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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월 21일 목요일

[요약] Ayer, A. J. (1936), Language, Truth and Logic 4장: The A Priori (+ 2판 서문 일부)

 에이어의 철학적 견해는 경험론의 한 형태이므로, 경험론 일반에 대한 비판에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

- 경험론 일반에 대한 비판: 경험론으로는 필연적 진리에 대해 우리가 가진 지식을 설명할 수 없다. 흄에 따르면 어떤 일반 명제도 논리적으로 확실하지 않은 개연적 가설에 불과하다. 이 점은 일반 명제뿐만 아니라 모든 명제에 해당한다.

- 그렇다고 경험론이 반드시 회의주의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논리적으로 확실하지 않은 명제를 믿는 것이 반드시 불합리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개연성이 최선인 곳에서 확실성을 요구하면 안 된다.

과학적 지식이 오류 가능하다는 점은 경험론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 과학적 지식이 오류 가능성이 있다는 점은 널리 인정되기 때문이다.

경험론에 문제가 되는 것은 수학과 논리학의 진리이다. 수학과 논리학의 진리는 모든 사람에게 필연적이고 확실해 보이기 때문이다.

경험론자는 수학과 논리학의 진리가 왜 필연적이고 확실해 보이는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입장 중 선택해야 한다.

- 수학과 논리학의 진리는 필연적 진리가 아니다. - 그렇다면 왜 그 진리들이 필연적으로 보이는지 설명해야 한다.

- 수학과 논리학의 진리는 사실적 내용을 갖지 않는다. - 그렇다면 왜 사실적 내용을 갖지 않는 명제가 참이며 유용할 수 있는지 설명해야 한다.

 

: 수학과 논리학의 진리가 필연적이 아니다

- 밀은 수학과 논리학의 진리는 극도로 많은 사례에 의해 귀납적으로 일반화되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 에이어의 비판: 밀은 우리 수학과 논리학 지식이 <경험에서 시작되었다>[= 수학과 논리학을 우리가 경험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는 점과, <경험에서 생겨난다>[= 수학과 논리학이 경험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점을 혼동하고 있다.

- 귀납적 절차를 통해 수학적 진리나 논리적 진리를 알게 될 수는 있다. 하지만 수학적 논리적 명제의 타당성은 경험적 검증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 명제들은 경험에서 독립적이다.

 

수학과 논리학의 명제가 필연적 참임이 반박되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를 검토해보면, 오히려 그것들이 필연적 참이라는 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 다섯 쌍의 물건이 있는데, 세어 보니 개수는 아홉 개였다. 이 경우 2 X 5=10이라는 명제가 반박되는가? 아니다. 잘못 셌거나, 세는 동안 하나가 없어졌을 것이다.

- 유클리드적 삼각형처럼 보이는 것의 내각을 측정해 보니 180도가 아니었다. 이 경우 삼각형의 내각의 합이 180도라는 명제가 반박되는가? 아니다. 측정을 잘못했거나, 엄격하게는 유클리드적 삼각형이 아니었을 것이다.

- 어떤 예를 들든지, 논리적 원리와 수학적 원리가 반박되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들은 수학적 논리적 원리를 손상시키지 않고 설명할 수 있다.

 

수학과 논리학의 명제들은 분석 명제이고 동어반복이다.

수학과 논리학의 명제들은 우리가 자기모순을 범하지 않고는, 언어 사용을 지배하는 규칙들을 위반하지 않고는 포기할 수 없다.

 

분석 명제 vs. 종합 명제

분석 명제: 명제의 타당성이 전적으로 그 명제가 포함하는 기호의 정의에 의존한다.

종합 명제: 명제의 타당성이 경험적 사실에 의해 결정된다.

 

분석 명제의 특성

- 분석 명제는 사실에 대한 어떤 정보도 제공하지 않는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어떤 경험도 분석 명제를 반증할 수 없다.

- 분석 명제에 사실적 내용이 없다고 해서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니다.

- 분석 명제는 우리가 기호들을 사용하는 방법을 설명해 준다.

- 분석 명제를 통해 숨겨진 주장을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e. g. 명확하게 드러난 명제 메이퀸은 나무 숭배의 잔재이다”, “메이퀸이 영국에 여전히 존재한다가 있을 때, ‘pq를 함축하고 p가 참이면 q가 참이다라는 분석 명제를 사용하여, 감춰진 명제 나무 숭배의 잔재가 영국에 여전히 존재한다가 드러난다.

