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지

글 목록

2019년 10월 31일 목요일

[과제/독서노트] 2018년 1학기 과학사 독서노트


리바이어던과 공기펌프
1: 실험 이해하기
저자들은 실험이 지식 생산 과정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묻는다. 이를 위해 저자들은 자연 지식을 만드는 수단으로서 실험적 실천이 자리잡고, 실험으로 산출된 사실문제(사실 여부가 결정되어야 할 쟁점)가 과학 지식의 토대를 이루게 된 역사적 맥락을 고찰한다. 저자들은 실험적 실천의 가치를 주창한 인물로 보일을 내세운다. 반대로 홉스는 실험으로는 정당한 과학 지식을 산출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보일의 실험주의에는 관례와 합의, 실험 및 평가에 투입되는 노동 등이 실험 지식의 생산에 역할을 했다. 홉스는 실험적 사실의 관례적인 속성을 공격함으로써 실험의 정당성을 공격했다.

2: 보는 것과 믿는 것 - 후반부
보일은 사실문제를 산출하는 실험의 역할이 실험이 제대로 수행되었다는 점에 대한 공동체의 확신에 본질적으로 의존한다고 보았다. 지식의 실험적 토대는 다른 사람들에게 반드시 목격되어야 한다. 증언의 신뢰성은 목격자가 얼마나 많은가에 달려있었기 때문에, 목격자의 수를 늘리는 것이 중요했다.
목격자를 늘리는 한 가지 방법은 사회적 공간에서 실험을 수행하는 것이다. 실험가의 실험실은 공적인 공간으로 여겨졌다. 또한 실험의 재현을 용이하게 하는 것도 목격자를 늘리는 중요한 방법이었다. 독자들 스스로 실험을 수행해 볼 수 있도록 하면 원거리에서도 목격자를 늘릴 수 있었다.
이보다 더 중요한 방법은 일종의 가상목격이었다. 보일은 그의 실험적 발견을 다룬 책에서, 상당히 장황한 서술을 하고 있다. 이는 재현을 용이하게 만들고, 새로운 실험에 대한 독자의 불신을 막으며, 가상 목격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다. 그는 또한 자기 텍스트의 신뢰성을 높이기 위해 자신이 믿음직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심어주는 문필적 수단을 사용했다. 실패한 실험에 대해서도 보고하고, (체계가 아닌) 에세이 형식을 사용했던 것이 그러한 수단이었다.


Experimenting in the History of Science
갈릴레오가 했던, 와인과 물이 뒤섞이지 않는다는 실험은 매우 반직관적이다. 많은 과학사가들은 그가 잘못된 보고를 한 것으로 취급했다. 그러나 실제로 실험을 해보면 갈릴레오가 옳았음을 알 수 있다. 실험에 대한 연구를 할 때는 과거의 문헌만 분석해서는 얻을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그런 점들은 직접 실험을 수행하며 이해해야 한다.

Alchemy and the History of Science
연금술은 그 동안 과학사의 영역에서 배제되었다. 연금술 용어들은 주관적이고 의사소통 불가능하며 비합리적인 것으로 취급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근대 초 당시의 연금술은 다양한 지식 분야와 사람들의 교차점이었다. 연금술은 신플라톤주의 우주론을 통해 과학 혁명에 영향을 주기도 했고, 약 화학의 발전에도 공헌했다. 오해를 걷어내고 연금술 문헌을 독해하면 충분히 의사소통 가능하고 재현 가능한 과정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근대 초기에는 현대적인 의미의 화학이 발전하기 위해 오히려 연금술의 방법론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었다.

논평: ‘Experimenting in the History of Science’에서, 실험에 대해 연구를 할 때 실험을 직접 해 보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는 차이가 있음을 이야기했다. 연금술에 대해서도 같은 관점이 적용되어야 할 것 같다. 연금술은 재현 불가능하고 의사소통 불가능하다는 과거의 관점은 문헌 분석에만 의존한 결과였던 것 같다. 실제로 그런지는 직접 확인해 보아야 한다. 과거의 실험을 연구하는 것과, 보일이 시공간적으로 떨어진 독자들에게 실험적 지식을 전달하기 위해 사용한 방법들은 이런 면에서 연관점이 있는 것 같다.



 Archimedes among the Humanists – W. R. Laird

아르키메데스에 대한 평가는 중세에 비해 근대 초기에 매우 높아졌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변화가 아르키메데스의 저작에 대한 접근성 변화 때문이 아니라 과학과 기술에 대한 당시의 인식 변화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중세 시대에는 외면 받았던, 아르키메데스의 실용적인 도구와 기계 연구가 이 시기에 와서 재평가된 것이다.

The Elizabethan mathematics of everything: John Dee's ‘Mathematicall praeface’ to Euclid's Elements Jennifer M Rampling
존 디는 과학사에서 크게 다뤄질 만한 업적을 남긴 사람은 아니지만, 다양한 분야에 대해 폭넓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기하학 원론의 영문판에 대한 서문은 기하학이 어떤 점에서 필요한지 수학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 그는 수학이 높은 수준의 인식을 얻는 데에 필요한 일종의 사다리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광범위하고 실용적인 응용 가능성을 갖는다는 점을 강조했다.

