤 처방도 내리지 않는다. 그리고 설득하여 환자를 온화하게 만든 뒤로는 건강을 회복시키기 위한 일을 완수하려 노력한다. 치료에 수반하는 설득까지 이중적 방법론을 사용하는 자유인 의사는 아테네인이 추천하는 입법적 실천의 종류를 설명한다.

아테네인이 '가르치기', '배우기', '논증' 같은 단어를 전문을 특징짓기 위해 사용하기 때문에, 이 구절은 일종의 합리적 설득에 관여해야 함을 함축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더 인상적인 것은 <고르기아스>편과의 유사점인데, <고르기아스>편에서는 이유들이 자유롭게 제공되고 수용되는 사람 대 사람의 논쟁을 해야 함을 주장한다. 합리성에 대한 더 강한 인상은 더 뒤의 구절(857c-d)에서 전해지는데, 거기서 아테네인은 의학과 관련된 같은 비유를 사용한다. 자유인 의사가 철학에 가까운 방법을 사용하고, 환자를 교육한다는 등의 언급이 있다. 아테네인은 그의 [입법] 방법이 교육적이라고 특징짓는 것을 분명 기꺼이 받아들인다(857e).

반대로 '길들여진', '온화해진', '쉽게 설득되는', '유순한' 등의 어구는 아테네인의 방법이 근본적으로 이성에 근거하지 않은 것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입법가와 의사 사이의 비유는 오해의 소지가 많다는 점을 주의해야 한다. 입법가의 활동은 필연적으로 일방적이다. 전문은 어떤 종류의 대화도 포함하지 않는다. 질문과 대답으로 이루어진 소크라테스적 방법보다는, <고르기아스>편에서 소피스트가 거부하는 장광설에 더 가깝다. 가장 놀라운 차이점은 두 방법의 목적이다. 의사의 경우 환자가 설득되지 않으면 그 환자는 치료를 받을 필요가 없다. 아마도 환자가 오히려 그 치료가 바람직하지 않다고 의사를 설득하는 경우도 상상할 수 있다. 입법가의 경우 전문에 설득되지 않은 사람은 처벌의 대상이 된다. 따라서 입법가의 설득은 위협을 동반하기 때문에 비유는 무너진다.

[내 의견: <법률>편의 의사 비유에서 설득 없이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점은 <정치가>편에 나오는 의사 비유와 일관적이지 않은데, 그 이유에 대해서는 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그리고 구체적인 법 조항에 동의하지 않으면 처벌되지만, 전문에 동의하지 않았을 때 처벌된다는 이야기는 없다.

그리고 취지에 동의하지 않으면 법 조항 개정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는 것 같다. 전문은 어디까지나 취지를 설명한 것.]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점이 있다. 우리는 아테네인이 말하는 것을 액면가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전문에 대해 정확하게 평가를 할 수가 없다. 대신 실천적으로 어떤 종류의 설득을 포함하고 있는지 물어야 한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다음 절에서는 몇 가지 전문들을 살펴본다.

 

The Preludes

721b-d에는 결혼과 관련된 법의 전문이 나온다. 여기에 분명 논증이 있지만, 당황스러울 정도로 안 좋은 논증이다. 이 논증은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모든 사람들은 본성적으로 불멸을 원한다. 사람은 아이를 가짐으로써 일종의 불멸을 얻는다. 따라서 사람은 30에서 35세 사이에 결혼을 해야 한다. 이 논증은 모든 사람이 본성적으로 불멸을 원한다는 주장에 대한 정당화 없이, 또는 우리가 이 욕구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는 설명 없이, 도는 이것이 사람들이 30에서 35세 사이에 결혼해야 함을 요구한다는 점을 보여주지 않고, 불멸에 대한 모호한 희망을 결혼 연령에 대한 매우 구체적인 법과 연결시킨다.

결혼에 대한 전문은 아테네인이 입법의 방법을 명시적으로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그러나 다른 전문들이 오히려 더 훌륭하다. 예를 들어 법률 전체에 대한 긴 전문(726a-734e)은 입법이 기반을 두어야 할 도덕적 기초를 상당히 효과적으로 제시한다. 그러나 그것은 논증으로서는 약하다. 그것은 대체로 지지되지 않고 검토되지 않은, 우리 최고의 선이 영혼에 대한 명예라는 주장과, 도덕에 대한 전통적인 기준을 따르는 것이 영혼을 명예롭게 한다는 주장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런 의존 경향은 다른 전문들에서도 만연하다. 또한 사람들이 도시 전체의 선을 위한 일을 해야지 개인적 선호를 따르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경향도 있다. 예를 들어, 772e-773c에서 결혼 상대에 대한 언급, 823d-824b에서 특정 동물을 특정 방식으로 사냥하는 것만이 용기 있는 사람에게 어울린다는 주장에 의존하는 것.

