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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2월 27일 월요일

[요약] Bobonich, C. (1991), "Persuasion, Compulsion and Freedom in Plato's Laws" (3절 생략)

Bobonich, C. (1991), "Persuasion, Compulsion and Freedom in Plato's Laws", Classical Quarterly.

 


1. Introduction

플라톤이 <법률>편에서 개별 시민과 도시의 법에 적절한 관계에 대한 논의에서 가장 강조하는 구분들 중 하나는 설득과 강제의 구분이다. 그리고 설득의 방법으로 플라톤은 특정 법 그리고 법 전체에 전문을 붙일 것을 제안한다. 전문은 시민들을을 처벌의 두려움이 아니라 이성으로 설득하는 것이다. 플라톤은 기존의 입법가들은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서, 이것이 혁신이라고 말한다(722b-e).

그런데 플라톤의 혁신의 의의를 이해하기 위해 두 가지 질문에 답해야 한다. 첫째, 플라톤이 강제가 아닌 설득을 해야 한다고 했을 때, '설득'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특히, 그가 합리적 설득을 염두에 두었는가? , 시민들이 채택해야 되는 믿음들에 대한 그리고 따라야 할 행위들에 대한 좋은 이유들을 인지하고 받아들이도록 합리적 고려에 의거해 설득되어야 한다고 한 것인가? 아니면 이성에 의거하지 않은(non-rational) 방식에 의한 설득도 포함하는 것인가? 시민들의 감정에 호소하거나, 거짓이지만 유용한 믿음들을 심음으로써 설득하는 것을 의도했는가?

둘째, 앞 질문과 관련된 것인데, 왜 플라톤은 시민들을 설득하는 것을 그렇게 중요하게 여겼는가? 설득은 강제의 비용을 줄이면서 시민들이 따르는 정도를 높이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가, 아니면 다른 좋은 이유가 있는가?

저자는 플라톤이 법이 합리적 설득에 관여해야 함을 옹호했다고 주장할 것이며, 강제에 반해 설득은 자유로운 인간을 어떤 방식으로 대하는 것이 이롭게 하는 것인지에 대한 그의 관점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2. What Does Plato Mean by 'Persuasion'?

2.1. Overveiw

먼저 '설득하다', '설득'으로 번역되는 그리스어 단어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그 다음으로 플라톤이 <법률>편에서 옹호한 설득의 본성에 대한 몇몇 현대 학자들의 관점을 살펴볼 것이다. 마지막으로, <법률>편 텍스트 상의 증거들을 제시하고 그것이 플라톤이 시민들을 설득해야 한다고 했을 때 그것은 하빌적 설득의 형태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2.2. The Linguistic Evidence

'설득하다'로 번역되는 그리스어는 다양한 방식의 설득을 포괄하는 의미로 쓰인다. 따라서 플라톤이 쓴 단어만 봐서는 그것이 합리적 설득을 의미하는 것인지 알아낼 수 없다.

 

2.3. The Commentatiors

포퍼(Karl Popper)<열린 사회와 그 적들>에서 플라톤이 쓰는 '설득'이라는 말이 공정한 방식으로의 설득과 안 좋은 방식으로의 설득을 모두 포괄할 수 있다고 옳게 지적했다. 포퍼는 플라톤이 후자의 의미로 그 단어를 썼다고 주장한다. 포퍼는 주로 <국가>편의 '고귀한 거짓'(noble lie)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법률>편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법률>편에서 플라톤은 시민들을 설득해야 한다는 주장을 두 의사 비유를 통해 도입한다(791e). 자유민 의사는 환자에게 시간을 쓰면서 그들의 신체 조건과 병의 본성에 대해 조사하고, 환자들에게 가르치고 환자들을 설득한 뒤에만 처방을 한다. 포퍼는 이에 대해서, <법률>857c-d에서 플라톤이 치료에 집중하기보다 환자에게 철학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이야기하는 의사에 대해 불평한다. 포퍼의 이러한 해석에는 한 가지 주요한 실수가 있다. 857c-d에서 플라톤이 불평하는 것은 노예 의사에 대해서이며, 플라톤은 노예 의사가 명백히 잘못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저자는 자유인 의사의 설득 및 법에 필요한 설득이 거짓의 사용을 포함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모로우는 플라톤이 참인 믿음을 심기 위해 설득을 이용한다고 하지만, 그런 믿음을 시민들의 이성보다는 시민들의 감정에 호소하여 심는다고 말한다(Morrow 1953, p. 244). 스탤리도 비슷하게 본다. 스탤리에 따르면 플라톤은 단지 믿음을 산출하는, 레토릭에 의한 설득과, 진정한 지식을 산출하는 설득을 구분했다. 그는 플라톤이 말하는 설득이 후자에 속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플라톤의 설득은 권고/장려/훈계(exhortations)이다. 전문은 대개 오히려 conventional sermons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Stalley 1983, p. 43).