기하학 데카르트
데카르트는 고대의 기하학 책에는 명제가 별다른 순서 없이 나열되어 있다고 비판한다. 반대로 생각하면 이것은 데카르트가 연구의 올바른 순서를 제시한 자신의 방법론을 자랑스럽게 여겼다는 뜻일 것이다.


Pesic
Chapter 1: Music and the Origins of Ancient Sciencce
음악은 고대 그리스 철학의 주된 요소였다. 필롤라우스는 모든 것이 수를 가지고 있고, 수 없이는 아무것도 지식의 대상이 아니다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피타고라스는 망치 소리에서 음악과 수 사이의 관련성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한다. 망치가 내는 음정이 오직 망치들 사이의 무게 비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이는 6:8:9:12의 비율로 나타났다. 실제로는 망치가 내는 소리는 무게 비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피타고라스의 이야기를 사실로 받아들였는데, 수적 비례에 대한 확신 때문이었다.
플라톤은 몸과 영혼을 조절하는 조화에 대해 이야기했다. 혼과 우주는 음악으로 만들어졌고 따라서 음악의 수학적 조화는 우리 존재의 근원을 이룬다. 당시에는 천문학, 기하학, 대수학, 음악이 교육의 기본으로 여겨졌다. 천문학과 기하학, 대수학은 음악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Chapter 4: Hearing the Irrational
비에테는 미지수와 계수를 나타내기 위해 알파벳 기호를 사용했는데, 이러한 기호는 정수와 무리수를 모두 나타낼 수 있으므로, 두 분야를 통합하는 데에 기여했다. 고대인들 사이에서는 무리수가 실제 수인지를 놓고 논란이 있었다. 무리수가 없다면 실수의 영역을 다 채울 수 없다는 점에서 무리수는 실존하는 듯하지만, 무리수는 유리수와 알맞은 비를 형성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실제 수가 아닌 듯해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었다.
무리수는 음악과 관련이 깊었는데, 반음을 만들어 내기 위한 비율에 기하학적 비율, 즉 무리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많은 음악 이론가들은 무리수적 비율을 피하면서 이론을 구성했다. 하지만 정확한 반음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무리수가 필요했다. 이를 둘러싼 논쟁에서, 일부 이론가들은 무리수를 유리수와 다를 것 없이 취급했던 반면, 어떤 이론가들은 실제 음악에서는 무리수적인 음을 인정하되 수학적으로는 인정하지 않기도 했다.

Chapter 5: Kepler and the Song of the Earth
케플러는 우주의 음악적 조화에 대한 신플라톤주의 사상을 받아들이는 한편, 당시의 음악적 경향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이러한 영향은 그의 수학과 천문학 분야 연구에 영향을 끼쳤다. 그는 음악적 조화를 기하학과 연결시켰고, 당시의 다성 음악을 천문학적 연구와 연결시켰다. 그는 고대의 음악 이론을 비판했는데, 고대 이론과 달리 화음은 대수가 아닌 기하학을 통해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여섯 행성(, , , , , )은 운동을 통해 각자의 멜로디를 내며, 이들은 화음을 이룬다. 그는 이 음악이 실제로 들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수학적 질서로서 인식 가능하고 그런 점에서 음악과 비슷하다고 믿었다.

Chapter 6: Descartes’s Muscal Apprenticeship
아리스토텔레스는 수학이 물리학에 적용될 수 없다고 생각했으나, 베이컨이나 메르센 등은 물리학에 수학을 도입하려고 했다. 데카르트는 음악 이론에서 수학과 물리학의 결합을 보여주었다. 그는 음악의 수학적 요소들이 우리 정서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서도 연구했다.
그는 현의 진동과 음악적 수의 상관관계, 음정과 물체의 관계, 진동수 등에 대해 탐구했다. 또한 진공에 대한 연구와 빛에 대한 연구에서 음악적 요소들을 고려한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우주의 하모니에 대해 회의적이었는데, 태양이 수많은 별들 중 하나일 뿐이라면 태양계의 음악적 조화가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Chapter 7: Mersenne’s Universal Harmony
메르센은 보편적인 화음으로 우주를 이해하려고 했다. 그는 우주의 음악이 실제로 존재한도고 믿었으며, 천체에 대한 연구에서 음악적 용어를 사용했다. 그는 케플러의 모델에서 행성의 궤도 간 간격을 악보와 같이 생각했다.
그는 음악에 대한 연구를 통해 자연 전체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성경과 보편적 화음을 연관시키기도 했고, 현의 진동이나 장력과 음악의 관계에 대해 연구하기도 했다. 그리고 악기를 공기를 진동시키는 물체로 보고 다양한 악기에 대해 연구하기도 했다. 특히 종에 대해 관심을 가졌는데, 왜 종이 부서지지 않고 흔들리며 소리를 내는지에 대해 고대 원자론처럼 물질이 빈 공간을 갖는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Chapter 8: Newton and the Mystery of the Major Sixth