- 분석 명제는 새로운 지식을 주지는 못하지만, 분석 명제를 정식화하면 종합 명제들로 이루어진 정보 체계에 그와 양립할 수 없는 명제를 포함시키지 않도록 해준다.

 

 

 

 

형식논리학

- 특정 형식논리학 체계는 많은 가능한 논리학 중 하나일 뿐이다. 각각의 가능한 논리체계는 흥미로운 동어반복으로 구성된다.

분석 명제의 타당성은 다른 분석 명제에서 연역될 수 있다는 점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그 분석 명제 자체에 포함된 기호들의 정의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기하학의 명제들

- 겉보기에 기하학은 선험적이면서 종합 명제인 것 같다. 기하학은 물리적 공간의 성질에 대한 연구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발전은, 기하학이 물리적 공간에 대한 학문이라는 견해가 잘못임을 보여주었다.

기하학의 공리는 단순한 정의이고, 기하학의 정리는 그 정의들의 논리적 귀결일 뿐이다.

- 따라서 다양한 기하학들은 모순적이지 않는 한 모두 참이다.

- 우리가 기하학을 물리적 공간에 대해 추론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것은 기하학에 물리적 해석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 가능한 반론: 기하학 연구에서 다이어그램이 이용된다. 이 점은 기하학적 추론이 순수하게 추상적이며 논리적이 아니라 도형의 속성에 대한 우리의 직관에 의존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 저자: 다이어그램의 이용은 완전히 엄격한 기하학에서 본질적인 것이 아니며, 우리 지능의 한계 때문에 도입하는 보조장치일 뿐이다. 오히려 기하학자들은 자신이 예로 삼은 구체적인 도형에 대해 우연적으로 참인 가정을 필연적 참으로 착각하는 실수를 범할 수 있다.

 

 

앞서 말했듯, 분석명제가 필연적이며 경험으로 반박될 수 없는 이유는 그것들이 경험 세계에 대해 아무런 주장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지 특정 방식으로 우리가 단어를 사용하는 방식을 나타낼 뿐이다. 이런 규약을 침해하지 않고, 즉 자기모순에 빠지지 않고 그것들을 부인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그 명제들은 필연적이다. 따라서 논리학과 수학의 필연적 확실성에 신비스러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의문: 수학과 논리학의 명제들이 단지 동어반복이라면, 왜 이 분야에서 새로운 발명 혹은 발견이 놀랍게 여겨지는가?

- 우리 이성의 한계 때문이다. 우리는 복잡한 분석 명제를 즉각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e. g. 91 X 79 = 7189

- 분석명제가 복잡할수록 우리의 흥미를 끄는 놀라운 발견이 된다.

- 지능이 무한히 강력한 존재는 수학과 논리학을 보자마자 모든 함축 관계를 이해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놀랍지 않을 것이다.

- 잘 선택된 정의는 그것이 아니었더라면 놓쳐버렸을 분석적 진리에 주의를 기울이게 해준다. 그런 점에서 유용하고 효과적인 정의를 만드는 일은 창조적 활동이다.

 

 

 

 

 

2판 서문에서 선험성 관련 내용

선험명제의 확실성은 그 명제가 동어반복이라는 사실에 의존한다.

- 어떤 명제가 분석적이라면 동어반복이다.

- 어떤 명제가 그 명제를 구성하는 기호의 의미에 의해서만 참일 경우에, 따라서 어떤 경험적 사실에 의해서도 입증되거나 논박될 수 없는 경우에 분석적이다.

 

반론: 에이어는 선험 명제란 기호들이 사용되는 방식을 기술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선험명제를 경험 명제의 부분으로 만들어 버린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자신들의 방식으로 기호를 사용한다는 것은 경험적 사실이기 때문이다.

- 에이어의 재반론: 선험 명제의 타당성이 언어적 용법의 타당성에 의존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선험 명제가 어떤 사실을 기술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선험명제가 그 자체로 언어적 규칙은 아니다.

- 선험 명제는 참/거짓을 따질 수 있지만, 언어적 규칙을 그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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