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관적 귀납에 대한 워럴의 응답은 일종의 "분할 통치 전략"이지만, 저자가 제시한 것과는 차이가 있다. 이론 변화에서 보존된다고 워럴이 주장하는 것은 이론 내의 이론적 내용(theoretical content)이 아니라 수학적 구조(mathematical structure)이다. 워럴은 과학 이론 간에 이론적 층위(관찰 불가능한 대상(entity)에 대한 기술, 현상 아래의 메커니즘과 원인들)에서 커다란 불연속성이 있다는 점에서는 비관적 귀납이 옳다고 본다. 하지만 과학의 연속성이 경험 법칙 층위에서만 존재한다는 점에는 반대한다.
워럴은 이론적 층위에서 커다란 불연속성이 있지만, 메커니즘과 원인에 대한 이론적 설명의 층위와 경험 법칙의 층위 사이에 상당한 연속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런 입장에 "구조적 실재론"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구조적 실재론에 따르면 선행 이론의 수학적 내용은 후행 이론에서 보존되고, 이러한 보존은 과학의 비-경험적 연속성을 이룬다. 구조적 실재론은 대상·과정의 본성과, 그것의 구조 사이의 이분법에 의존한다. 대상·과정의 본성은 양적으로 기술될 수 있는 것을 넘어서 있고, 구조는 대상의 행동을 기술하는 수학적 구조로 포착된다.
Structural versus scientific realism
이론 변화 과정에서 많은 수학적 방정식들이 보존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점은 이론 변화에서 형식적-수학적 층위에서 연속성이 있음을 시사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많은 경우, 수학적 기호에 대한 완전한 물리적 해석은 크게 변한다. 따라서 많은 법칙들의 수학적 형식은 바뀌지 않더라도 그것들의 내용은 변한다.
실재론자들은 잘 지지되고 (근사적) 참인 이론적 내용이 보전됨으로써 구조도 보존된다고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보존되는 것이 경험적 내용과 (해석되지 않은) 수학적 방정식들뿐이라는 주장에 반대할 것이다. 과학자들은 현재 이론의 몇몇 이론적 내용이 증거에 의해 뒷받침되고 참일 개연성이 높다고 믿을 좋은 이유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과학적 실재론은 다음과 같은 논제들을 옹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1) 한 수학적 방정식의 이론적 해석의 일부는 그 방정식에 대한 새로운 이론적 해석의 일부로서 보존된다. 한 대상이 특정한 인과적 역할을 한다고 상정되었을 때, 그것이 수행하는 역할에 비추어 여러 속성들을 할당받게 된다. 이런 속성들(에 대한 기술들) 중 몇몇은(혹은 대부분은) 후행 ㅊ이론에서도 보존된다.
(2) 후행 이론에서 보존된 수학적 방정식들에 대한 이론적 해석은 현재의 증거에 비추어 볼 때 선행 이론에서의 이론적 해석보다 더 잘 지지된다.
(3) 보존된 방정식에 대한 현재의 이론적 해석은 거짓이기보다는 참일 개연성이 높다.
워럴의 구조적 실재론은 위의 입장과 다르다. 그런데 구조적 실재론은 이론 변화에서 수학적 층위에서 연속성이 있다는 사실에 대한 기록에 그치면 안 된다. 철학적 논제로서 구조적 실재론은 이러한 연속성에 대해 설명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런 연속성이 존재한다는 점은 도구주의자들도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저자에 따르면 구조적 실재론은 우리가 무엇을 알 수 있는지와 과학 이론들이 무엇을 밝혀낼 수 있는지에 대한 인식적 제약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구조적 실재론은 과학 이론의 인지적 내용을 그 이론의 경험적 귀결과 수학적 구조로 제한한다. 그러나 도구주의와 달리, 구조적 실재론은 이론의 수학적 구조가 세계의 구조를 반영한다고 제안한다. 즉, 과학 이론은 관찰 불가능한 대상들 사이의 실제 관계들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구조적 실재론은 다음과 같은 논제들을 지지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a) 과학 이론은 그것들의 수학적 구조를 통해 세계의 관찰 불가능한 구조를(그리고 구조만) 드러낼 수 있다.