뉴턴은 음악적 비유를 사용하기도 했고, 음정과 색깔을 연결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음과 색을 연결시키는 일에는 난점이 있었는데, 수학적으로 잘 정립된 음과 달리 색은 그 구분이 애매했기 때문이다. 그는 스펙트럼을 음의 비례와 맞춰보려고 했지만 색의 구분이 자의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복잡한 수학적 조작으로 이 난점을 해결해보려고 하기도 했다.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
서문
성실한 관찰을 통해 천체 운동에 대한 기록을 수집하고, 천체 운동을 관측된 것과 같게 계산될 수 있도록 가설과 원인을 고안해 내는 것이 천문학자의 일이기 때문에 저자는 비난 받을 만한 일을 한 적이 없다. 가설들이 반드시 사실일 필요는 없고 관측 값과 맞는 계산을 할 정도면 충분하다.
주전원 이론은 불규칙한 겉보기 이론의 원인을 설명하지 못하며 진실이라기보다 계산의 정확한 토대를 위한 것이다.

교황 바오로 3세에게 드리는 서문과 헌정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 고정된 채 정지해 있다는 견해는 증명된 것이 아니다. 수학자들은 태양과 달의 움직임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1, 한 달의 크기 등에 대해 정확히 측정 못 함) 태양, , 다섯 행성의 운동에 대한 이론은 여러 가지가 난립하고 있다. 동심원만 사용하는 사람, 이심원과 주전원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섞여 있다. 그들의 이론에는 대칭성이 빠져있다. 문헌 조사 결과 지구가 운동한다는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있었다.
지동설을 가정한 결과, 행성의 모든 현상과 일치했고, 행성 궤도의 크기와 순서가 하늘 그 자체와 밀접하게 묶여 있어서, 어떤 부분도 나머지 부분이나 우주 전체와 분리되지 않는다.


1
우주는 아름다우며, 이를 연구하는 천문학은 가치가 있다. 또한 천문학은 유용한데, , , 일의 규칙적인 배치를 통해 국가의 각종 행사가 적절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리와 가정들에 대해 사람들 사이의 이견이 있고 정확한 관측 결과를 얻기 힘들다는 점은 천문학을 어렵게 만든다.

1장   우주는 구형이다: 구형은 가장 완전한 모양이며 가장 큰 용적을 가져 다른 것들을 포함하기에 적합하다.
2장   지구도 역시 구형이다: 여러 가지 근거가 있다. 위도에 따라 서로 다른 별이 본다는 점, 극점에서 같은 거리만큼 떨어진 어느 지역이든 천구 극점의 고도가 같다는 점, 동쪽에서는 저녁에 일어나는 일식, 월식을 감지 못하고 서쪽은 아침에 일어나는 일식, 월식을 감지 못한다는 점, 먼 바다에서 돌아오는 배는 돛대가 가장 먼저 보인다는 점 등이다.
3장   땅과 물은 어떻게 하나의 구체를 형성하는가: 물과 육지는 같은 중심을 향한다.
4장   천체의 운동은 규칙적이고 영원하며 원운동 또는 원운동의 혼합이다: 지구를 제외한 온 우주가 하루에 한 번 동쪽에서 서쪽으로 운동한다. 태양, , 다섯 행동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운동한다. 행성의 운동은 일주운동의 극이 아니라 황도 위를 운동한다. 태양과 달은 빨리 갈 때도 있고 느리게 갈 때도 있다. 다섯 행성은 역행 운동을 한다. 행성들은 황도를 헤매면서 빗겨 지나가고, 지구에 더 가까워 질 때와 멀어질 때가 있다. 이러한 운동은 원운동 또는 그 혼합에 의해 규칙적으로 일어난다. 불규칙한 운동은 단일 원운동으로 설명될 수 없다.
5장   지구는 원운동을 하는가? 그리고 그 위치는?: 우주 전체가 아니라 지구가 움직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왜 담긴 것이 아니라 담은 것이 움직여야 되고, 왜 장소에 놓여진 물체가 아니라 장소를 제공하는 것이 움직여야만 하는 걸까?” 지구와 행성들의 거리가 변하는 것은 행성의 운동의 중심이 지구가 아니라는 증거이다.
6장   지구의 크기에 비한 하늘의 광대함에 관하여: 지평선은 천구를 이등분하는데, 이는 하늘의 크기가 지구보다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크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구를 이등분하는 원은 구의 중심을 통과하며, 이런 원은 구를 자르는 원 중 가장 큰 원이기 때문이다.
7장   고대인들은 왜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 정지해 있다고 생각했는가: 무게를 가진 모든 것은 중심으로 움직인다. 지구는 가장 무거운 것이므로 중심에 위치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단순한 운동에는 직선운동과 원운동이 있는데, 직선운동은 네 원소에 부여하고 원운동은 천체에 부여하는 것이 적절하다. 프톨레마이오스에 따르면 지구가 움직이면 매우 빠를 것이고 따라서 맹렬하게 소용돌이치며 물체들이 흩어지게 한다. , 자유낙하하는 물체나 공중에 떠다니는 물체는 모두 서쪽으로 향하게 된다.
8장   전술한 이유들의 불충분함, 그리고 반론: 지구가 도는 것이 자연스럽다면 어차피 흩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우주는 지구보다 더 크기 때문에 우주는 훨씬 더 빠른 속도로 움직여야 된다. 속도는 크기를 무한히 증가시키고 크기는 속도를 무한히 증가시킨다. 한계를 알 수 없는 우주보다는 형태를 알고 있는 지구에 적합한 운동을 부여하는 것이 더 낫다. 일주운동은 지구가 움직이는 건데 다른 것은 상대적일 뿐이다. 지표 근방의 공기가 떠있는 것, 지표와 멀리 떨어진 공기가 천체의 운동을 따른다는 것은 지동설의 근거이다. 여러 가지 운동이 지구로부터 발생할 수 있는가와 우주의 중심에 대하여: 행성의 운동이 불규칙하게 보이고 지구와의 거리가 변하는데, 이것은 지구가 회전의 중심이 아니기 때문이다. 중력 또는 무거움이 다른 천체들에도 존재하여 원 모양으로 모일 수 있도록 한다. 지구가 운동을 한다고 보면 태양, 행성의 여러 현상들을 설명할 수 있다.
9장   수성과 금성은 다른 행성들과 다른 움직임을 보이기 때문에 당시에는 여러 이론이 난립하였다. 지구가 중심이 아니라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지구를 우주의 중심에 놓으려고 한다면 수많은 구로 이론을 혼란스럽게 만들게 되므로, 이것(지구의 운동)을 인정하는 것이 훨씬 쉽다고 생각한다.”. 항성구, 그 아래 토성, 목성, 화성, 지구와 월구, 금성, 수성의 궤도가 위치한다. 항성은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연주운동을 감지할 수 없다.
10장 지구의 세 가지 운동의 증명: 자전, 낮과 밤, 항성구의 겉보기 운동. 공전, 황도의 겉보기 모양, 기울기 설명. 적위의 운동.


