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2학기 서울대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 "시공간철학" 1주차 강의 요약
과학 추론의 기본 모형(과학자들이 하는 일을 요약해서 도식으로 만들어놓은 것)
과학자들이 하는 일 중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이론 혹은 모형 만들기이다. 실제 세계는 매우 복잡하기 때문에, 중요한 측면에 주목해 이론 혹은 모형을 만드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한편으로는 이론 혹은 모형을 바탕으로 추론을 통해 예측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실제 세계에서 실험, 관찰을 통해 데이터를 뽑아낸다. 그렇게 만들어진 예측과 데이터를 비교해, 둘이 일치하는 경우 데이터가 이론 혹은 모형을 입증하는 것이고, 아닌 경우 데이터가 이론 혹은 모형을 반증하는 것이다.
포퍼는 과학에서 입증에 비해 반증이 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입증은 후건 긍정 형식이므로 연역 논증으로서는 오류지만, 반증은 후건 부정 형식이므로 타당한 연역 논증이기 때문이다. 포퍼는 과학자들이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이 이론을 반증하거나, 반증을 견뎌내는 이론을 만들어내는 일이라고 보았다.
이론이 반증되었을 때 과학자들의 반응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이론이 잘못되었다고 판단한다. 둘째, 데이터가 잘못되었다고 판단한다. 셋째, 이론의 견고한 핵(hard core)은 옳지만 보호대는 잘못됐다. 여기서 '견고한 핵', '보호대'는 라카토슈가 제안한 용어이다. 견고한 핵은 이론의 핵심을 이루는 부분이고, 보호대는 이론이 적용되는 범위에 대한 진술이나 이론 적용에 필요한 가정들을 말한다. 과학자들은 이론이 반증되었을 때, 이론의 보호대를 변형해서 반증 사례들을 입증 사례들로 바꾸려고 하기도 한다.
이상의 논의를 뉴턴 물리학에 적용해볼 수 있다. 뉴턴의 물리학은 운동 법칙들(관성의 법칙, 가속도의 법칙,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으로 이루어져 있다. 운동 법칙은 운동 방정식을 통해 기술된다. 뉴턴 물리학 이론은 일반적인 상황에 대한 것이며, 이론을 특수한 상황에 적용하는 것은 모형이다. 모형의 대표적인 예는 조화진동자인데, 조화진동자는 세상에 실제로 있다기보다는 모형으로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론에서 F=ma라는 일반적인 법칙이 조화진동자의 복원력에 대해서는 F=-kx 형태로 적용된다. 물리학자들은 F=-kx라는 방정식을 풀어서 x(t) = a cos bt 형태의 예측을 한다. 조화진동자 사례에서 이론이 적용되는 범위를 마찰 현상까지 넓히는 것은 복원력에 마찰도 고려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즉, 마찰력, 복원력 두 가지 특수한 힘을 일반 이론의 F=ma에 적용하는 것이다. 뉴턴 이론은 20세기 초에 견고한 핵을 유지하면서 보호대를 조정해서 풀기 힘든 반증 사례에 맞닥뜨렸다. 바로 빛의 속도가 항상 동일하다는 것이다(맥스웰 이론의 예측, 마이컬슨-몰리 실험 등).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상대성 이론이 등장한 것이다.
수학이 본성이 무엇이길래 이런 신비로운 일을 할 수 있는가?
F=ma에서 조화진동자뿐만 아니라 수많은 상황에 적용되는 방정식들이 나온다. 이런 추상적인 수식에서 어떻게 그렇게 수많은 정보가 나올 수 있는가? 이에 대해 구조주의와 구성주의 두 가지 입장이 있다. 구조주의는 뉴턴 이론이 세계에 존재하는 연관관계 중 중요한 부분을 성공적으로 포착했다고 설명한다. 그 부분이란 바로 변환 하에서 불변하는 부분이다. 비유적으로 이야기하면, 세상의 모든 정보를 수로 바꾸고, 각 수를 0부터 1 사이의 한 점에 대응시킨 것과 유사하다. 이러한 변환을 하기 전과 후 정보의 구조에 불변하는 구조가 있으므로, 한 점에 대응된 수에서 원래의 정보를 복구해낼 수 있다. 마찬가지로 뉴턴 이론도 세계에서 불변하는 구조를 포착해 이론으로 만든 것이다. 따라서 뉴턴 이론에서 모형으로, 그리고 그 결과로 역변환을 하면 원래의 정보를 복원해낼 수 있다는 것이 구조주의 입장이다. 이와 같이, 이론의 역할을 강조하므로 구조주의는 이론 중심주의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구조주의는 과학 통합 프로젝트와도 연결된다. 가장 추상적인 이론에서 구체적인 이론까지 위계가 있고, 추상적인 이론에서 구체적인 이론이 차례로 도출된다는 것이다.
구성주의는 수학을 포함한 지식은 우리가 만들어내는 것이라는 입장이다. 구성주의는 모형이 과학의 여러 요소들을 중재해준다는 점을 강조하는 모형 중심주의이다. 구성주의에 따르면 이론, 데이터, 수학, 실제 세계는 모형을 통해 중재된다. 이론은 오로지 ceteris paribus 조건하에서만 그대로 적용된다. 따라서 이론 그 자체만으로는 거짓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과학자들은 이론에 여러 가정을 덧붙여 모형을 만들어서 이론과 세계를 연결시킨다. 즉, 모형은 거짓인 이론을 실제 세계와 연결시켜주는 것이다. 이때, 과학자들은 공식에 집어넣기 위해 데이터를 다듬는다. 이처럼, 이론의 수식을 푸는 것은 일견 중립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구성주의자들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은 모형에 의해 구성된 지식이라고 본다. 구성주의자들은 과학의 통합 프로젝트에 반대한다. 과학은 지식의 위계에서 각자의 영역에서 다른 모형을 사용하면서 각자 다른 목표, 방법론, 존재론이 있는 여러 분야들의 모임이기 때문이다.
상대성 이론은 구조주의 입장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불변, 변환 등의 개념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빛의 속도가 일정하다는 불변을 유지하면서 관찰자들 간의 기술을 연결시켜주는게 특수상대성 이론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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