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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2월 23일 목요일

[요약] Mayhew, R. (2007), "Persuasion and Compulsion in Plato's Laws 10"

 Mayhew, R. (2007), "Persuasion and Compulsion in Plato's Laws 10", Polis.

 

보보니치(Christopher Bobonich)<국가>편에서보다 <법률>편에서 플라톤이 설득을 강조한다는 점이, <법률>편이 <국가>편보다 덜 권위주의적이며 개인의 자유에 많은 관심을 두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이런 해석이 플라톤이 <법률>10권에서 한 이야기를 설명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저자는 플라톤이 설득에 대해 말하는 맥락과 <법률>편의 정치철학 일반을 고려하면, 플라톤이 합리적 설득의 본성과 가치에 대해 실제로 어떻게 이야기했든, 플라톤의 정치철학 내에서 진정한 합리적 설득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법률>편에서 플라톤은 법의 지배라는 차선의 정치 체제를 내세운다. 그러나 그는 법을 공포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고, 시민들에게 각 법을 뒷받침하는 논증을 제시해야 하며, 그 논증은 법의 전문 형태여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법을 공포하는 두 가지 방식(설득과 강제)가 있는데도 당시 입법가들이 법을 강제만을 사용하여(, 처벌의 위협으로) 공포했다고 말한다. 작중 아테네인은 강제와 설득을 섞어서 사용해야 한다고 말한다(4722b-c). 만약 시민들에게 법 전문이 주어지면, 시민들은 법을 더 호의적으로(favourably) 받아들일 것이고 따라서 무언가를 더 잘 배우게 될 것이다(4723a).

플라톤이 설득의 필요성을 주장함에도, 여러 학자들은 이에 큰 신상을 받지 않았다. 예를 들어 포퍼(Karl Popper)<법률>편의 설득 개념이 20세기의 최악의 독재에서 나타나는 부정직한 프로파간다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모로우(Glenn Morrow)는 포퍼보다는 전문적이지만, 여전히 플라톤이 염두에 둔 것은 합리적 설득이나, 사상의 자유와 양립 가능한 설득이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보보니치는 포퍼와 모로우에 반대하여 플라톤의 설득 개념을 옹호한다. 보보니치는 플라톤이 합리적 설득에 관여해야 한다는 점을 옹호했고, 강제와 대비되는 설득의 이점에 대한 플라톤의 입장은 어떤 종류의 대우가 자유로운 인간에게 걸맞는지에 대한 그의 입장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주장한다. 플라톤은 시민들에게 법이 권유하는 신학적 그리고 윤리적 믿음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이상을 요청했다는 것이다. 법이 하는 일은 시민들을 가르치는 일, 즉 법이 요구하는 행위나 믿음을 채택할 좋은 논증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것들은 설득력 있는 나쁜 논증을 제공하거나 거짓 프로파간다를 이용하거나, 단지 감정적으로 효과적인 레토릭을 이용하지 말아야 한다. 보보니치는 플라톤의 자유 및 설득 개념의 한계가 무엇이든, 서양 철학에서 처음으로 개인의 합리적 탐구와 이해 역량에 의거해 자유를 해명하려 했으며, 이 역량과 자유를 정의로운 상태의 모든 시민들에게 함양하고자 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저자는 보보니치의 해석에 동의하지 않으며, 특히 <법률>10권에 나오는 불경에 대한 법 및 종교에 대한 논의를 증거 삼아 반박한다.

불경에 대한 법의 전문은 <법률>편에서 가장 긴 전문이며, 거의 전부가 세 가지 불경한 믿음인 무신론, 이신론(신들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인간을 상관하지 않는다는 입장), 전통적 유신론(신들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기도하고 제물을 바치면 요구를 들어준다는 입장)에 대한 반론이다. 플라톤은 이 맥락에서도 설득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한다.