논평: 코페르니쿠스에 대해서는 지동설을 처음으로 체계적으로 정립한 사람 정도로 피상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저작을 직접 읽으면서 그의 체계가 순수하게 수학적인 고려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자연철학적 고려도 있었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당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던 자연철학적 지식을 어느 정도 알고 있어야 코페르니쿠스의 문제의식과 논의 전개에 대한 이해가 쉬울 것 같다.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서문을 쓴 오시앤더는 코페르니쿠스가 하나의 가설을 제시한 것뿐이라고 했는데, 본문에서 나오는 코페르니쿠스의 어조는 지동설을 확신하는 듯했다는 것이다.




Astrology
점성술은 17세기-18세기에 자연 지식이 아니게 됐다. 좀 애매학니 하지만. 14세기부터 중세와 르네상스기 유럽에서 예술과 과학 커리큘럼의 중요한 일부로 다루어졌다. 다양한 학문에 걸쳐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이렇게 점성술화하는 것은 뉴턴 이전 자연 지식을 해석하고 분석하는 근본적인 패턴을 제공한다. 따라서 당시 자연 지식의 이해에 필요하다. 천문학, 수학, 자연철학의 통합이었던 점성술이 왜 거부되었는지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15-16세기에 Mirandola와 코페르니쿠스의 저작이 점성술의 거부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학자도 있지만, 갈릴레오와 케플러가 계속 점성술 짓을 해댄 것을 보면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Astrology Cira 1500: Intellectual and Institutional Structures
1500년 전후에 점성술 교수들은 정해진 교육과정을 가르치는 것에 더하여, 공개적으로 일 년에 최소 세 번의 점성술 논쟁을 하고 예언을 하며, 그 밖의 다른 점성술 서비스를 제공하도록 법으로 정해져 있었다. 프톨레마이오스에 따르면 천문학은 천체의 운동을 수학적으로 연구하며 확실한 과학이었다. 한편 점성술은 천체들이 지상에 미치는 영향을 탐구했으며 천문학만큼 확실하지는 않았다.
Albbertus Magnus를 비롯한 유럽 학자들은 13세기 무렵에 점성술을 자연 철학의 한 분야로 정립했다. 점성술은 수학, 천문학,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자연철학 및 의학과의 연관 하에서 교육되었다. 15세기에 Johannes Regiomontanus는 천문학 강좌에서 점성술을 수학의 여왕이라고 이야기했다. 당시에 점성술은 여러 대학에서 가르쳐졌고,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자연철학 교육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했다.

Astrological Reforms
Pico 등 점성술을 비판한 사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갈릴레오, 케플러, 티코 브라헤, 베이컨 등 많은 뛰어난 학자들이 점성술을 옹호했다. 티코 브라헤와 케플러는 천문학으로 점성술을 개혁하려고 했고, 베이컨은 점성술이 잘 작동되도록 하는 규칙을 제시하기도 했다.