그러나 <법률>편의 플라톤이(<국가>편과 마찬가지로) 시민들이 올바른 습관을 개발하고 적절한 감정을 기르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는 것은 사실이다(특히 어릴때). 그럼에도, 그가 염두에 둔 것은 합리적 설득이다. , 시민들은 그들이 따라야 할 행위들 그리고 채택해야 할 참된 믿음들에 대해 좋은 인식적 이유를 제공받아야 한다. 이에 대한 텍스트 상의 증거를 제시하겠다.

 

2.4. The Evidence of Laws

구절 A: 4719e-723c

두 의사 비유

여기서 플라톤은 노예 의사를 비판하고, 기존 입법가들이 두 가지 방법을 다 써야 한다는 점을 알아차리지 못했다고 말한다. 플라톤은 법에 전문을 붙여야 한다고 제안하고, 전문을 두 종류로 나눈다. 첫째, 그는 <법률>편의 앞부분이 법 전반에 대한 일반적인 전문이며, <법률>편 전체가 학교의 교과서로 쓰여야 한다고 말한다(811c-812a). (*각주 22: 사실, 시민 교육 전체가 일종의 설득을 구성한다.) 둘째, 중요한 개별 법에 각각 전문이 있어야 한다. 시민들은 왜 그들이 그 법에 따라 행위해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을 받는다.

 

구절 B: 9857c-e

두 의사 비유에서, 노예 의사가 자유인 의사를 비웃을 것이라는 이야기. 환자를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교육을 하고 있다고 비꼼. 마찬가지로 대화자들이 하는 방식으로 입법을 하는 것은 입법이 아니라 교육을 하고 있다고 비꼴 것임.

 

구절 C: 10885c-890d

가상의 젊은 무신론자가 자신을 설득하고 가르치고 적절한 근거를 제시해 달라고 하는 내용. 그리고 885e에서 진실에 비추어 말해달라고 함. 아테네인은 이를 받아들이고, 마그네시아의 신학의 근본 논제들에 대해 철학적으로 정교한 논증을 여러 가지 제시함.

(i) 887e에서는 무신론자들이 어려부터 듣던 이야기를 단 하나의 적합한 논증 없이 거부한 점에 대해, 분노를 참기 어렵지만 부드럽게 말해야 한다고 말함.

(ii) 888c-d "만약에 그대가 내 말대로 한다면, 이것들과 관련된 신념이 가능한 한 확실하게 되는 걸 그대는 기다리게 되는 걸세. 그게 그런지 또는 그렇지 않은지,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고 특히 누구보다도 입법자에게 알아본 다음, 재검토해봄으로써 말일세."

(iii) 890b-d 플라톤은 입법가가 입법의 모든 측면에 대해 설득을 해야 하고, 시민들은 법에 추천된 신학적 그리고 윤리적 믿음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이상을 해야 한다고 다시 한 번 강조한다. "(...) 사람들에게 법률을 제정해 줌과 함께, 그들이 가급적 고분고분해지도록, 지시하는 말들에 아무런 설득도 덧붙이지 않아야만 합니까? / 클레이니아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들과 관련해서 조그마한 설득의 여지라도 아무튼 있기만 하다면, 조금이라도 자격 있는 입법자는 결코 지치는 일 없이, 흔히 하는 말로, 목청껏 외치며, 이런 주장으로 그 오랜 법을 돕게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런 구절들에서, 플라톤이 옹호하는 설득의 종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추론해볼 수 있다.

(a) 설득되는 사람이 요청하는 것은 "가르침을 받는 것", 즉 법에서 요구하는 행위들이나 믿음들을 채택하는 데 있어 좋은 논증을 제공받는 것이다(e.g., 885d). 그런 믿음들은 참이어야 한다(e.g., 885e). 그리고 그런 행위는 시민들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b) 법과 전문이 실제로 하는 것은 "가르치기"로 특징지어진다, , 시민들에게 논증을 제공하고 그들이 배우게 하는 것이다(e.g., 718c-d, 720d, 723a, 857d-e, 888a).