10885c-e(그리고 899c-d도 참고)[가상의 무신론자가 자신들을 온화하게 설득하라고 요구하는 부분]은 보보니치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가상적인 대화일 뿐, 마그네시아 시민들에게 이런 대화가 합법적이지 않음을 유념해야 한다. 10890b-c에서 아테네인과 대화 상대자들은 시민들에게 옳은 신학적 믿음을 설득하기 위해, 불경에 대한 법 앞에 전문이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10권에서 플라톤은 때때로 설득이 중요하다고 주장하거나, 주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저자는 다음 절들에서 플라톤의 생각에서 합리적 설득이 중심적이지 않음을 보여주는, 10권의 네 구절을 검토한다. 그리고 저자는 플라톤이 설득에 대해 말하는 맥락과 <법률>편의 정치철학 일반을 고려하면, 플라톤이 합리적 설득의 본성과 가치에 대해 실제로 어떻게 이야기했든, 플라톤의 정치철학 내에서 진정한 합리적 설득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I. Hating Atheists (887c-888a)

플라톤은 아테네인과 대화자들이 무신론자들을 설득할 때 마주하는 한 가지 문제를 이야기한다. 혐오해야 할 이유들이 많은 무신론자들을 분노하지 않을 채로 설득해야 하는 것이다. 설득 대상에게 화를 내면서 성공적으로 설득을 할 수는 없다(10885c-e, 888a).

왜 플라톤은 무신론자를 혐오 대상으로 봤는가? 10887c-e에 따르면, 무신론자를 혐오하는 것은 그들이 거짓이고 위험한 관점을 옹호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1) 어려서부터 어머니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에게 들은 이야기를 믿지 않고 (2) 그들의 부모가 믿는다는 점을 알고 있는 신들을 그들이 믿지 않고 (부모가 믿음을 가지고 하는 여러 행위를 봤음에도) (3) 그들이 거의 모든 그리스인과 야만인들이 모든 종류의 상황에서 믿는 신들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플라톤은 분명히 사람이 그가 길러지면서 들은 이야기를 들어야 하며, 그러지 않는다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플라톤은 무신론자가 단 하나의 충분한 논증도 없이 신들의 존재를 부정한다고 덧붙인다(10887e). 그는 이 점을 설명하지 않는다. 만약 플라톤의 이 가정을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어머니, 도시, 전통의 합의가 사람들이 무엇을 믿도록 설득되었어야 하는지에, 독립적으로 (어쩌면 독립적인 논증을 통해서) 도달한 결론에 집착하는 것보다 더 일관적이라는 점을 의미한다. 이는 플라톤이 사람과 우주, 신들에 대해 부모에게 듣고 공식적인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그리고 부모와 도시, 도시의 지도자들이 믿는 것을 넘어서지 않는 사람을 칭찬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전문에 있는 설득은 잘 양육된 사람들에게 (그렇게 자주) 필요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 점은 플라톤이 합리적 설득에 부여하는 가치를 경감한다.

보보니치는 플라톤의 편에서, 마그네시아의 시민들은 다양한 의견에 노출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법률>편 그 자체가 학교 교과서로 사용될 것이고, <법률>편 내에서 플라톤은 그가 거부하는 의견들과 논증들을 자주 논의한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과 달리, 전문을 읽는 시민들은 무신론자들을 혐오하거나 최소한 그러는 것이 이해할만 하다고 듣게 될 것이다. 907c-d에서 플라톤은 설득이 잘 되면 무신론자들이 스스로를 혐오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데, 이것도 시민들에게 읽힐 것이다. 이것은 독립적 사고를 장려하는, 다양한 의견의 제시가 아니며, 합리적 설득과는 거의 양립 불가능하다.

[내 생각: 플라톤은 무신론자에게 분노하거나 혐오해야 한다는 점이 아니라, 그럼에도 설득을 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II. The River-Fording Analogy (892d-893a)

보보니치는 전문의 논증의 단순화된 경우가 자주 있다고 말한다. 중요한 용어들이 명확하게 정의되지 않은 경우가 많으며, 가능한 반론들이 완전히 고려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그래도 다른 한편 매우 정교한 몇몇 논증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 예로는 불경에 대한 법의 전문의 일부인 기본적 신학적 원리들에 대한 길고 복잡한 논증이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이 점에 동의하지만, 이러한 예가 플라톤이 합리적 설득을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근거로 볼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10권에서 어려운 문제를 다루기 전에 아테네인은 클레이니아스와 메길로스에게 논의를 자신에게 의존할 것을 제안한다. 그는 왜 그것이 좋은지 강 건너기 비유를 통해 이야기한다. (강 건너기 비유, 10892d-893a) 강 건너기 비유와 유신론 옹호 논증을 다음과 같이 비교할 수 있다.

 

강 건너기

1. 가장 자격이 있는 사람이 홀로 시도해보고 강이 어떤지 시험해봐야 한다.

