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에 따르면 과학혁명에 대한 쿤의 묘사는 화학혁명에 대해서도 매우 잘 맞아떨어진다. 그렇다고 해서 화학혁명의 사례가 쿤의 이론을 입증해주는 건 아닌데, 왜냐하면 애초에 화학혁명 사례는 쿤이 자신의 이론을 만들면서 사용한 사례이기 때문이다.
A Sketch of the Chemical Revolution
화학혁명은 실제 역사적 인물들, 과학사학자들, 과학철학자들 모두가 진정한 과학혁명이라고 인정하는 몇 안 되는 사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학사학자들 사이에서는 플로지스톤 이론의 세부사항 및 화학혁명의 정확한 역학 관계에 대해 의견 불일치가 있다. 게다가, 80~90년 동안 플로지스톤 이론은 크고 작은 변화를 거쳤다. 이는 단일한 플로지스톤 이론은 없고 여러 플로지스톤 이론들이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단, 플로지스톤 이론이 원리(principles)를 상정하는 화학 전통에서 시작했다는 점에는 논쟁의 여지가 없다. [여기서 '원리'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쓰이는 의미와 다르게 쓰인다. 당시 화학에서 상정된, 물질에 특정 성질을 부여하는 존재자를 뜻한다. 예를 들어 플로지스톤은 물질에 타는 성질을 부여하는 가연성의 원리로 상정되었다.]
플로지스톤 이론은 연소와 하소(calcination, 현대적 용어로는 '금속의 산화')를 통합하는 이론이었다. 연소와 하소는 모두 물질이 플로지스톤을 잃는 과정으로 이해되었다. 하소의 반대 과정인 금속화(현대적 용어로는 '환원')도 금속회가 플로지스톤을 얻는 반응으로서 플로지스톤 이론 하에서 이해되었다. 플로지스톤 이론의 이러한 보편성은 사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실험적으로 확립된 것이었다.
18세기 말에 화학은 크게 변화했다. 라부아지에의 새로운 원소 명명법은 라부아지에의 반대자들에게도 받아들여졌고, 플로지스톤과 같은 원리들은 새로운 화학에서 거의 사라졌다. ('거의'라는 말을 붙인 이유는 새로운 화학에도 여전히 원리들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인데 예를 들어 산소는 산의 원리로 받아들여졌다.) 그럼에도 플로지스톤 이론의 가장 중요한 성취, 즉 연소와 하소가 같은 과정이라는 관점은 새로운 화학에서도 보존되었다.
A Very Short Sketch of Kuhn's Theory of Scientific Revolutions
혁명은 정상과학 시기 사이에 일어난다. 정상과학은 해당 분야의 근본적인 사항들에 대한 합의로 특징지어진다. 그러한 합의의 중심에는 해당 분야의 연구를 암묵적으로 이끌 수 있는 범례적 문제 풀이가 있다. 정상 과학 시기는 이론적, 실험적 틀과 관련해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시사하는 변칙사항들에 의해 끝난다. 이러한 위기는 과거 이론의 변칙사항들을 잘 다룰 수 있는 새로운 이론에 의해 종결된다. 단, 새로운 이론과 과거 이론 사이의 관계에는 다음과 같은 특이한 점들이 있다.
1. 새로운 이론은 과거 이론의 설명력을 완전히 포괄하지 못한다. 과거 이론에 의해 설명되었던 일부 현상은 새로운 이론에 의해 설명되지 못한다.
2. 혁명은 과학적 작업이 지켜야 할 기준들, 특히 과학적 설명이 갖춰야 할 기준들에 변화를 가져온다.
3. 이론들 간의 비교는 비합리적이진 않지만(쿤의 비판자들은 쿤이 이렇게 생각했다고 오해한다), 알고리듬적인 절차도 아니다.
4. 혁명은 특적 일반 진술의 인식론적 지위를 변화시킨다. 과거에는 경험적 진술로 생각되었던 진술이 혁명 후에는 순환적인 것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5. 혁명은 항상 대상들이 어떤 범주에 속하는지 재편하고, 범주 자체도 재편한다.
6. 혁명 뒤에 일상적인 과학 담화에 쓰이던 일부 어휘들이 변화한다.
7. 과거 이론과 새로운 이론의 중심 용어들 사이의 글자 그대로의 번역이 불가능하다.
8. 혁명 전후로 과학자들이 작업하는 세계가 변화한다.
The Beginning of the Chemical Revolution
쿤에 따르면 혁명은 보통 변칙사항에 의해 유발되는 위기에 의해 일어난다. 화학혁명에 큰 영향을 끼친 변칙사항은 연소와 하소 시의 질량 증가였다. 플로지스톤 이론에 따르면 연소나 하소는 물체에서 플로지스톤이 빠져나가는 반응이므로 질량이 감소하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연소나 하소 후에 질량이 증가하는 물질들이 있었다. 사실 이런 현상은 플로지스톤 이론 초기부터 알려져 있기는 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이 현상은 플로지스톤 이론에 심각한 문제가 된다고 간주되지 않았다. 플로지스톤 이론가들은 이 현상에 대해 다음과 같은 설명들을 내놓았다.
