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는 이 책 전체에서 마음의 본성에 대한 "공식적인 이론"(offical theory)을 비판한다. 공식적인 이론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신체와 정신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신체는 공간 속에 있고, 공간에 있는 다른 물체들이 따르는 것과 같은 기계론적(mechanical) 법칙들을 따른다. 반면 정신은 공간에 있지 않고, 기계론적 법칙을 따르지도 않는다. 신체적 과정과 상태는 외부의 관찰자에 의해 파악될 수 있으므로 공적이다. 반면 정신의 작용은 외부의 관찰자들이 파악할 수 없으므로 사적이며, 자신의 정신 상태와 과정을 직접적으로 인지할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뿐이다. 개개인은 의식, 자기-의식, 내성을 통해 정신적인 일에 대해 직접적이고 확실한 인식을 갖는다.
이와 같은 이분법은 흔히 자신의 신체를 포함한 물리적 세계의 대상과 과정은 "외적"이고 마음의 작용은 "내적"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마음은 공간을 점유하지 않으므로 "외적", "내적"이라는 것은 비유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를 비유로 받아들이지 않아서 잘못된 문제를 탐구하는 사람들이 많다. 또한 비유로 받아들이는 경우라도 신체와 정신 사이의 상호작용의 문제는 이론적 난점들을 낳는다. 물리적 세계와 정신적 세계는 상호작용을 하지만, 그 상호작용은 물리적 세계와 정신적 세계 중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러한 상호작용은 내성을 통해서도 알 수 없고 관찰을 통해서도 알 수 없다.
좀 더 근본적으로 이 이분법은 서로 다른 두 종류의 존재 혹은 상태가 존재한다는 가정에 기반을 두고 있다. 물리적 대상들은 공간이라는 공통의 영역에 존재하고, 각 대상들은 다른 대상들과 기계론적인 연관을 갖는다. 반면 정신적 사건들은 마음이라는 분리된 영역에서 일어나며 서로 다른 마음들에서 일어나는 정신적 사건들 사이에는 직접적인 인과적 연결이 없다. 마음들 간의 상호작용은 신체를 매개로 할때만 가능하다.
그렇다면 마음의 작용에 대해 어떤 종류의 지식이 얻어질 수 있는가? 첫째, 공식적인 이론에 따르면 한 사람은 자신의 마음의 작용에 대해 최상의 직접적 지식을 얻을 수 있다. 무의식의 작용이나 자기기만 등에 의해 방해를 받을 때도 있긴 하지만, 정상적인 상황에 있는 한 확실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의식에 대한 직접적인 데이터를 받는 것 이외에도, 내적 감각인 내성을 사용할 수도 있다. 자신의 마음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관찰은 물리적 세계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관찰보다 훨씬 더 확실한데, 외부 감각은 착각이나 혼동을 일으킬 수 있지만 의식과 내성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 공식적인 이론에 따르면 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정신에서 일어나는 일에 직접적으로 접근할 수 없다. 할 수 있는 일은 신체적 행동을 관찰하고 그로부터 추론을 통해 불확실하고 간접적으로 심적 상태를 아는 것 뿐이다. 따라서 심적 상태를 나타내는 용어들이 한 사람에게 올바르게 적용되었는가는 오직 그 사람만이 확실하게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철학자들이 마음의 본성과 위치에 대한 이론들을 구성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했던 이유는 우리가 다른 사람의 마음에 대해 옳은 지식을 가질 수 있고 만약 잘못되었을 때 수정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규칙적이고 효과적으로 사용되는 정신 작용 개념들을 찾아서 철학자들은 그 개념들의 논리적 지형도를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그런 공식적 논리적 지형도는 오히려 다른 사람의 정신을 기술할 때 그런 정신 작용 개념들을 규칙적이고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없다는 점을 함축한다.