(c) 플라톤은 법이 좋지 않지만(bad) 설득력 있는 논증을 시민들에게 제공해야 한다고 제안한 적이 없다. 모든 결론에 대해 전문이 완전한 철학적 논증을 제공하기를 기대할 수는 없지만, 플라톤은 분면 좋은 이유를 제공하기를 요구하고, 철학에 가까운 논증을 이용하는 것을 장려한다(857d. 720c에서 노예 의사가 환자의 병에 대한 설명을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문제제기와 비교하기).

포퍼의 주장과 달리, 플라톤이 거짓 프로파간다를 사용한다는 증거는 없으며, (a)-(c)는 그에 대한 결정적인 반박 증거다.

모로우와 스탤리의 주장과 달리, (a)-(c)는 플라톤이 옹호한 것은 합리적 설득, , 시민들에게 단지 감정적으로 효과적인 레토릭이 아니라 참된 믿음을 위한 좋은 논증을 제공하는 것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이제 (a)-(c)에 대한 가능한 반론들을 고려해보자.

(1) 언어학적 고려. 모로우는 플라톤이 시민들의 교육을 묘사하면서 'incantation', 'enchantment'(epode [영어로 두 가지로 번역하는 듯])라는 단어를 쓴다고 지적한다. epodai는 플라톤이든 다른 그리스 작가든 마법과 연관시켜 사용하는 단어다. 모로우는 이 점이 플라톤이 옹호하는 설득 과정이 일차적으로 non-rational한 것이라는 증거라고 본다. , 그 설득은 시민의 이성보다는 감성에 호소하여 시민들의 믿음을 형성하고 바꾸는 것이 목표라는 것이다.

저자의 반론: 플라톤의 단어 사용을 너무 과하게 강조할 필요는 없다. 첫째, 플라톤의 언어 사용은 많은 경우 다소 장난기가 있기(playful) 때문에, epodenon-rational한 의미는 항상 진지하게 의도된 것이 아닐 수 있다. - (*각주 36에 다른 대화편에서 그렇게 말한 사례들 나열하고 있음)

둘째, epode<법률>편에서 꽤 자주 등장하긴 하지만, 하나의 예외를 제외하면 플라톤이 법의 설득의 종류를 논의하는 구절에 있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 아이들의 교육과 관련되어 있다. 설득과 관련된 유일한 예외는 신들이 인간사에 관여한다는 논증 끝부분에 나온다(903a-b). 아테네인은 논증을 제시한 후에, 추가적으로 일종의 주문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여기서 주문이(mythic incantations)이 논증과 구분되며, 가상의 무신론자는 둘 다 받게 될 점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플라톤이 말하는 '주문'이 사실 논증이라는 점에도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무신론자가 합리적 고려에 기반을 두고 마음을 바꾸게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같은 말이나 설명이 독자나 청자에게 하나 이상의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을 인지해야 한다. 그것은 합리적 설득과 감정에 대한 호소 둘 다로 기능할 수 있다. 플라톤의 전문들이 합리적 설득의 사례로서뿐만이 아니라, 감정적 효과를 위해 설계된 것일 수도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구절 A-C에서 '가르치기', '배우기', '논증'과 같은 단어들의 빈도로 볼 때, 플라톤에게 법의 설득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그것이 합리적 논증에 의거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A-C에서 자유인과 노예의 구분을 강조하고 각각에 대해 서로 다른 종류의 treatment를 해야 된다고 한 것과도 잘 어울린다. 자유인이 받을 만한 것은 마법에 걸리는 것이 아니라, 합리적 설명을 받는 것이다.

구절 A-C에서, 플라톤이 그런 설득이 특정 감정적 변화를 시민들에게 일으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반복적으로 주장한다. "입법자가 권고하는 것들을 한층 더 얌전히 그리고 호의적으로 듣는 데 뭔가 도움이 될 것이라 제게는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그게 설사 그가 말하는 것을 든는 사람을 크게는 아닐지라도 작으나마 더 호의적이고 더 쉽게 배우도록 만들기라도 한다면, 그건 아주 만족할 일입니다(718d)" Verseny"법의 설득이 단지 시민들을 유순하고 잘 동의하게 만들기 위한 것인가? 플라톤은 시민들의 합리적 능력을 잠재워야 한다고 말하는 것인가?"라고 우려한다(Versenyi, L., ‘The Cretan Plato’, RMeta 15 (1961), 6780, pp. 6970).