The Fate of Astrology
많은 학자들이 점성술을 개선해보려고 했지만, 결국 18세기 이후 점성술은 몰락한다. 이 과정은 완전히 해명되지 않았지만, 이에 대한 좋은 접근법 중 하나는 학문의 분과 구분과 그것이 대학 교육과정에 어떻게 반영되는지 알아보는 것이다.
점성술이 천문학에서 분리된 중요한 순간은 예수회 수학 교과서에서 점성술을 명시적으로 제거한 것이다. 그 밖에도 옹호하는 사람들과 배척하는 사람들이 공존하면서 점차 점성술은 제거되기 시작한다.

The Eighteenth Century and Beyond
점성술은 점차 지적 영역에서는 사라졌지만, 여전히 신비주의적인 영역에서는 남아있다.

논평:
과학철학통론에서 점성술의 사례를 통해 구획 기준의 문제를 논한 논문들을 여러 편 읽어보았다. 포퍼는 점성술이 반증 가능한 예측을 내놓지 않기 때문에 과학이 아니라는 주장을 했다. 쿤을 비롯해 라카토슈나 태가드 같은 철학자들은 점성술이 과거에는 과학이라고 불릴 만한 특징들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과학이었으나, 그런 특징을 잃어버린 현재에는 과학이 아니라고 이야기했다. 이런 논문들을 읽으면서 내가 점성술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있었으면 이들 철학자들의 주장을 더 잘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들었었다. 그래서 이 글을 읽으면서 점성술이 과거에 어떤 면에서 과학이라고 불릴 만 했는지, 지금은 왜 그런 특징들을 잃어버렸는지 알게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이 글은 점성술을 둘러싸고 일어났던 일들을 그대로 기록하기만 하고 있어서 실망스러웠다. 케플러, 베이컨 등 위대한 학자들도 점성술을 신봉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그들이 왜 그랬는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없다. 또한 점성술이 점차 지적 영역에서 사라진 이유에 대한 분석도 거의 없다. 단순한 역사적 사실을 나열하기보다는 왜 그런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설명했으면 훨씬 좋았을 듯하다.


Kepler: Moving the Earth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 프톨레마이오스주의 천문학의 불일치는 많은 중세인들을 후자가 단지 계산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기게 만들었다. 코페르니쿠스와 케플러가 직면했던 문제가 바로 이것이다. 수학적으로 표현된 천문학이 지구가 정말로 돈다는 점을 뒷받침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코페르니쿠스는 그는 설명할 수 있지만 프톨레마이오스는 설명하지 못하는 행성의 운동을 지적했다. 케플러는 여기서 더 나아가, 행성계에 대한 자신의 이론이 왜 행성이 이와 같이 도는지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1.     Two Astronomies
그리스 천문학이 재번역되면서, 천문학의 호환 불가능한 두 모델, 즉 아리스토텔레스의 동심원 모델과 프톨레마이오스의 주전원/이심원 모델이 충돌하게 되었다. 전자는 직관적으로 타당한 듯하나 계산은 후자가 정확하다.
불일치를 해결하는 한 방법은, 목적에 따라 두 가지 모델 중 하나를 골라 쓰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부당해 보이며, 따라서 수학적 정확성에 무게를 두느냐, 아니면 자연철학에 무게를 두느냐의 선택지만이 남아있다.
Ibn al-Haytham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을 거스르면서 관찰 결과에 맞는 프톨레마이오스식 모델을 구성했다. Ibn Rushd도 처음에는 프톨레마이오스를 따랐으나, 나중에는 이를 거부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식의 동심원 모델을 기본으로 하되, 프톨레마이오스식 모델의 몇 가지 요소를 더했다.

2.     Copernicus
코페르니쿠스의 체계는 프톨레마이오스의 것에서 중심을 태양으로 바꾼 것에 불과한 것처럼 보인다. 코페르니쿠스는 본인의 체계가 실재를 잘 반영한다고 생각한 듯하다. 그 근거로 그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제시했다. 첫째, 행성의 순서를 애매함 없이 정할 수 있다. 둘째, 행성의 역행 현상을 자연스럽게 설명할 수 있다
코페르니쿠스는 우주의 조화를 믿었지만, 쿤은 이러한 조화가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코페르니쿠스의 체계는 프톨레마이오스의 것보다 실용적이지 못하며, 다만 미적으로 더 나을 뿐이다.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선택하는 일은 단지 취향의 문제다. 하지만 이 논문의 저자들은 쿤의 관점에 동의하지 않으며, 코페르니쿠스의 체계가 인식론적으로 우월하다고 반박한다.
코페르니쿠스의 체계는 수성과 금성이 왜 태양과 멀리 떨어져 나타나지 않는지를 설명한다. 반면에 프톨레마이오스의 체계에서는 이러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ad hoc이 필요하다.
코페르니쿠스는 행성이 왜 이대로 운동하는지에 대해서는 그다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는 이것을 물체들의 자연스러운 운동 경향으로 설명한다.