- 공기가 결합한다.
- 플로지스톤은 음의 질량을 갖는다.
- 용기벽에 있는 입자들이 결합한다.
- 질량 변화는 사실 일어나지 않고, 측정이 잘못된 것이다. 질량 측정이 정성적으로(qualitative) 실행되었다면 가능한 이야기이다.
이런 상황은 라부아지에가 정량적으로 질량을 측정하기 시작하면서 급변했다. 라부아지에 이전에도 질량을 정량적으로 측정하는 화학자들이 있었지만, 라부아지에는 실험을 닫힌 계(closed system)에서 시행했다는 점이 다르다. 라부아지에는 하소와 연소 과정에서 공기 중의 아직 알려지지 않은 무언가가 흡수된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라부아지에는 수은회(HgO)가 석탄(플로지스톤의 원천) 공급 없이도 수은이 되는 현상도 연구했다. 이 현상은 플로지스톤 이론에게 큰 문제였는데, 수은회의 금속화의 경우 플로지스톤이 개입하지 않는다는 근거였기 때문이다.
쿤의 용어를 따르자면, 질량 증가가 실험적으로 확립되었을 때(experimentally established), 즉 연소와 하소 중에 공기가 흡수된다는 점이 더이상 부정되지 않았을 때, 이 현상은 심각한 변칙현상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플로지스톤 이론이 설명하고자 했던 바로 그 현상이 플로지스톤과 상관 없이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위기에 대한 쿤의 주장은 이 시기의 상황과 부합한다.
- 쿤에 따르면 과거 이론이 여러 가지로 분화하고 새로운 이론이 출현한다. 화학혁명의 경우에도 실제로 그랬는데, 라부아지에의 새로운 이론이 등장했고 플로지스톤 이론 내에서도 다양한 버전이 생겼다.
- 쿤에 따르면 서로 경쟁하는 학파들이 등장한다. 화학혁명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과거 이론을 지지하는 쪽과 라부아지에의 이론을 지지하는 쪽으로 나뉘었다.
- 쿤에 따르면 새로운 이론의 지지자들은 과거 이론을 공격하는 논증과 새 이론을 옹호하는 주장을 내놓는다. 실제로 라부아지에는 다양한 버전의 플로지스톤 이론을 점점 강하게 비판했다. 동시에 산소 이론은 점점 정교해졌고 경험적 입증을 받았다. 특히 라부아지에는 라플라스와 함께 열을 측정하는 새로운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산화 환원 반응에 대한 이론과 열에 대한 이론을 통합시켰다.
- 위기 중에 그리고 위기 후에 기존 이론에서는 예상치 못한 발견들이 나온다. 이러한 발견들은 언제 이루어졌는지, 누가 발견자인지 규정하는 것이 어렵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예측하지 못한 현상이 정말로 일어났는지, 일어났다면 무슨 현상이 일어났는지가 모두 논쟁거리가 되기 때문이다. 근본적으로, 이런 불안정한 상태는 그 현상을 귀속시킬 범주가 아직 없기 때문에 생긴다. 산소의 발견이 대표적인 예이다.
- 변칙현상 그 자체로는 기존 이론을 논박하지 못한다. 그 현상을 설명할 경쟁 이론이 있을 경우에만 변칙현상이 기존 이론을 기각시킨다. 화학혁명에서도 질량 증가 현상이 플로지스톤 이론을 의심하게 만들긴 했지만, 그 현상 자체로는 결정적인 반증이 되지 못했다. 질량 증가가 플로지스톤 이론을 논박하게 된 것은 라부아지에가 새로운 이론을 통해 질량 증가를 설명할 수 있게 되었을 때이다. 혁명기의 과학은 한 이론이 경험적 자료를 두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두 이론이 경험적 자료를 두고 경쟁하는 것이다.
Features of the Chemical Revolution Illustrating Kuhn's Theory of Scientific Revolutions
쿤이 말한 혁명의 특징들이 화학혁명기에 분명하게 나타났다.
- 쿤 로스: 두 경우가 있다. 몇몇 현상에 대해 새로운 이론에서 설명할 필요가 없어진 경우와, 새 이론의 설명력이 경쟁 이론보다 부족해진 경우. 두 번째 경우가 화학혁명기에 나타났다. 플로지스톤 이론은 모든 금속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금속성을 설명할 수 있었지만 라부아지에의 새 이론은 그렇지 못했다. 이러한 설명력은 19세기 말 전자 이론이 나오면서야 회복됐다.
- 기준 변화: 첫 번째 특징의 귀결로 나타난다. 화학혁명 이전에 화학의 작업은 화학 물질들의 성질들(qualities)과 그 변화를 설명하는 것이었지만, 라부아지에의 이론은 그런 설명력을 상실했다. 그래서 화학 이론이 성질을 설명해야 한다는 기준은 사라졌다. 성질에 대한 설명은 양자화학의 등장한 이후에 다시 가능해졌다.