저자의 답변: 이 구절에서 플라톤은 시민들을 gentle하게 만드는 것과 그들이 더 잘 배우게 하는 것 사이의 연관성을 이끌어낸다(e.g., 718c-d, 722e-723a, 887e-888a). 플라톤이 염두에 둔 것은 최소한 몇몇 시민들은 그들이 합리적 설득에 가까워지도록 만들어주는 감정과 욕구를 가질 것 같다는 것이다. 이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나타난다. 첫째, 그들이 법에 따른 행위를 하고 참된 믿음을 갖는 것이 그들에게 최선이라고 합리적으로 설득되어도, 그들의 감정과 욕구가 자제력 없음 때문에(akratically) 그들 자신이 합리적으로 도달한 판단에 맞춰 행위하는 데 실패할 것이다. 둘째, 그들의 감정과 욕구가 그들의 추론 그 자체의 과정을 오염시킬 수 있다. 추론 역량을 변형시켜 합리적 판단에 도달할 수 없게 할 수 있다. 각각의 경우에서, 시민들의 감정과 욕구는 합리적 판단을 형성하고 그에 따라 행위할 수 있기 전에 바뀌어야 한다. 시민들을 순하게(gentle) 만다는 일은 그들의 감정과 욕구와 관련해 적절한 조건으로 만들고 그래서 그들이 배울 수 있고 배운 것에 기반을 두고 행위할 수 있다.

여기서 그런 과정에 대해 의심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특정 감정과 욕구가 합리적 의사 결정과 행위에 일반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맞지만, 합리적이기 위해서 피해야 될 욕구와 감정이 무엇인지에 대해 플라톤과 의견 불일치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점은 <법률>편의 플라톤과, 합리적 숙고를 촉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인지 우리가 의견 불일치가 있다는 점을 보여주지만, 합리적 숙고의 가치에 대해 의견 불일치가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내 의견: '합리적'이라는 말을 너무 다른 의미로 쓰는 것 같다. ]

886a-b를 예로 들어 보자. 아테네인은 클레이니아스가 왜 그들이 의견을 달리하는지 제대로 모르고, 무신론자들이 다만 쾌락과 욕망을 자제하지 못해서 그렇다고만 생각한다고 이야기한다. 그에 따르면 문제는 일종의 굉장한 무지인데, 가장 큰 지혜인 듯 여겨지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플라톤은 최소한 두 종류의 무신론자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욕구, 특히 즐거움에 대한 욕구가 너무 강한 무신론자와, 굉장한 무지를 겪고 있는 무신론자. 이 무지는 신과 정의 그 자체가 단지 합의에 의해 있거나 인간의 contrivance때문이지 본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899e-890a). 플라톤은 왜 젊은이들이 그런 원칙을 특히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지 설명한다. 젊은이들이 판단하기로 지혜로운 사람이 주장하는 것으로서, 누군가 강압적으로 이기게 하는 것이 정의라는 것이다(890a 전체 읽기).

이제 이 원칙과 젊은 무신론자의 욕구 사이의 연결을 알 수 있다. 이 원칙은 젊은 무신론자의, 즐거움에 대한 강한 욕구를 snaction한다. 젊은 무신론자가 그의 관점에 대해 좋은 이유가 없다고 플라톤이 강조한다는 점을 고려하면(e.g., 887e-888a), 젊은 무신론자가 그의 믿음을 유지하는 원인은 즐거움에 대한 욕구라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다. 따라서 그를 설득하는 것은 그의 감정과 욕구에 특정 변화를 가져오는 것을 포함할 것이다. 이 사례에서, 아마도 입법가는 그의 즐거움에 대한 탐닉을 없애야 할 것이다. 그 뒤에 무신론자는 참된 판단과, 그에 기반을 둔 행동에 합리적으로 도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2) 합리적 설득을 위한 세팅을 제공하는 사회적, 법적 조건과 관련된 반론도 있다. 플라톤이 <법률>편에서 개략적으로 말한 교육 시스템은 시민들이 특정 연령에 도달해 합리적 탐구를 하기 전에 시민들의 감정과 욕구를 훈련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심지어 어른들에게도, 탐구의 범위는 매우 제한된다. 문학과 음악은 엄격하게 검열되고, 기본적인 신학적 믿음들은 공식적으로 강제할 수 있고, 외국 여행 및 외국인과의 접촉은 상당히 제한되고, 삶의 대부분의 측면에서 정해진 방식대로 사람들이 살게 하는 것이 만연하고 공식적으로 장려되며 사회적 압력이 가해진다. 그런 조건 하에서 합리적 탐구는 거의 불가능할 것일고 생각할 수 있다. 상당한 정도의 표현 및 탐구의 자유가 합리적 탐구와 설득에 필수적이며, 플라톤이 묘사하는 도시에는 이런 것이 없다.