9권에서 형사 범죄를 다룰 때도 비슷한 패턴이 나온다. 신전에서의 절도를 다루는 법률은 단지 그런 범죄가 내적 광기에서 나온다는 주장에 의해서만 뒷받침된다(854b-c). 살인에 대한 법은 살해당한 사람의 영혼이 복수를 한다는 아이디어에 호소한다(865d-e, 870d-e, 872d-873a). 살인의 원인, 상해, 폭행, 유언 등등... [논문 172쪽 참고]

호법관들이 고아들을 돌보아야 된다는 주장은 고아의 부모의 영혼이 여전히 고아를 지켜보고 있다는 주장과, 신들과 인간들의 반감을 피해야 한다는 강력한 권고에 의해 정당화된다(927a-d).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는 주장도 신들이 노인들의 기도를 들어준다는 주장에 기반을 두고 있다(930e-932a)

이러한 점들은 전문에 대한 모로우의 묘사가 일반적으로 정확하다는 점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아테네인의 설득은 일반적으로 논리적 논증의 힘에 기반을 두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도덕적 그리고 종교적 믿음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그것을 conventional sermon의 특징을 갖는다고 묘사하는 것은 옳다(Stalley 1983, p. 43).

 

중요한 예외는 10권으로, 거의 전체가 불경에 대한 법률에 할당되어 있다. 여기서는 우주에 운동이 존재한다는 점만 빼고, 아주 적은 것만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이 부분은 <법률>편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데, 왜냐하면 플라톤의 도덕적 그리고 정치적 원칙들이 우리가 신적인 이성의 통제 하에 있는 우주에 살고 있다는 가정에 강력하게 의존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10권에서 아테네인은 그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들에 대한 정당화를 제공한다. 그런데 10권의 어조는 공정한 철학적 탐구의 것이 확실히 아니다.

10권은 불경과, 법의 부재가 다음과 같은 믿음에서 나온다고 주장함으로써 시작된다. (a)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또는 (b) 신들이 존재하지만 인간사에 신경쓰지 않는다. 또는 (c) 신들은 기도와 제물에 설득된다. 아테네인은 무신론을 지지하는 지적인 사람들이 있음을 인정하며, 이들을 처벌로 위협하기 전에 신들이 존재한다는 적절한 증명을 함으로써 설득하고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를 인정하면서 그는 지적인 무신론자들을 악당으로 간주하기를 감추지 않는데, 그들의 지혜로 보이는 것이 사실은 어리석음이라고 말한다(886a-b). 그리고 그런 사람들과 논쟁을 할 때 분노를 감추기는 힘들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무신론자들의 상태가 일종의 질병이며, 아무도 나이 들어서까지 무신론을 유지하지 않는다고 말한다(888b-c). 신들이 인간사에 신경쓰지 않는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비슷한 서론이 있다. 그들의 상태도 이성의 결함에서 나온 병리적인 상태다(900b). 무신론자들에게 가할 것으로 제안된 처벌도 주목할 가치가 있다. 정직한 무신론자는 5년 동안 감옥에 갇히는데, 그동안 야간 회의 구성원들이 그들에게 충고함으로써(admonish) 그들의 영혼을 구하고자 시도한다. 실패하면 사형시킨다(908e-909d). 여기서 놀라운 점은 무신론자의 오류가 일차적으로 지적임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국가에 의해 지지되는 원칙을 믿거나 죽는 선택지밖에 주어지지 않는다. 아테네인이 무신론자에게 합리적 논증을 제공한다고 하더라도, 그가 스스로 마음을 정할 능력을 가진 사람으로 대하지는 않는다.

 

The Laws as a Textbook

10권의 내용이 예외적임에도 아테네인이 자유로운 토론을 생각하고 있지 않음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많은 편견에 찬 내용들이 있다. 보보니치는 마그네시아 시민들에게 전문만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법률>편 전체를 교육시킨다고 주장한다. 811c-812a에서 대화 참가자들은 그들이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젊은이들의 교육 자료로 쓰자고 한다. 모로우는 이것이 전문들만을 가리킨다고 보는데, 보보니치의 주장대로 <법률>편 전체를 가리킬 수도 있다. 그래서 보보니치는 시민들이 다양한 의견에 노출될 것이라고 보는데, 플라톤이 그가 기각하는 의견들과 논증들에 대해서도 많이 다루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민들은 그들의 탐구의 자유가 어떻게 제한되는지, 그리고 이런 제한의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공공의 진술을 듣게 될 것이고, 사실, 전체적인 기본적 사회 구조와 이런 제도들의 정당화(검열 제도를 포함한)에 대해 솔직한 공공의 설명이 주어질 것이라고 말한다(Bobonich 1991, p. 377).

