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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2월 20일 월요일

[요약] Baima, N. (2016), "Persuasion, Falsehood, and Motivating Reason in Plato's Laws"

Baima, N. (2016), "Persuasion, Falsehood, and Motivating Reason in Plato's Laws", History of Philosophy Quarterly.



  1. Introduction
플라톤의 <법률> 편에서, 설득은 전문(前文)을 통해 이루어진다. 전문은 시민들이 법에 더 잘 따르도록 한다. 현대 학자들은 플라톤의 전문이 참된 믿음을 시민들에게 주입하는 것이며, 시민들이 그 법을 따를 좋은 이유를 준다는 점에 동의한다. 그런데 이 논문에서 저자는 전문의 일차적인 목적이 바른 행위의 동기를 부여하는 것이며, self-governance가 없는 시민들에게는 이러한 목적이 유용한 거짓 믿음을 통해 달성된다고 주장한다. 즉, 많은 경우에 전문은 '고귀한 거짓'(noble lie, gennaion pseudos)로 기능한다.


  1. Persuasion, Truth, and Falsehood
<법률>편은 법과 정치 체제에 대한 대화를 중심으로 한다. 작중 아테네인은 법률이 전체로서의 덕을 [시민들이] 함양하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주장한다. 즉, 법은 용기뿐만 아니라 [시민들이] 정의, 절제, 지혜를 함양하게 해야 한다. 작중 아테네인은 이것은 법이 설득과 강제 모두로 이루어지게 함으로써 달성된다고 이야기한다. 아테네인은 노예 의사와 자유인 의사를 비교함으로써 이 점을 설명한다. 노예 의사는 환자에게 강제하기만 하지만, 자유민 의사는 설득과 강제를 모두 사용하는 이중적인 방법론을 취한다. 이중적인 방법이 더 온화하기 때문에 더 우월하다(4권 729e). 아테네인은 입법가도 자유인 의사처럼 이중 방법론을 사용해야 한다고 말한다(<정치가>편 293a-c와 비교하라). 시민들이 따르도록 강제를 해야 할 때는 오직 설득이 실패했을 때 뿐이다.
입법가는 법 앞에 전문을 붙임으로써 설득을 할 수 있다. 음악의 서곡이 관중들을 본 음악을 더 잘 받아들이도록 하듯이, 법의 전문은 시민들을 더 협조적으로 만들고 더 배울 준비가 되어 있게 만든다. 그럼으로써 법을 자유롭게 받아들이려고 하게 만든다(4권 723a).
의사 비유에서 네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첫째, 자유인 의사는 처방을 하기 전에 환자의 상태를 완전히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이는 환자와 의사소통하고 그 병의 성질을 이해하고자 하는 일을 포함한다. 마찬가지로 입법가는 시민들 및 덕의 본성을 이해해야 한다, 덕을 함양하고 유지할 명령을 내리기 전에.
둘째, 자유인 의사는 한 환자에서 다른 환자로 성급하게 이동하지 않고, 환자 곁에서 그 환자를 가장 잘 다룰 수 있을 때까지 머문다. 마찬가지로 입법가는 법률을 제정할 때 서두르면 안 되며, 시간을 들여 신중하게 법의 세부사항들을 고려해야 한다.
셋째, 노예 의사는 강제만 사용하는 반면 자유인 의사는 설득과 강제를 모두 사용한다. 마찬가지로 입법가도 강제와 설득을 모두 사용해야지, 한 가지만 사용해서는 안 된다.
넷째, 자유인 의사의 방법은 설득과 강제를 모두 포함하기 때문에 더 길다. 여기서 포인트는 입법에 있어 중요한 것은 법의 길이가 아니라, 법이 도시에 덕과 안녕(well-being)을 효과적으로 산출하는지이다.
전문이 정확히 어떻게 설득을 하는지에 대해 학자들 사이에 의견 불일치가 있지만, 전문이 참된 믿음을 불어넣고 법을 따를 좋은 정당화를 준다는 점에는 동의한다. 즉, 이 학자들은 전문이 '고귀한 거짓'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보보니치(Christopher Bobonich)는 전문은 합리적 설득의 예로서 설계된 것으로, 합리적 고려에 의거함으로써 시민들의 믿음에 영향을 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전문은 유용한 거짓 믿음을 심어주거나 합리적이지 않은 방식을 통해 설득을 하려고 의도된 것이 아니다.
스탤리(R. F. Stalley)와 모로우(Glen Morrow)는 전문이 감정, 두려움, 고통, 쾌락에 의거해 설득을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보보니치, 스탤리, 모로우 모두 전문이 참인 믿음을 만들지, 유용한 거짓을 만들지는 않는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모로우(1953, 243 그리고 1960, 556)는 플라톤의 나라에서 채택된 설득은 의심의 여지 없이 가르침(instructing, 즉 참인 믿음을 심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고 말한다. (Stalley 1983, 42-43; 1994, 167도 참고). 최근, 윌리엄스(David Lay Williams)는 <법률> 편의 고귀한 거짓이 없다고 주장했는데, 왜냐하면 그런 종류의 거짓은 플라톤의 주의 깊게 숙고된 가정들과 단지 비일관적이기 때문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2013, 385).
다음 절에서 저자는 마그네시아에서 유용한 거짓 믿음이 하는 교육적 역할을 과소평가했다고 주장한다. 전문의 근본적인 목적은 시민들이 법을 자진해서(willingly) 따르게 하는 것인데, 많은 시민들에게 그것은 오직 유용한 거짓을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