그러나 이런 비판이 참이더라도, 그것이 보여주는 것은 플라톤이 합리적 탐구에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해 잘못 생각했다는 것이다. 플라톤이 합리적 탐구를 중시하지 않았거나, 시민들 사이의 합리적 탐구를 장려하지 않았다는 점은 보여주지 않는다. 그리고 플라톤의 편에서 다음과 같은 사항들을 지적할 수 있다.

(a) 마그네시아 시민들은 어느 정도 다양한 의견에 노출될 것이다. <법률>편 그 자체는 학교 교과서로 사용될 것이고, <법률>편에서 플라톤은 그가 거부하는 의견들과 논증들을 자주 논의한다. (10권에서 공식적 신학에 반대하는 무신론자와의 가상적 대화가 대표적인 예이다.) 이로써 플라톤은 시민들이 그들의 탐구의 자유가 어떻게 제약되었고, 그 제약의 이유가 무엇인지 공적인 진술을 듣게 되도록 했다. 사실, 기본적인 사회 구조와 이 제도들(institutions) - 검열 제도를 포함한 - 에 대한 정당화에 솔직한 공적인 설명이 주어질 것이다. 따라서 <법률>편의 기본적인 정치적 원리들은 (<국가>편과 극명히 대조되어) 모든 시민들에게 알려질 것이며 공적인 정당화를 받을 것이다. 사실, 그 원리들은 도덕 원리들의 개방성(openness)에 대한 20세기의 제약들(롤즈의, 도덕 원리들의 수용이 합의의 결과라면 모든 시민들이 기본적인 정치적 원리들을 알아야 한다는 조건인 publicity condition을 포함한)도 통과할 것이다.

(b) 마그네시아에서 검열되거나 배제될 것은 거짓인 의견, 독트린, 문학이며, 특히 감정과 욕구에 강하게 호소할 그리고 시민들의 합리적 숙고(reflection)와 행위를 위한 능력을 약화시킬, 거짓인 믿음들의 표현이다. 그것들을 배제함으로써 플라톤은 시민들이 참된 믿음을 가지고 합리적 숙고에 관여할 수 있게 되리라고 보았다. 어떤 사람들은 거짓된 의견에 노출되는 것이 합리적 추론 과정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기서도 의견불일치는 합리적 탐구를 하는 방법에 대한 것이지, 합리적 탐구의 가치에 대한 것이 아니다.

(c) 지금까지 저자가 주장한 것은 플라톤은 법이 요구하는 것을 행하는 데 있어, 그리고 마그네시아의 정치 체계에 드러난(enunciated) 가치들을 수용하는 데 있어 시민들이 합리적으로 설득되는 것이 좋은 일이라고 믿었다는 것이다. 주장하지 않은 것은 이것이 법의 유일하거나 다른 것들을 압도하는 목표라는 것이다. <법률>편에서 플라톤은 모든 법과 사회적 제도들의 궁극적 목표는 시민들에게 가장 큰 가능한 행복을 산출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뒤에서 어떻게 합리적 설득이 이 목표에 기여하는지의 문제로 넘어간다)

 