3.     The Mysterium Cosmographicum
아리스토텔레스의 천문학은 행성의 운동이 천체의 운동에 의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케플러는 행성의 운동에 대해 물리학적 설명을 제시한다. 신의 표상인 태양이 운동의 원천이다. 그는 외행성의 역행 현상을 자연스럽게 설명했고 운동의 원인도 설명했다. 그런데 그는 코페르니쿠스 체계가 옳다는 또 다른 근거를 제시한다. 그것은 행성들의 궤도가 신플라톤주의에 부합한다는 것이었다.

4.     Apologia pro Tychone contra Ursum
케플러는 자신의 이론이 단지 현상을 구제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를 확실히 반영하고 있다는 점을 보이기 위해 티코 브라헤의 관측 자료를 원했다. 그래서 그는 티코 브라헤와 대립하던 Ursus를 비판하는 글을 썼다. 하지만 그 사이에 Ursus와 티코 브라헤는 모두 죽었다.
Ursus는 가설은 실재를 반영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반면에 케플러는 가설이 실재와 부합하는지 여부를 평가할 수 있다고 보았다. 기하학적 가설은 현상을 구제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천문학적 가설은 물리학적 고려를 통해 실재를 반영한다.

5.     Astronomia Nova
케플러는 행성의 움직임이 물리학적 과정이기 때문에, 결국 물리학의 용어로 설명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가 행성의 궤도를 타원형으로 본 것은 매우 뛰어난 성취이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은 수학과 물리학을 엄격히 구분했지만, 케플러는 물리학이 수학을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고 보았다.
케플러의 목표가 운동 원인의 발견과 인과적 설명이라면 그는 실패했다고 할 수 있지만, 그 원인들의 역할에 대한 그의 제안은 새로운 천문학을 가능하게 한 큰 성과였다. 운동의 원인에 대한 그의 설명은 왜 천체들이 태양과의 거리에 따라 속도가 달라지는지 잘 설명했다. 코페르니쿠스의 체계가 아니었다면, 이러한 설명은 엄청나게 복잡해졌을 것이다.

6.     A Celestial Physics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은 지상에 있는 물체의 무게와 천체의 원운동은 각자의 본성에 따른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케플러는 힘 개념을 기반으로 하는 설명을 제공했다.
물론 케플러의 힘 개념은 석연치 않은 점이 있었다. 먼저 그는 힘에 대해 소용돌이(whirlpool)의 메타포를 사용했는데, 이것은 현상과 잘 맞지 않았다. 그러나 자석에 대한 메타포는 행성의 궤도가 타원이 되는 원인을 잘 설명했다.

7.     Moving the Earth
케플러는 자신이 그럴듯한 것과 필연적인 것을 혼합하고 거기에서 가능한 결론을 이끌어냈다고 말했다. 확고한 근거로 지지되지 않는 가정들이라도 이리저리 시도해봄으로써 진상을 밝힐 수 있다. 그러한 가정들은, 잠정적인 참으로 다루어져야 한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주의 물리학의 연역에 기반한 방법은 매혹적이지만 새로운 천문학에는 맞지 않다.

논평: 케플러의 업적이 단순히 현상을 잘 설명하는 이론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잘 보여준 글인 것 같다. 이론과 실재의 관계, 그 관계를 평가하는 기준, 이러한 쟁점과 얽힌 인과적 설명, 기존 과학을 넘어서는 새로운 방법론 등 근대 과학의 형성에 케플러가 끼친 영향을 잘 알 수 있었다.


Training the Intelligent Eye: Understanding Illustrations in Early Modern Astronomy Texts

I.              Sphaera and Theorica Texts
13세기 유럽에는 아리스토텔레스와 프톨레마이오스를 비롯한 고대 그리스의 저작들이 아랍에서 역수입되던 시기였다. De sphaera는 이 시기에 쓰이던 입문용 교재이다. 한편 Theorica planetarum은 수학적 모델과 전문 용어를 통해 행성 운동을 설명하던 교재로, 하늘에 관측된 행성들의 2차원적인 움직임에 대한 설명을 주로 담고 있다.

II.             Images and Natural Knowledge in Early Modern Europe
다른 장소와 다른 시간에서 그려진 과학 이미지는 비슷해 보일지라도 완전히 다른 뜻을 담고 있는 경우가 있다. 과학 이미지를 이해하기 위해 역사가들은 당시의 인식론적, 형이상학적 전제들을 이해해야 한다.
중세 말에서 근대 초에 걸쳐 유럽에서는 투시도법이 개발되었는데, 투시도법은 시간을 추상적, 동질적, 수학적으로 이해하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세계관과 연관이 있다. 투시도법의 개발은 유럽 과학, 기술의 발전의 전제조건이자 촉매제 역할을 했다고 주장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각과 이미지를 지식의 획득에 있어 중요하게 여겼다. 시각은 인지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차지한다.
Sphaera Theorica의 이미지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5세기 당시 독자들의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당시 이탈리아인들은 다양한 기하학적 모양들의 부피를 계산하는 법을 배웠다. 이러한 훈련 덕에 그들은 Sphaera Theorica에 담긴 이미지들을 보며 그 모양을 이해했을 것이다.
한편, ‘자연주의적이미지와 실재주의적이미지의 구분이 필요하다. 전자는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는 것을 말하고, 후자는 눈에 보이는 것과 다르더라도 대상의 구조를 이해할 수 있도록 그리는 것을 말한다.