2. 그렇게 주의를 기울이는 이유는, 일차적으로 노인들의 안전을 위해서지만, 그들이 당황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3. 함축은 강이 가장 자격 있는 사람에게 건널 만 하다는 것이다. 의문은 다른 둘에게도 건널만 한지이다. 노인이 스스로 건너는 것은 선택지가 아니다.

 

유신론 옹호 논증

1. 가장 자격이 있는 사람이(가장 현명하고, 철학에 익숙한 사람)이 유신론 옹호를 먼저 홀로 시도해보아야 한다. (대화가 플라톤에게 중요한 철학적 활동이기 때문에, 아테네인은 자기 자신과 대화를 한다.)

2. 그렇게 주의를 기울이는 이유는 첫째로 유신론 옹호의 가장 큰 가능한 성공 때문이지만, 다른 사람들이 당황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3. 함축은 아테네인이 유신론 옹호 논증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의문은 다른 두 사람이 그 논증을 따라갈 수 있는지이다. 그런데 플라톤은 그들의 능력에 비추어 볼 때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그 둘이 아테네인의 도움 없이는 논증을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인지, 아예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마지막 포인트를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든, 아테네인이 모든 어려운 부분을 지적으로 홀로 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어지는 구절에서 플라톤은 클레이니아스가 어렵사리 논증을 이해한 것을 보여주는 것 같지만, 이 이해는 단순한 동의의 형태를 띨 뿐이다. 클레이니아스와 메길로스의 진정한 기여는 없다.

무신론 반박의 목바지에서 아테네인은 "클레이니아스, 당신은 아주 훌륭하게 내 말을 경청했군요"라고 말한다. 이는 <법률>10권을 통틀어 클레이니아스의 지적 참여의 수동적인 본성뿐만 아니라, 그런 수동성을 아테네인이(그리고 플라톤이) 높이 사고 있음을 보여준다.

[내 생각: 수동적으로 듣기만 한 점을 칭찬했다는 해석은 너무 과도해 보인다. 논의의 난이도에 대한 언급으로 보는 것이 맞는 것 같다.]

앞에서 보았듯, 대부분의 시민들은 신들에 대한 신화를 자라면서 잘 믿었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해 설득이 필요하지 않다. 결과적으로 전문은 합창단에게 설교되고, 합창단 단원들은 메길로스나 클레이니아스처럼 침묵하거나 간단한 동의만 표할 것이다. 게다가, 클레이니아스와 메길로스는 자유롭게 설득되었는데 반해, 마그네시아 시민들은 적절하고 도시에 의해 규정된 결론에 이르지 않으면 처벌의 위협을 받을 것이다.

[내 의견: 법을 어겼을 때 처벌해야 한다고는 하지만, 전문의 내용에 이의를 제기했을 때 처벌해야 한다는 말은 <법률>편 내에는 없던 것 같다.]

 

III. Mythic Incantations (903a-905c)

이신론에 대한 반박. 이 논증은 복잡하거나 철학적으로 부담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여전히 아테네인은 여기서도 다른 두 사람을 돕고자 한다. 플라톤에 따르면 이신론자는 신들이 인간을 보살피지 않는다고 결론내리는데, 왜냐하면 이신론자들은 악인이 행복을 얻는 것을 본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신론에 따르면, 만약 신이 인간사를 관리한다면, 이런 일은 없어야 한다.

따라서 이신론에 대한 플라톤의 반박 논증은 두 가지 서로 관련된 명제를 보이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1) 신들이 인간사를 관리한다, 따라서 (2)누구도 악하면서 행복할 수 없다. 플라톤은 신들이 무지하거나 악할 때만 인간을 보살피지 않을 것인데, 신들에게 이것은 불가능하므로, 신들은 인간을 무시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10899d-903a).

그런데 조금 뒤에 플라톤은 이신론자를 설득하기 위해 논증을 하겠다고 해놓고, 우주를 지배하는 신들에 대한, 그리고 그들이 어떻게 영혼을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옮기는지에 대한 복잡한 신화(혹은 신화들의 집합)를 이야기한다.