(b) 이론 변화에서 보존된 수학적 방정식들은 대상들 사이의 실제 구조를 표현하며, 우리는 그 대상들에 대해 그것들 사이의 수학적으로 표현된 관계들 이상을 알지 못한다.
(c) 동일한 수학적 구조를 갖는 서로 다른 존재론들(서로 다른 이론적 해석들)이 존재할 수 있지만 그것들 중 하나가 더 잘 지지받는다거나 옳다고 볼 이유는 없다.
Poincarean preludes
역사적으로 볼 때 구조적 실재론의 입장은 19세기 초 앙리 푸앵카레의 작업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푸앵카레는 경험적 성공을 거둔 과학 이론의 수학적 구조가 관찰 불가능한 대상들 사이에 성립하는 관계에 대해 말해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한편으로 맥스웰(Grover Maxwell)도 램지 문장을 통한 접근으로 구조적 실재론의 한 버전을 옹호했다. 워럴과 푸앵카레의 입장은 인식론적인 필요, 즉 비관적 귀납과 실재론을 조화키기 위한 목적에서 나왔다. 하지만 램지-스타일의 구조적 실재론은 세계가 특정한 논리-수학적 구조를 가지고 있고, 그것이 우리 최선의 과학 이론의 논리-수학적 구조에 반영되어 있다는 러셀적인 입장에서 나왔다. 둘 사이의 차이가 있다면, 동기에서의 차이 뿐일 것이다. 그러므로 워럴-푸앵카레의 구조적 실재론은 램지-스타일로 정식화될 수 있다.
Structural realism and the pessimistic induction
저자가 주목하고자 하는 문제는, 논리-수학적 층위(수학적 방정식들의 층위)에서의 보전이 비관적 귀납에 대한 실재론적 답변이 되기에 충분한지의 문제이다. 저자는 그렇지 않다는 입장이다. 수학적 연속성이 성립한다는 주장만으로는 실재론이라고 할 수 없다. 워럴은 이론의 수학적 방정식들이 세계의 구조를 표상한다는 점을 뒷받침하는 독립적인 논증을 제공해야 한다. 이런 논증이 추가적으로 필요한 이유는, 이론의 수학적 구조가 보존된다는 점에 대해, 그 수학적 구조가 세계의 구조를 반영한다는 설명 말고도 다른 설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수학적 구조가 보존되는 것은 단지 실용적 문제일 수도 있다. 과학자 공동체에 더 편리하기 때문에 과학자 공동체가 수학적 구조를 보존하기로 결정했을 수도 있다.
수학적 방정식들이 세계의 구조를 표상한다는 점을 뒷받침하는 논증으로 기적 불가 논증의 한 버전을 제시할 수 있다. 원래 버전의 기적 불가 논증은 성공적인 과학 이론이 구조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대상에 대해서도 근사적 참이라는 점을 뒷받침하기 위해 제시된 것이므로, 워럴에게는 구조적 실재론 버전의 기적 불가 논증이 필요하다. 그런 논증은 다음과 같이 제시될 수 있다.
(W) 예측적 성공은 누적적이다. 후행 이론은 선행 이론의 경험적 내용을 포착한다. 또한 수학적 구조도 누적적이다. 후행 이론은 선행 이론의 수학적 구조를 통합한다. 따라서, 경험적 성공과 수학적 구조의 누적 사이에 상관 관계가 있다. 성공적인 예측이 그 이론이 세계에 "달라붙어" 있다는 점을 시사하기 때문에, 이론의 보존된 수학적 구조도 세계의 구조에 "달라붙어"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그런데 논증 (W)가 구조적 실재론을 뒷받침하려면, 수학적 구조가 이론의 예측적 성공에 대한 유일한 원인이어야 한다. 워럴은 이런 입장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론적 내용 없이 수학적 방정식만으로는 어떤 예측도 만들어낼 수 없다. 예측을 만들 때는 이론적 가설들과 보조 가정들이 필요하다. 예측의 도출에 사용되는 수학적 방정식들은 이미 이론적으로 해석되어 이론적 내용을 가진 것이다. 따라서, 예측이 입증된다면 수학적 구조뿐만 아니라 가설도 입증된 것이다. 만약 구조적-수학적 층위에서 보존된 것이 상당히 많다면 몇몇 이론적 내용들도 보존되었다고 봐야 한다.