III.           Sphaera Image
이 책의 1482년 표지는 당시 교육에서 천문학의 위치와, 천문학 교육에서 이미지의 역할을 보여준다. 여기에는 뮤즈, 프톨레마이오스, 의인화된 천문학이 그려져 있다. 위쪽의 하늘은 자연주의적으로 조화롭게 그려져 있고, 아래 부분과는 경계 지어져 있다. 이러한 모습은 당시 천문학의 연구가 신의 섭리를 탐구하는 것으로 여겨졌음을 보여준다.
한편 이 책에서 구(sphere)는 두 가지 방식으로 설명된다. 한 가지는 반원을 360도 돌렸을 때 나타나는 도형이라는 설명이고, 다른 하나는 원 위의 모든 점은 중심에서 같은 거리에 있다는 설명이다. 전자에 대해서는 반원이 그려져 있어 독자들이 이것을 통해 원의 이미지를 상상하도록 하고, 후자에 대해서는 여덟 방향의 지름이 표시된 원이 그려져 있어 2차원적 원 개념을 3차원적 구 개념으로 확장된 이미지를 그리게 한다. 이는 천문학에 필요한 지성적 시각을 훈련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밖에도 점, 직선, 곡선, 평면, 피라미드, 큐브 등과 같은 다양한 도형들이 제시되어 있다. 이러한 훈련들을 통해 독자들은 더 고급 교재인 Theoria 학습에 필요한 능력들을 갖추게 된다.
Sphaera에서 어떤 이미지들은 자연주의적으로 그려진 동시에 추상적 상황을 표현하기도 했다. 지구가 둥글다는 점을, 먼 바다에서 돛대를 보는 상황을 통해 설명하는 그림이 그 한 예이다. 그림들의 세부사항은 자연주의적으로 그려져 있지만, 전체적인 도식은 추상적이다.
한편 천구를 표현할 때 평면적인 원으로 그린 그림들이 있는데, 겉모습만 보고 이것이 행성의 궤도 개념을 나타낸 것이라고 해석하면 안 된다. 당시 사람들은 행성이 천구에 위치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따라서 독자들은 이런 그림을 보면 3차원적 천구의 이미지를 떠올렸을 것이다.
천문학에서 기하학적 사고는 17세기까지 중요하게 여겨졌다. 케플러는 Sphaera의 일러스트를 그의 책에서 사용하기도 했고, 코페르니쿠스나 갈릴레오는 그들의 천문학을 표현할 때 기하학적 이미지를 자주 사용했다.

IV.           Theorica Images
Sphaera에서의 다소 단순화된 그림들과는 달리, Theorica에서는 좀 더 복잡하고, 관찰 사실에 좀 더 부합하도록 고안된 그림들이 등장한다. 때로는 한 모형을 설명하기 위해 여러 개의 그림을 동원해 통합적인 이미지를 상상하도록 한다.

논평: 천문학 연구에 대수적 방법보다는 기하적 방법이 쓰일 때 그림이 많이 들어간 교재를 통해 훈련을 시켰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쿤은 정상과학 시기에 젊은 과학자들은 그 패러다임에 맞는 연습문제들을 풀면서 그 패러다임의 개념과 적용 방식을 익힌다고 말했다. 이 책들의 경우 쿤 식으로 말하면 기하학적 천문학 패러다임 하에서 젊은 과학자들을 훈련시키기 위한 연습 문제들을 제공한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Copernicus as Natural Philosopher

코페르니쿠스를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로 보는 시각이 있는데 이는 코페르니쿠스가 천구 개념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은 이런 의견에 반대하는데, 운동과 원소에 대한 코페르니쿠스의 설명이 아리스토텔레스와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저자는 ㅗ페르니쿠스의 자연철학적, 물리학적 관점이 140년 후 뉴턴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본다. 코페르니쿠스이 우주론에서 필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원리들이 나타난다고 해도, -아리스토텔레스적인 해결책을 예견한다고 보는 것이다.
포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에 반해 지구에 움직임을 할당하게 한 것은 무엇인지 코페르니쿠스는 명백하게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는 완벽한 통일성과 순환성을 가진 기하학적 모델로 천체 현상을 설명하길 원했다. 그러한 모델로 설명해서 문제들이 남아있었지만, 그가 자신이 옳았다고 믿게 만들 요소가 있다는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코페르니쿠스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여러 가지 가정들을 기각했지만, 원리 자체를 기각하지는 않고 수정해서 지동설에 수용했다. 지구가 움직인다는 가설은 분명 반-아리스토텔레스주의지만, 당시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는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 변형이 나타나 있는 상태였다. 이러한 다양한 형태의 천동설에서 자연, 원소 운동, 천구, 천체의 속성 등 새로운 우주론과 맞는 것들을 코페르니쿠스가 자신의 지동설을 구성하는 데에 사용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도,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도 별다른 거부감이 없었던 듯하다.