  1. On the Weakness of Moral Motivation
2권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이 제기된다. 가장 정의로운 삶이 항상 즐거운 삶인가(661d-662d)?  아테네인은 정의와 즐거움이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어, 가장 정의로운 삶이 항상 가장 즐거운 삶이라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아테네인은 심지어 이 점이 거짓이라고 해도, 시민들이 이렇게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2권 663d-e, <국가>편 378a도 참고)
아테네인은 이게 참이라고 생각하지만(2권 664b-c), 참이 아니더라도 시민들이 정의롭게 행동하도록 하기 위해 거짓말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부분은 두 가지를 말해준다. 첫째, 아테네인은 참이 해로울 가능성이 있을 때, 그리고 정의로운 행위에 동기부여하기에 부족할 때, 거짓말을 하는 일을 용인할 것이다. 둘째, 아테네인은 도덕성(morality)가 대부분의 신들에게 동기 부여를 하기에 약하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정의와 즐거움이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참이고 시민들에게 그 점을 가르친다면, 시민들은 정의가 아닌 즐거움을 선택할 것이다. 이는 아테네인이 즐거움을 행위의 더 강한 동기로 생각한다는 점을 보여준다(1권 664a, 2권 653a-c, 2권 658a, 5권 732e).
이런 해석을 뒷받침하는 부분이 두 가지 더 있다. 9권에서 아테네인은 정치적 성공에 세 가지 방해물이 있다고 말한다. 첫째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치의 목표는 공공선에 가장 좋은 것을 하는 것이지, 자신들의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님을 지성적으로 이해하는 데 실패한다는 것이다(9권 875a-b). 둘째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들의 사적 이익을 얻는 최선의 방식은 나라의 선을 촉진하는 것이라는 점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같은 곳). 즉, 타인의 선을 위해 행위할, self-regarding 이유가 있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한다. 셋째는 사람들이 정치의 목표를 지성적으로 파악한다고 하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목표에 맞춰 행위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이기적인 본성이 도시가 아니라 그들의 즐거움을 추구하게 하기 때문이다(9권 875b-c)
비슷한 우려를 5권에서 찾을 수 있다. 아테네인은 여기서 모든 실패의 원인은 과도한 자기애라고 주장한다(5권 731e). 그에 따르면 사랑은 맹목적이다. 사람들이 사랑에 빠지면, 그들의 사랑의 대상을 실제 모습대로 보지 못한다. 따라서 사람들은 자기기만의 악순환에 빠져서 무엇이 정말로 정의롭고 이익이 되는지 못 보게 한다(5권 732a).

이 예시들은 두 가지 일반적 주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1)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이 self-regarding하다고 여기는 이유를 위해 행위하는 데 일차적으로 동기부여된다.
(2)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선을 위해 행위할 self-regarding 이유가 자주 있다는 점을 인지하지 못한다.

이런 이유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이 other-regarding한 것으로 생각하는 이유에 의해 동기부여가 되지 않는다. 따라서 사람들이 옳게 행동하도록 설득하기 위해서 입법가는 사람들의 이기적인 본성을 정의를 향해 돌리도록 방향을 잡아야 한다. 법에 첨부된 전문은 법을 따르는 것이 self-interest에 관련되어 있다고 함으로써 시민들을 그렇게 만들 수 있다.
따라서 아테네인이 거짓말이라도 하려는 이유는 정의 하나로는 대부분의 시민들에게 약한 인센티브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9권 913b에서 도둑질이 영혼을 오염시킨다고 주장하고 나서, 시민들이 도둑질을 하면 미래 세대에 문제가 된다는 신화를 믿어야 한다고 말한다(9권 913c).[논문에는 도둑질하면 불임이 된다고 쓰여있는데, 한국어 번역본에는 미래 세대에 해가 된다고 쓰여 있음.] 이런 신화를 덧붙이는 이유는, 첫째로 불의한 행위가 그들의 영혼에 해가 된다는 점을 믿지 앓으려 하기 때문이고, 둘째로 그 점을 믿더라도 물욕이 너무 강하기 때문이다.