플라톤은 첫 번째 논증이 충분하지 않으며 따라서 몇 가지 신화적 주문이 필요하다고 말한다(10903b). 보보니치는 이에 대해 같은 결론을 내기 위해 아테네인이 또다른 논증을 제시한 것이라고 말한다(명백하게 '논증'이라는 단어를 합리적 설득과 일관적인 설명이라는 의미로 사용한다). 그러나 저자는 E. R. Dodds가 신화적 주문은, 플라톤의 관점에서 합리적 ends에 기여하도록 만들어졌음에도, 합리적이지 않다고 말한 점에 동의한다(E. R. Dodds, 1957, The Greeks and the Irrational, p. 212; Morrow, 1993, Plato's Cretan City p. 485도 참고.).

만약 플라톤이 앞 논증들이 설득력 있다고 생각했다면, 왜 철학적 논증만큼 강력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는 신화가 필요했을까? 플라톤이라면 진지한 철학적 담론을 이해하거나 거기에 반응할 수 없는 사람들(특히 젊은이들)을 위해 필요하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도시의 어떤 사람들(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합리적이지 않은 방법을 통해 설득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성에 호소하는 논증에 의존하지 않는. 그렇다면 '거짓 프로파간다'가 아니더라도, '감정적으로 효과적인 레토릭'을 이용하는 것이다.

신화적 주문의 예로는 903b-905a가 있다.

이 신화들은 두 가지 중요한 주장을 포함한다. (1) 신체가 죽은 뒤에도 영혼은 살아남고, 죽음 뒤에 영혼에게 일어날 일은 살아있을 때 얼마나 덕이 있게 혹은 나쁘게 살았는지에 달려 있다. (2) 우주는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간과하지 않는 신들이 지배하고 있으며, 따라서 인간을 간과하지 않는다(심지어, 혹은 특히 죽음 뒤에도).

보보니치는 이 구절에 대해 논의하면서 다음과 같이 쓴다. "첫째, '신화적 주문'이 논증과 구분되며, 무신론자는 두 가지를 다 받을 것이라는 점을 유념하라. 그러나 플라톤이 제공하는 '신화적 주문'은 사실 하나의 논증이다: 그것은 합리적 고려에 기반을 두고 무신론자가 마음을 바꾸도록 호소하는 것이다."(Bobonich, "Persuasion, Compulsion, and Freedom", p. 385). 저자는 보보니치가 쓰는 '합리적 고려'라는 말이 지나치게 포괄적이며, 공포에 의거한 것까지 포함한다고 지적한다. 총을 겨누고 있는 강도에게 지갑을 넘기는 것은 합리적이지만, 그 강도가 피해자에게 '합리적 고려'를 준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지옥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신론에 대한 비판은 논증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 설득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은 맞지만, 합리적 설득은 아니다. 이야기의 끝부분에 나오는 것은 분명히 공포를 통한 설득이다. 10905a-b.

이런 "신화적 주문"<국가>편 마지막의 에르 신화와 같은 이유로 필요하다. 덕과 행복 사이의 관련성에 대한 철학적 논증을 제시하고(특히 <국가>4), 형상에 대한 형이상학을 통해 강화한 뒤에도(<국가> 5~7), 플라톤은 여전히 사후 사계에서의 보상과 처벌에 대한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보보니치는 플라톤이 신화와 감정에 호소한다는 점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단지 그렇게만 한다는 점은 부정한다. 플라톤은 논증에 추가적으로만 신화와 감정을 이용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설사 이 전제를 받아들인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플라톤이 그런 신화와 감정에 의존하는 것은 합리적 설득을 중시한다는 점을 깎아내린다고 생각한다.

 

IV. Punishment for Impious Beliefs (908a-909d)

플라톤은 처벌의 위협을 합리적 설득의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두 방법을 혼합할 것을 주장한다. 세 종류의 불경(무신론, 이신론, 전통적 유신론)이 있고, 각각의 불경한 사람에게 두 가지 버전(정직한 사람과 부정직한 사람)이 있다. 따라서 신적인 것과 관련해 여섯 종류의 범법자가 있으며, 이들에게는 처벌을 달리해야 한다(10908b-d).

정직한 무신론자는 덜 해로운데, 왜냐하면 그의 관점을 밝히고 있고, 그의 무신론에 의해 불의한 일을 저지르지는 않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정직한 무신론자가 (a) 기만적이지 않고 (b) 지성적이지 않기 때문에 그의 의견 공표에 의한 해는 크지 않다고 주장한다. 후자는 다음과 같은 함축이 있다: 조금 뒤에 플라톤은 정직한 유신론자가 어리석음(unreasonableness)으로 인해 불경하다고 말한다(10908e). 여기서, 부족한 인지적 능력(합리적 토론과 설득을 위한 역량의 부족)은 이점인 것으로 보인다.