2. The Absurdity of the Offical Doctrine
저자는 위에서 서술한 공식적 이론을 "기계 속 영혼의 독단"(the dogma of the Ghost in the Machine)라고 부른다. 저자에 따르면 이 독단은 범주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정신과 신체의 이원론은 범주의 오류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2절 대부분은 범주의 오류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이므로 자세한 내용은 생략]
3. The Origin of the Category-Mistake
데카르트 및 그의 후계자들에 따르면 정신 작용을 나타내는 용어들은 기계론적 과정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되고, 비-기계론적인 과정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그리고 기계론적 법칙들이 물리적 세계의 운동을 나타내듯이 다른 법칙들이 마음의 작용을 나타내야 한다. 따라서 물리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의 차이는 "사물"(things), "물체", "속성", "상태", "과정", "변화", "원인", "결과" 등의 공통적 범주 내에서의 차이가 된다. 즉, 마음도 사물(thing)이긴 하지만 신체와는 다른 종류의 사물로 간주된다. 그리고 마음의 과정은 원인과 결과이지만 신체적 움직임들 사이의 원인과 결과와는 다른 종류이다.
정신과 신체의 상호작용을 설명하는 일에 이론적 난점이 존재한다는 점은 위와 같은 가정이 공식적 이론의 핵심에 놓여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또한 마음의 작용이 법칙에 의해 엄격하게 지배되어야 한다는 점과 인간의 고차원적인 행위는 기계적이지 않다는 점이 조화되기 어렵다는 점도 공식적 이론이 위와 같은 가정을 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공식적 이론에서 정신이 신체와 동일한 범주에 속하고, 신체는 엄격한 법칙을 따르기 때문에, 정신도 엄격한 법칙을 따라야 한다는 점이 도출되기 때문이다.
공식적 이론에 따르면 외부의 관찰자는 다른 사람의 행동이 그 사람의 정신적 과정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알 수 없다. 따라서 관찰자는 자신이 갖고 있는, 마음 작용에 대한 개념들을 다른 사람에게 올바로 적용했는지의 여부도 알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자신이 제정신이라거나 논리적으로 일관적이라고 할 수도 없는데, 왜냐하면 그의 행동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식적 이론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행위에 대해 판단할 수 없으며, 그런 판단의 기반이 되는 인과적 가설을 세우는 문제도 제기될 수 없다.
기계 속 영혼의 독단에 따르면 (1) 신체와 정신이 존재하고, (2) 물리적 과정과 정신적 과정이 일어나며, (3) 신체의 움직임에는 기계론적 원인과 정신적 원인이 있다. 저자는 이 세 가지를 결합하면 불합리한 결과가 나온다고 주장한다. 단, 저자는 이 세 가지 각각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며, 그보다는 예를 들어 "정신적 과정이 일어난다"라는 문장과 "물리적 과정이 일어난다"라는 문장이 동일한 범주가 아니기 때문에 두 문장을 결합하면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저자의 주장이 옳다면, 다음과 같은 결과가 나온다. (1) 신체와 정신의 이분법은 사라지지만, 한 쪽이 다른 쪽을 흡수하는 방식으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신체와 정신을 대비시키는 것은 애초에 다른 범주에 속한 것들을 잘못 대비시킨 것이기 때문이다. (2) 관념론이나 유물론은 잘못된 질문에 대해 답한 것이 된다. 물리적 상태 및 과정은 정신적 상태 및 과정과 다른 범주에 속하기 때문에, 한 쪽을 다른 쪽으로 환원시킬 수 없기 대문이다. 정신이 존재한다고 말할 때와 신체가 존재한다고 말할 때의 "존재한다"는 용어는 서로 다른 의미를 갖는다.
4. Historical Note
공식적인 이론이 데카르트의 철학에서만 유래한 것은 아니다. 또한 물리적 세계와 정신적 세계의 이분법이 전혀 생산적이지 않았던 것도 아니다. 이러한 이분법은 마음과 그 기능을 정치적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로 비유하던 기존의 설명을 무너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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