  1. Theology for the Unsophisticated
아테네인이 시민들에게 거짓이라도 말해야 한다고 하는 다른 이유가 또 있다. 몇몇 주제들은 특정인들의 이해 범위를 넘어서며, 그런 주제의 참된 이야기를 그런 사람들에게 설명하려고 하는 것은 위험할 수도 있다. 이 점은 아테네인이 도시의 신학을 다룰 때 가장 분명하다. 저자는 <법률>편에 종교에 대한 두 가지 서로 다른 설명이 있다고 주장한다. 하나는 철학적이지 않은 시민들에게 이야기하는 전통 종교적인 신화들이다. 이 신화들은 덕 있는 행동을 장려한다. 다른 한편, 추상적인 신학적 문제들이 있다. 오직 철학자들에 의해서만 논의되는(Dodds 1951, the greeks and the irrational, 220 참고).
전통적 혹은 신화적 종교적 관점들은 전문에 많이 있다. 다음과 같은 사례들이 있다.
11권 913c, 11권 914b, 9권 865d-e, 9권 870d-e, 9권 872d-873a, 11권 931b-932a
이런 이야기들에서, 범법을 저지른 사람들은 일종의 신적인 처벌을 받는다. 이 이야기들은 세 가지 역할을 한다. 첫째, 사람들이 정의의 잊을 수 없는 복수를 두려워하게 만듦으로써 심각한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한다. 둘째, 가해자가 고통을 겪는다는 점을 이야기해줌으로써 피해자를 달랜다(Saunders 1991, 196 참고). 셋째, 신들과 신성한 존재들이 조화롭게 체계적인 방식으로 행위하며, 정의롭고, 인간사에 관여함을 보이는 목적론적 신학을 전달한다. 따라서 이 종교적 신화들은 고귀한 거짓(<국가>편 3권 414b-415c)으로 기능한다.
그러나 플라톤이 이 이야기들의 세부사항들이 실제로 참이라고 믿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법률>편에 그러한 증거는 없지만, 이렇게 생각할 두 가지 일반적인 이유가 있다. 첫째, 이 신화들은 플라톤의 다른 저작에서 작중 소크라테스가 완전히 참이 아니라고 말하는 전통적 신화들을 떠올리게 한다. (<에우튀프론>편 6a-b, <국가>편 2권 377a - "전체적으로는 거짓이지만 참인 것을 포함하고 있다", <티마이오스>편 22c-d - 헬리오스의 아들 파에톤. 천체에 대한 진실을 담고 있는데, 실제 천문 현상의 의인화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허구적 측면을 참으로 받아들이고, 그 너머에 있는 실제 천문학적 교훈을 이해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플라톤은 아마 <법률>편의 종교적 신화들의 어떤 측면들은 참이라고 받아들였을 것이다. 예를 들어 신들이 목적론적이고 정의로워서, 시민들이 법률을 따라야 한다는 것. (10권 885b, 10권 902e도 참고) 그럼에도, 플라톤이 <법률>편의 판타지적인 측면들을 사실이라고 받아들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예를 들어 비자발적인 살인에 당한 사람의 유령이 가해자 앞에 출몰한다는 이야기.
둘째아테네인이 <법률>편에서도 같은 식으로 생각했다는 증거가 있다. 10권은 목적론적 관점을 옹호하고, 도시의 종교를 따르지 않을 때의 위험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아테네인은 무신론자, deists, 잘못된 유신론자들이 도시에 커다란 위협이라고 생각한다. "법이 정하는 대로 신들의 존재를 믿는 자는 그 누구도 자발적으로 불경한 행동을 저지르거나 무법의 말을 내뱉은 적이 없습니다."(10권 885b; 10권 907d-e, 11권 921c, 12권 948b-c도 참고). 이런 종교적 일탈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아테네인은 이들이 어려서부터 들은 이야기들을 믿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불평한다(10권 887d). 게다가 아테네인은 시민들이 이것들을 단지 신화가 아니라 절대적 참이라고 믿기를 원한다(10권 887d-e).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논증을 구성할 수 있다.
(1) 플라톤은 아이들에게 이야기되는 신화들이 전체적으로는 거짓이지만 어떤 알레고리적인 참을 전달한다고 믿는다.
(2) 마그네시아의 시민들은 어린 시절에 신들에 대한 신화들을 들을 것인데, 그것들은 진실된 것이라고 믿어질 것이다.
(3) 따라서, 마그네시아의 시민들은 신들에 대한 거짓들을 들을 것인데, 그것들은 진실된 것이라고 믿어질 것이다.