부정직한 무신론자는 그가 사기를 저지를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더 해롭다. 플라톤은 어떤 사람을 말하고 있는가? (1) 다른 사람인 것처럼 가장하고, 그들이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이익을 얻으려는 종교적 사기꾼. (2) 어떤 종류의 종교적 사기를 통해 정치 권력을 획득한 사람들. 여기서 부정직한 무신론자가, 그의 지적인 능력 때문에 더 효과적임을 주목해야 한다. 플라톤은 그런 무신론자들은 좋은 기억력과 날카로운 정신을 가지고 있고 자연적으로 재능을 타고났다고 말한다. 이런 인지적 능력들은 그가 사기를 치기 쉽게 만들어준다. 그러나 그런 점이 그들이 합리적 설득에 더 열려 있게 만들지는 않는 것으로 보이는데, 쾌락과 고통과 관련된 자제력 부족 때문이다.

플라톤이 부정직한 무신론자에 소피스트들을 포함시킨 것은 중요하다. 왜 포함되었는가? 소피스트들은 많은 부분 돈 때문에 하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이 점이 그들을 (1)과 유사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그들의 '교묘한 책략'은 그들이 어떤 (심지어 모순적인) 결론을 내는 논증도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을 가리켰던 것으로 보인다. 이 점이 그들을 신에 대한 그들의 관점과 관련해 부정직하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들이 합리적 논증에 관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음에도 불구하고 검열당할 것이며 큰 처벌을 받을 것이라는 점이다. 저자는 이 점이 합리적 설득에 대한 플라톤의 태도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에 대해 함축이 있다고 본다(결론부에서 더 다룰 예정).

정직한 이단자들에 대한 처벌은 고려해 볼 만하다. 교화소에 보내고 야간 회의 위원들이 강력히 충고(admonishment)하고, 그것 불가능할 경우에 사형(10908e-909a). 이 처벌에서 놀라운 점은 충고하는 사람들이 야간위원회 위원들이라는 것이다. 야간위원회는 철학적 논증(특히 신의 존재와 본성에 대한)을 가장 잘 이해하는 도시 고위 관리들이다. Saunders는 다음과 같이 논평한다: 고위 관리가 약간 멍청한 사람들을 재사회화하기 위해 최소한 5년을 쓰게 한다(Saunders, Plato's Penal Code, 1991, p. 311). 여기서 '강력한 충고'로 번역한 말은 'nouthet^sis)인데, 글자 그대로는 이성(nous)를 사람에게 심는다는 뜻이다. , 신들과 관련해 적절하고 합리적인 상태로 만드는 일을 야간위원회 위원들이 한다. 세부사항들이 나와있지는 않지만, 저자는 그 사람들이 <법률>10권에 나와 있는, 신들의 존재와 본성에 대한 논증을 듣고 토론하게 할 것이라고 추정한다.

보보니치는 이 처벌에 대해 논의하지 않지만, 플라톤의 합리적 설득 개념에 동감하는 사람들은 이 구절이 보보니치의 주장을 뒷받침한다고 볼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것이 합리적 설득과 관련이 없다고 주장한다. 논증을 듣고 있는 수감자들은 그들이 정해진 결론에 도달하지 않으면 사형을 받게 되리라는 점을 알았을 것이다. 이는 플라톤이 합리적 설득과 처벌의 위협을 결합하려고 했지만, 저자가 보기에 그것이 불가능함을 보여준다.

[내 의견: 그럼 설득 안 되면 법 어겨도 처벌하지 말라는 것인가? 그건 아니니까 설득이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애초에 전문(설득)이 일반적으로 범법자를 대상으로 한 것인가? 시민 일반을 대상으로 한 것인가? 전문의 목적과 법 조항의 목적을 구분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게다가, 이런 맥락에서, 통치자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은 그 범법자가 합리적 논증 때문에 설득이 되었는지, 아니면 사형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랬는지 알 수 없으며, 따라서 그 사람이 실제로 교화되었는지 아무도 알 수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 그 사람이 진정으로 설득되었는지, 다만 처벌 때문에 입을 닫고 있는지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게다가, <법률>편의 독자로서, 우리는 합리적 설득에 대한 플라톤의 강조가 진실된 것인지, 아니면 단지 정직한 이단자들을 침묵하게 만드는 것이 그의 중심 고려 사항인지 알 수도 없다.