그러나 시민들이 <법률>편 전체를 배운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독립적 사고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은 아니다. 아테네인이 다른 사람들의 관점들을 언급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각각의 경우 대안적 관점에 대한 설명은 매우 편견에 차 있어서 공정한 평가의 기회가 없다.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아테네인이 그의 법에 내포된 것에 반대되는 의견이 가르쳐질 수 없게 하고 시민들이 외지인과 접촉함으로써 오염되는 것을 막는 데 공을 들인다는 것이다. 아테네인은 자유로운 탐구의 조건을 만드려고 하지 않는다. (*각주 83: 시에 대한 검열 (660a, 661d), <법률>편의 원칙들에 동의하는 사람들만 가르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주장 (811e-812a), 외지인과의 접촉을 최소화하기 (704d-705b, 950d-953e))

 

 

Conclusion

입법가는 모든 방법을 이용해 시민들을 덕 있게 만들어야 한다. 이를 위해 그는 시민들에게 옳은 의견을 심어야 한다. 모든 종류의 설득은 설득되는 사람에게 어느 정도의 합리성이 있어야 하고, 설득은 어느 정도의 논리적 논증을 포함할 것이다. 이만큼 거의 모든 형태의 말로 하는 설득은 합리성의 요소를 가지고 있다.

한편으로 아테네인은 전문을 기술할 때 '가르치기''이유를 주기'와 같은 언어를 사용하지만, 실천적으로는 10권에서만 진정 가치 있는 논리적 논증을 한다. 모로우 등은 설득 대상이 스스로 합리적 사고를 통해 마음을 정할 수 있어야 합리적 설득이라고 할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다른 말로 해서, 합리적 선택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 이는 대안들이 진정으로 공정한 방식으로 제시되고, 무엇이 증명되고 무엇이 단지 당연히 여겨지는지에 명확한 구분이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 자유인 의사 비유는 아테네인이 이런 종류의 합리적 선택을 허용하길 원한다는 것을 시사하지만, 실천적으로는 매우 다르다. 그는 공정한 방식으로 대안들을 제시하지도 않고, 당연하게 여겨지는 가정들에 강하게 의존한다.

이 구분은 중요하다. 자유인 의사 비유만 보면 <법률>편이 개개인에 대한 존중의 원리에 어느 정도 기반을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이다. 마그네시아 시민들은 정보가 제공된 후의 동의(informed consent)를 행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모든 가능성들을 알고, 그것들 사이에서 선택할 자유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개별 시민이 그들 자신의 도덕률(moral code)를 선택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그들 자신의 morality를 개발해야 한다는 제안은 없다. 아테네인은 그가 진정한 morality로 간주하는 것에 대한 대안들을 진정으로 알지 못하고 선택 능력이 없도록 공을 들인다.

설득에 대한 플라톤의 입장은 더 넓게 그의 형이상학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티마이오스>편에서 그는 우주가 어떻게 이성과 필연성의 조합으로 나왔는지 묘사한다. 이성은 필연성을 설득하여 최선을 향해 사물들의 가장 훌륭한 부분을 인도하게 한다(<티마이오스>48a). 그것은 개개인이 자신의 본성의 무질서하고 비합리적인 요소들을 이성의 지배 하에 놓는 것이다. 이것은 입법가의 도움을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는데, 입법가는 합리적 통제 하의 질서 있는 사회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아이들과 어른들이 적절한 종류의 교육을 받고, 무질서한 열정을 가라앉히고 그들의 삶을 이성의 요구에 따르도록 하는 법적 처벌의 대상이 되게 하는 것이다. '설득'(peitho-)은 플라톤이 이성이 자연의 비합리적 요소를 질서있게 만드는 과정을 가리키기 위해 쓰는 말이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 설득은 합리적이다. , 그것이 이성의 원리들을 내포하고, 세계를 이성에 따르도록 한다는 점에서. 그러나 이것은 그것이 설득되는 대상의 이성에 의거하여 작동한다는 점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설득되는 사람들의 영혼의 비합리적 요소들에 작용하고, 그들이 이성의 요구를 잘 받아들이도록 만든다.

플라톤의 관점에서, 우주는 신적인 이성의 통제 하에 있으며, 우리는 우리 자신의 영혼에 질서를 만들고,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 질서를 만듦으로써 이러한 신적인 힘에 약간의 몫을 한다. 이성이 혼돈(chaos)를 질서로 만드는 이 과정이 플라톤이 '설득'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플라톤은 인간이 자신의 자율적인 이성을 행사해야 한다는 데 관심이 없었고, 그보다는 우주를 지배하는 신적인 이성의 요구에 따라야 한다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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