- 이론 비교가 알고리듬적인 과정이 아님: 첫 번째 특징과 연관되어 있다. 쿤의 관점에서, 이론 비교는 득실을 정교하게 저울질하는 과정이 아닌데, 이론 비교에 쓰일 공통의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플로지스톤 이론은 정량적 질량 관계를 설명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은 반면, 라부아지에의 이론은 금속성을 설명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런 상황은 두 가지 결론으로 이끈다. 첫째, 진 쪽이 새로운 이론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비합리적인 일이 아니었다. 둘째, 이론 선택은 완전하지 않으므로 이론 변화에 저항하는 것이 이해 못할 일이 아니다.
- 특정 일반 진술들의 인식론적 지위 변화: 연소와 하소 반응이 플로지스톤의 방출 과정이라는 점은 플로지스톤 이론에서 경험적 논제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라부아지에는 이 논제가 경험적이지 않고 따라서 설명적 가치가 없어 보였다. 라부아지에에게 플로지스톤 이론의 설명은 가연성 물질이 가연성의 원리(플로지스톤)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연적이라는 순환적 설명으로 보였다.
- 범주 변화(어휘구조 변화): 화학혁명 이후 금속은 화합물에서 원소로, 물과 공기는 원소에서 각각 화합물과 혼합물로 지위가 바뀌었다. 이와 동시에 '원소'라는 용어에 대한 이해도 바뀌었다. 플로지스톤 이론에서 원소는 원리에서 성질을 얻었는데, 화학혁명 뒤에는 기본적인 화학적 실체로서 내재적으로 속성을 갖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리고 원리의 개념은 화학에서 더이상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했다(라부아지에 당시에는 여전히 원리가 상정되었지만, 19세기 초에는 없어졌다).
- 어휘구조 변화(lexical change)에 따라 과학 용어(scientific vocabulary)도 변한다.[lexical, vocabulary 번역 고민해보기] 라부아지에 등은 원소와 화합물에 대한 새로운 명명법을 개발했다. 이 새로운 명명법은 이론-중립적이지 않았고 라부아지에의 가설들을 반영했다.
- 번역 불가능성: 산소는 탈플로지스톤화 공기에 실험적으로 대응되지만, 서로의 용어를 적절하게 기술할 수는 없다.
- 세계 변화: 플로지스톤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실험될 수 있었다. 또한 플로지스톤은 훌륭한 설명력을 가졌고 자연에 대한 통합적인 관점을 제공했다. 이와 같이 플로지스톤 이론가들의 세계에 플로지스톤은 존재했다. 마찬가지로 새로운 화학자들은 산소를 실험적으로, 이론적으로 다룰 수 있었다.
이에 대해, 현대 이론에 비추어 플로지스톤 이론가들은 단지 틀린 것일 뿐이라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저자는 이런 반론에 대한 세 가지 답변을 대략적으로 제시한다.
- 비관적 귀납: 현대 이론이 참이라는 보장이 없다. 현대 이론에 비추어 플로지스톤 이론이 틀렸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22세기의 화학자들은 현대 이론이 틀렸다고 할 수도 있다.
- 세계 변화 논제가 상대주의적으로 해석될 필요는 없다. 세계 변화 논제는 플로지스톤 이론가들이 심각한 변칙사항들에 마주쳤다는 점, 새로운 화학 이론은 이 변칙사항들을 설명할 수 있었다는 점, 그리고 그것이 커다란 과학적 진보라는 점과 양립 가능하다.
- 세계 변화 논제는 역사학자들의 방법론적 원칙, 즉 현재주의(presentism)이나 휘그주의를 피하라는 원칙을 표현하는 것이다. 1760~80년대 화학자들은 그들의 이론, 실험, 해석, 배경 가정 등등에 기반을 두고 활동했는데 바로 그들의 관점에서 역사를 이해해보자는 것이다.
Conclusion
과학혁명의 구조에 대한 쿤의 일반 이론은 화학혁명의 사례에 매우 잘 들어맞는다. 하지만 화학혁명의 사례가 쿤의 이론에 대한 경험적 증거가 되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쿤이 이론을 만들 때 고려한 사례들 중 하나가 바로 화학혁명의 사례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화학혁명의 사례는 쿤의 이론에 대한 설명으로 받아들여야지, 증거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좀더 강하게 말해, 화학혁명은 쿤의 일반적 이론의 중요한 부분이다. 쿤에 따르면 과학 이론의 중요한 부분은 범례적인 구체적 문제 풀이 사례들이다. 범례들은 단지 이론을 설명하는 것을 넘어 이론의 중심 개념들에 의미를 제공해준다. 저자는 철학 이론도 과학 이론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쿤의 철학 이론은 화학혁명이라는 범례를 통해 모호하지 않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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