 

 

V. Conclusion

저자는 플라톤이 때때로 합리적 설득에 호의적으로 말한다는 점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법률>편 일반의 정치철학의 맥락에 그것들을 비추어볼 때, 플라톤은 단지 이 문제에 대해 혼동하거나 헷갈린 것이 아니라, 그가 진정한 의미의 합리적 설득이나 자유를 지지할 수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성과 법, 합리적 설득의 적절한 역할, 종교와 통치의 관계에 대해 플라톤과 매우 다른 관점을 보이는 사람(토마스 제퍼슨)과 플라톤을 대조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플라톤은 이성과 자유의 관계에 대해 플라톤이 하지 않았던 (혹은 했다가 부정했던) 방식으로 이해했다. 제퍼슨은 정부의 적절한 목적은 개인의 권리를 보호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말로, 사람들이 각자를 강제적으로가 아니라 합리적으로 대할 수 있는 조건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정부는 다른 사람을 힘으로 다루고자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만 강제를 이용해야 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추론을 잘 하지 못하더라도, 그가 다른 사람에게 강제를 하지 않는 한, 그는 틀릴 자유가 있다.

플라톤에게 합리적 설득은 통차자에 의해서만, 다른 사람들을 다루기 위해 배타적으로 채택된다. 시민 일반에게 합리적 설득(특히 추론된 철학적 논증)은 허용되지 않고 장려되지 않는다. 게다가 플라톤은 사람들이 의견을 가질 자유(그것이 옳든 그르든)을 가지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보보니치는, 마그네시아에서 검열되거나 배제되어야 하는 것은 거짓 의견, 원칙, 문예인데, 특히 시민들의 감정과 욕구에 강하게 호소할 가능성이 높은 거짓 믿음들을 표현하고 시민들의 합리적 숙고와 행위 능력을 해치는 것이라고 말한다. 보보니치는 합리적 탐구를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플라톤에게 동의하지 않더라도, 그것이 합리적 탐구의 가치에 대한 의견불일치는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저자는 보보니치의 주장에 반대한다. 시민들이 도시가 정하는 것만을 믿게 허용하는 것은 시민들의 마음의 능력을 제한하는 것, 즉 합리적으로 설득될 능력을 제한하는 것이다. 플라톤이 옹호하는 것은 진정한 종류의 자유가 아니다.

결론적으로 저자는 합리적 설득에 대해 플라톤이 겉보기로 높게 평가하는 것이 그의 후기 저작들에서 나타나는, 비철학자 시민들에 대한 존중과 거의 관련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보다 플라톤의 합리적 설득은 <국가>편의 철인왕을 법의 지배로 바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법률>5739b-e에서 <국가>편에서 나온 정치 체계가 모델(paradeigma)이라고 말한다.

신들 혹은 철인왕들이 사는 도시에는 법이 필요 없다. 반면 차선의 도시에는 필요하다. 플라톤은 참된 정치는 사적인 것이 아니라 공공인 것을 목표로 한다는 점을 알기가 어려우며, 만약 누군가 이 점을 안다고 해도, 그 지식을 실천에 옮겨 사적인 욕망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선에 초점을 맞추기가 어렵다고 말한다. 만약 이런 지식과 덕을 모두 가지고 있는 사람이 나타난다면, 플라톤은 그를 지배할 아무런 법도 필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어떤 법이나 지배도 지식보다 강하지 않고, 지성이 다른 것에 종속되는 것은 옳지 않으며 모든 것의 지배자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보보니치의 주장과 달리, 법이 지배와 합리적 설득을 동시에 사용하도록 하는 시도는, "개인의 자유""합리적 설득을 위한 역량"을 성공적으로 혼합하지 못했다. 오히려 합리적 설득과 강제의 결합이 내재적으로 모순적이라는 점만 강조됐다. 그리고 종교적 믿음에 대해 합리적 뒷받침을 찾기 어렵다는 점을 플라톤이 올바른 종류의 종교적 믿음을 시민들이 갖는 것을 강조한다는 것과 함께 고려하면, 이 모순이 <법률>10권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는 점은 놀랄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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