(3) 마지막으로, 플라톤이 합리적 설득을 중요하게 생각했음을 받아들일지라도, 이러한 것이 전문에 있다고 해서 무엇이 성취되는지에 회의적일 수 있다. 그러한 제한된 논증이 정말로 시민들에게 지식을 산출해줄 수 있는가? 그리고 그것이 지식을 산출하는 데 실패했을 때는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는가? 우선 플라톤의 합리적 설득이 지식을 산출할 수 있는지의 문제부터 다뤄보자. 전문들은 시민들이 받는 유일한 교육 형태가 아님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천문학이나 무리수에 대한 논의(817e-820d)에 더해, 시민들은 <법률>편 텍스트를 공부할 것이다. 게다가, 구절 A-C에서 플라톤은 "가르치기", "배우기"를 강조하는데, 이는 플라톤이 이런 종류의 설득이 지식을 산출할 수 있다고 생각했음을 시사한다. 857d-e에서 자유인 의사의 설명은 환자에게 거의 의사가 가진 의학 지식을 주기에 거의 충분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것이 맞다면, 법에 의해, 그리고 정규 교육과 <법률>편 텍스트 공부가 시민들에게 최소한 어떤 윤리적 지식은 주기에 충분할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이것이 플라톤이 지식의 일반적 기준으로 내세우는 것을 만족하는지에 대해 확신할 수는 없다. 플라톤이 후기에 지식의 기준으로 어떤 것을 내세웠는지 분명하지 않다. 적절한 설명이 수반된 참된 믿음이라는 <테아이테토스>편의 기준을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적절한 설명이 수반된"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따라서 정말로 <법률>편의 설득이 윤리적 지식을 산출하는지를 확실히 알 수 없다.

두번째 질문은 합리적 설득이 지식 산출에 실패하더라도 이득이 되느냐는 것이다. 이런 질문의 배후에는 덕에 그리고 덕이 있게 되는 것에 필요하며, 이득을 위해서는 덕/덕이 있게 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첫째로 염두에 둘 것은 플라톤은 합리적 설득이 시민들에게 이득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자유인 의사의 비유가 이 점을 보여준다. 자유인 의사와 노예 의사는 매우 다른 감정적 영향을 가져다준다. 둘째로, 모든 법과 사회 제도의 궁극적 목표는 시민들을 위한 가장 큰 가능한 행복을 산출하는 것이라는 일반 원리를 기억하자. 합리적 설득은 다른 모든 사회 정책과 마찬가지로 이 원리에 의거해 정당화된다. 플라톤이 법이 합리적 설득에 관여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하므로, 우리는 그가 설득이 시민의 행복에 어ㄸ너 방식으로든 기여한다고 믿었음을 추론할 수 있다. 따라서 만약 플라톤이 그런 설득이 지식을 산출하지 못한다고 믿었다고 해도, 그것은 합리적 설득이 이득이 된다는 주장을 약화시키지 못한다. 다만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설명하는 작업이 남았을 뿐이다.

 

모든 전문을 여기에서 검토하지는 못했지만, 포괄적인 검토는 다음과 같은 점을 보여줄 것이다.

(a) 전문의 논증은 다소 단순화된 경우가 잦다. 중요한 용어들이 때때로 명료하게 정의되지 않고 가능한 반론들이 철저하게 고려되지 않는다. 다른 한편, 전문에서 몇몇 매우 정교한 논증들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플라톤의 기본적인 신핮거 원리들을 옹호하는, 10권에서의 길고 복잡한 논증은 불경에 대한 법률의 전문의 일부이다.

(b) 논증 외에, 감정과 욕구에 영향을 주기 위해 디자인된 테크닉들이 빈번하게 이용된다. e.g., 플라톤은 고상한 언어와 진중한 산문 스타일을 전문에서 자주 사용한다. (*각주 61: 특히 법 조항에 대한 일반적인 전문인 726a734e를 참고.)

(c) 플라톤 자신이 심각하게 받아들일 것 같지 않는 종교적 믿음들이나 신화들에 의거하는 문제적 사례들이 때때로 있다. (*각주 62: e.g., 살인 관련 전문인 870d-e, 872e-873a 그리고 신비스러운 의식 관련된 870d, 고대의 사제들과 관련된 872e, 살인자가 미래에 똑같은 범죄를 당하게 된다는 내용. 그리고 854b-c, 873e-874a, 913c도 참고) 앞에서 저자가 주장한 것처럼, 이성에 근거하지 않은 테크닉들을 이용하는 것은 시민들이 합리적 숙고에 개입하는 능력을 만들어 주는 데 필수적인 부분으로서 정당화될 수 있다. 그리고 만약 플라톤이 이런 경계를 때때로 넘는다고 생각이 들지라도, 이것은 그의 실제 의도가 그가 밝힌 의도와 다르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가 완벽히 해내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경우에, 전문이 옹호하는 믿음들은 플라톤이 참이라고 믿는 것이며 플라톤 자신이 받아들일 이유들에 의해 지지되는 것들이라는 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3. Why Persuade?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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