손더스(T. J. Saunders)와 보보니치는 이 구절들의 중요성을 평가절하한다. 손더스에 따르면 그런 것들은 교육과 설득이 효과적이지 않다고 드러났을 때만 사용된다(1991, 210-11). 보보니치도 같은 이야기를 한다(2002, 113-14; 1991, 381). 그러나 손더스와 보보니치는 이런 전문들에 대해 잘못 생각하고 있다. 이것들은 범죄를 저지를 것 같은 사람들에게만 이야기되는 것이 아니라, 교육 시스템의 일부로 들어가 있어 모든 시민들이 교육을 받는다(10권 877d-e??).
왜 플라톤은 시민들에게 거짓 신학적 이야기를 가르쳐야 한다고 보았는가? 대답은 그 주제에 대한 진리는 복잡하고 추상적이어서 평범한 시민이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추상적인 진리는 동기 부여가 못 되고 심지어 잘못 행동하게 할 수도 있다(Dodds 1951, 223-24 참고).
천문학 및 수학 교육에 대한 아테네인의 논의를 고려해보자(12권). 이런 지식들은 우주를 지배하는 "신적인" 혹은 "자연적인" 필연성에 대한 지식이다(12권 818c-d). 주제가 어렵기 때문에, 오직 선택된 소수만이 이 주제를 깊이 공부할 수 있다(12권 818a). 사람들이 이 주제에 친숙하지 않다는 점, 그리고 더 심하게는 이런 신적인 주제를 잘못 배운다는 점이 아테네인을 놀라게 한다.
아테네인의 걱정은 10권에서 더 명시적으로 드러나는데, 여기서 그는 가상의 젊은 무신론자에게 신들이 존재한다는 점을 납득시키려고 시도한다. 클레이니아스는 왜 단순히 (a) 지구, 태양, 별들, 우주가 질서를 가지고 있고 (b) 모든 그리스인들과 야만인들이 신들의 존재를 믿는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은지 의아해한다(10권 886a-b). 아테네인은 이에 대해, 행상들이 영혼과 이성을 결여하고 있는 돌덩이이며, 따라서 인간사에 관여할 수 없다는 당시 천문학자들에 의해 야기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한다(10권 886c-d). 아테네인은 무신론을 천문학에 대한 수준 낮은 이해 탓으로 돌린다(12권 966e-d). 그는 만약 그런 사람들이 천문학과, 영혼의 본성에 대해 더 잘 이해한다면, 그들은 행성을 이성 없이 무질서하게 움직이는 영혼 없는 존재로 보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Mayhew 2010, 213-14 (코멘터리 달린 10권 번역).
따라서 세 가지 입장을 구분할 수 있다. 무지한 사람(메길로스와 클레이니아스), 아마추어 천문학자(무신론자), 진정한 천문학자(아테네인). 무지한 사람과 진정한 천문학자는 모두 신을 믿지만, 아마추어 천문학자는 그렇지 않다. 무신론이 사회에 위협인 만큼, 진정한 우려는 무지가 아니라 부적절한 교육을 받는 것이다.
플라톤은 사람들의 철학적 능력에 비례해서 신학적 교육을 한다고 믿었다. 이 점은 12권에서 뒷받침되낟. 아테네인은 적절한 통치자가 되기 위해서는 영혼이 모든 것 중 가장 먼저인 것이고, 별들이 지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12권 967e). 그리고 그에 앞서서 그 사람은 필수적인 교과들을 배워야 한다(수학과 천문학). 그리고 그 사람은 사물들에 공통된 것이 무엇인지와 뮤즈와 관련된 것들을 배워야 하며, 이 이해를 습관적인 성향이 된 실천과 관습에 적용해야 한다고 말한다(12권 967e).
이 점은 세 가지를 시사한다. 첫째, 뮤즈와 관련된 것들의 집합과, 신적 학문을 통해 발견된 신학적 진리들의 집합이 구분된다(6권 783a 참고). 둘째, 몇몇 경우에 두 가지 집합이 겹친다. 셋째, 통치자는 그의 이해를 두 집합 사이에 공통된 것들에 적용해야 하는데, 시민들에게 건전한 성향을 만들도록 해야 한다. 이 점은 어떤 시민들은 신학적 진리의 일부만을 배울 수 있고, 이 시민들이 무엇을 배우는지는 무엇이 건전한 성향을 만드는 것을 돕는지에 달려 있다는 저자의 주장을 지지한다.