게다가 구조적 실재론 버전의 기적 불가 논증이 원래 버전의 기적 불가 논증보다 인식적 위험이 덜한 것도 아니다. 둘 사이의 차이는 얼마나 많은 비-경험적 내용을 옳은 것으로 간주할 것인가의 정도차일 뿐이다. "분할 통치 전략"에서 적절한 구분선은 성공에 본질적으로 기여하는 이론적 요소와 그렇지 않은 요소를 구분해야 한다. 워럴의 구조/본성 구분선은 그런 구분을 하지 못했다.
Structure versus nature?
워럴이 어떤 구분을 긋고 싶은 것인지 다소 애매하다. 때때로 구조/그 구조에 대한 이론적 해석 구분을 이야기하지만 다른 때에는 대상·과정의 구조/그 대상·과정의 본성 구분을 이야기한다. 전자에 대해서는 앞에서 비판했다. 여기서는 후자에 대해 비판하고자 한다. 저자는 두 가지 주장을 하는데, 첫째는 한 대상의 본성과 구조는 연속체라는 것이고, 둘째는 대상의 구조보다 본성을 알기 어렵지는 않다는 것이다.
이론적 대상의 본성이 그 대상의 구조와 구분되는가? 한 수학적 기호의 물리적 내용(즉, 그것이 의미하는 대상 혹은 과정)을 그것의 해석된 수학적 방정식들의 총체(즉, 그것의 행동을 기술하는 법칙들의 총체)와 구분할 수 있는가? 과학자들의 한 대상의 본성에 대해 말할 때, 그 과학자들이 하는 일은 그 대상에 기본적인 속성들과 관계들을 귀속시키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그 대상의 법칙적 행동을 방정식들로 기술한다. 즉, 그 인과적 agent에 특정 인과적 구조를 부여하고, 그 대상이 구조화된 방식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러한 점은 질량의 경우를 보면 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뉴턴의 제 2법칙 F=ma에서 관성 질량은 한 물체에 힘이 가해졌을 때 가속에 저항하는 것이라는 구조적 속성으로 이해된다. 마찬가지로 중력 질량(gravitational mass)는 한 물체가 다른 물체의 중력장에서 가속되는 것이라는 속성으로, 중력 법칙에 의해 기술된다. 게다가 관성 질량과 중력 질량은 사실 같은 것이다. 이 두 가지를 같은 것으로 관계지음으로써(구조화함으로써) 우리는 질량에 대하여 더 많이 알게 된다.
어떤 대상의 인과적 역할을 하는 몇몇 속성이 수학적으로 형식화될 수 있는 법칙과 기술로 표현될 수 없을 수도 있다. 또한 특정 시점에 우리는 어떤 대상이 가지고 있는 속성에 대해 잘 모르거나 잘못 알고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자연과학에 의해 발견되어야 할 경험적 주장들이다. 이런 가능성들이 있다고 해서 그 대상이 따르는 법칙에 대한 탐구로 포착될 수 없는 "추가적인 본성"이 있다는 점을 보장할 수는 없다. 반면 과학의 실행(practice)은 한 대상이 무엇인가에 대한 우리 지식이 그 대상의 행동에 대한 법칙들을 알게 됨으로써 진보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요약하자면, 한 대상이 무엇인가를 말하는 것은 그 대상이 어떻게 구조화되어 있는가를 말하는 것이다.
The case of light
[사례연구 생략]
Maxwellian insights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은 방법론적으로는 유용한 본성과 구조 구분을 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방법론적이었지, 구조와 본성 사이를 뚜렷하게 나눈 것은 아니었다. 맥스웰은 전자기파의 본성에 대해 추가적인 증거가 나온다면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맥스웰과 워럴의 통찰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과학적 실재론이 전부 아니면 전무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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