한편, 더 수준 높은 진리들을 가르치는 것은 위험할 수 있는데, 이에 대한 근거는 10권에 나온다. 아테네인이 영혼에 대한 정교한 철학적 논의를 하기 전에, 그는 메길로스와 클레이니아스에게 경고한다.
강 건너기 비유 (10권 892d-893a; Mayhew 2008, 104-5; 2010, 214-5).
이 비유를 보면, 아테네인의 우려는 단지 메길로스와 클레이니아스가 영혼에 대한 논의를 이해하지 못하리라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이해하기를 시도할 때 혼란에 빠져 익사하는 것을 걱정하고 있다. 그래서 아테네인은 철학적 논의에 능숙한 그가 다른 두 사람을 도와야 한다고 말한다. 즉, 철학적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그런 복잡한 주제를 혼자서 탐구해서는 안 되며, 안내자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저자의 주장에 반하는 것으로 보이는 점이 10권에 한 가지 있다. (10권 885c-e; 10권 888a-891a도 참고). 여기서부터 10권의 나머지 부분에서 아테네인은 무신론자를 상대로 논증을 펼친다. 얼핏 보기에, 아테네인이 무신론자들을 논증을 통해 설득하려는 것은 저자의 해석에 반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 부분은 <법률>편에서 변칙적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있다. 대부분의 전문들은 합리적 논증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Laks 2000, 289 참고). 이는 왜 아테네인이 무신론자를 설득하려고 합리적 논증을 하는지 의문스럽게 만든다. 이에 대한 답은, 10권에서 합리적 설득이 필요하게 하는 두 가지 두드러진 특징이 있다는 것이다. 첫째, 무신론자가 신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설득되었기 때문에, 신적 처벌이나 보상에 의존하는 전문들에 설득되지 않을 것이다. 둘째, 무신론자들이 신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게 된 이유는 부분적으로는 유신론에 반하는 우주론적 논증들에 노출되었기 때문이다(10권 886c-e; 7권 818c-819a 및 7권 966e-967d도 참고). 따라서 그는 무신론자들의 우주론적 관점이 잘못되었다는 점을 먼저 보일 필요가 있다.
아테네인은 무신론자가 어렸을 때 들었던 신화들을 무반성적으로 믿었으면 훨씬 나았을 것이라고 말한다(10권 887d). 따라서 10권의 합리적 설득은 <법률>편의 일반적인 특징이 아니다.

  1. Conclusion
마그네시아 법의 전문은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바른 행동에 동기를 부여하기 위한 것이며(9권 662d 참고), 합리적 self-governance를 결여한 시민에게 이는 거짓을 통한 가르침도 포함한다.
5권 730c는 이에 반하는 주장을 담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첫째로, 이 구절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 절대 허용 불가능하거나 이익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가능한 한 진실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이는 어떤 상황에서는 거짓말을 하는 일이 허용될 수 있다는 점과 양립 가능하다. 둘째로, 이 구절의 일차적인 포인트는 시민들이 거짓말을 하는 일을 싫어하도록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점은 입법가가 거짓말하는 일을 싫어하면서도 필요할 때는 할 수도 있다는 점과 양립 가능하다. 셋째, 여기서 아테네인이 진리를 매우 가치 있게 여기는 점은 분명하지만, 이는 거짓이 특정 상황에서 유용하다고 생각하는 점과도 양립 가능하다.
거짓이 바른 행위에 동기부여를 할 수 있다고 볼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보통 시민들에게, 대부분의 정의로운 행위는 other-regarding 이유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는 문제적이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이 self-regarding 이유라고 받아들이는 것에 의해 동기부여되기 때문이다. 둘째, 몇몇 진리는 보통 시민이 이해하기에는 너무 복잡하고 추상적이며, 그들에게 이런 복잡한 것들을 가르치려고 하는 것은 위험하다. 이 두 가지 점은 서로 관련되어 있다. 만약 시민들이 선, 이성, 정의에 대한 추상적 진리들을 알 수 있다면, 그들은 바르게 행동하기 위해 그들이 self-regarding 이유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배울 필요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이런 개념들을 예화하는 데 이미 동기부여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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