당시의 자연철학에 따르면 원운동은 직선운동보다 완벽하다. 구형인 것은, 항상 자발적인 것은 아니지만, 원운동을 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천구의 운동은 행성천구의 운동에 의해 일어난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체계에서 상대적 운동들, 즉 지구가 움직이는지 천구가 움직이는지 중에서 한 가지로 결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연적이라는 말이 무엇인지에 대해 재정의가 필요하다.



데카르트, 『광학
데카르트는 눈이 잘 기능하기 위한 네 가지 조건을 제시하고, 렌즈를 통해 그런 조건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방법들을 제시한다.
1.     시신경의 말단을 향해 이동하는 모든 광선들은 가능한 한 대상의 한 지점으로부터 와야 하고, 대상과 눈 사이의 공간에서 어떠한 변화도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 근시, 원시가 이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경우인데, 렌즈를 통해 상이 눈 속에 맺히는 위치를 앞뒤로 조절하는 방법을 제안한다.
2.     이미지는 매우 커야 한다: 렌즈를 통해 상의 크기를 조절하는 법을 제안한다.
3.     이미지를 형성시키는 광선들은 시신경 섬유들을 자극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강해야 한다: 광선의 세기가 너무 강한 경우(태양빛 등) 작은 구멍이 뚫린 검은 물체를 눈 앞에 두기, 베일이나 투명한 물체를 통해 바라보기를 제시한다. 너무 약한 경우 태양광선에 대상을 노출시킨 후 거울이나 돋보기로 대상 자체를 훼손시키지 않을 만큼의 세기로 빛을 비추는 것을 제안한다. 또는 망원경을 이용할 수 있다.
4.     대상을 한 번 힐끗 보는 것만으로도 그 대부분을 알아볼 수 있으려면, 가능한 한 많은 대상의 이미지가 우리 눈에 동시에 형성되어야 한다: 여러 대상을 바라보는 능력은 주목하고자 하는 대상을 여러 물체들 사이에서 발견하려고 시도할 때 유리하다. 하지만 기술로 향상시킬 여지는 별로 없다.
쉬어가며: 수정체나 동공의 모양도 근육에 의해 조절되는 것이기 때문에 훈련을 통해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인공기관을 이용하는 광학의 영역이 아니다.
여덟 번째 담화 광선을 시각에 유용한 방식으로 굴절시키기 위해서 투명체가 가져야 하는 모양에 대해
타원의 정의와 몇 가지 기하학적 특성들을 설명한다. 그 뒤, 타원이 투명체라고 할 때 굴절되는 방향에 대해 설명한다. 이러한 기하학적 특성을 반영해 목적에 맞는 다양한 종류의 렌즈를 만들 수 있다.






갈릴레오, 『대화
본문 앞 해설: 『대화』의 혁명성은 자연을 수학화는 전통을 수립했다는 데에 있었다. 갈릴레오는 기하학을 사용해서 경사면 운동을 기술했고, 저항이 없는 표면에서의 운동과 같은 이상적, 수학적 공간을 상정해서 관성의 운동을 설명했다. 그는 이러한 설명을 토대로 코페르니쿠스의 천문학이 던졌던 역학적 문제들을 하나씩 설명했는데, 자연을 추상화하고 수학화하는 근대 물리학의 전통은 이 대화로부터 시작했다.
대화 둘째 날 지구의 자전
천동설을 지지하는 여러 근거들이 제시되고 논박된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이 천동설 지지 근거로 많이 등장하는데, “아리스토텔레스의 과학 법칙들 중 상당수는 틀린 정도가 아니라 사실과 정반대”(93)라고 표현하며 많은 경우 반박될 수 있음을 주장한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이 실제로 경험해볼 수 있는 수많은 사례들이 동원된다
예를 들어 탑에서 떨어뜨린 물체가 탑 바로 아래에 떨어지는 것은 전통적으로 천동설의 강력한 지지 근거라고 생각되었다. 지구가 움직인다면, 물체가 떨어지는 동안 위치가 달라져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갈릴레오는 이 논증에서 물체가 직선 운동만을 한다는 검증되지 않은 가정을 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전 지구가 자연스럽게 원운동을 한다면, 물체도 지구의 일부이므로 낙하 운동과 동시에 원운동을 할 수 있다.
한편 갈릴레오가 관성의 법칙을 사고 실험을 통해 유도해가는 과정이 과학 교과서에는 잘못 실려 있음도 발견할 수 있었다. 과학 교과서에서는 마찰 등의 변수가 없는 이상적인 상황에서 내리막에서 공을 굴리면 반대편 오르막에서 공의 원래 위치까지 내려가는데, 만약 반대쪽에 오르막이 없이 평평하면 공이 영원이 굴러간다고 갈릴레오가 사고 실험을 했다고 나와있다. 나는 내리막을 내려온 공이 반대편 오르막에서 원래 위치와 같은 높이까지 올라간다는 근거가 없으므로 이것이 엄밀한 사고 실험이라고 할 수 없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갈릴레오가 실제로 말한 것은 내리막이 이어지는 경우 계속 가속되고, 반대로 내리막 뒤에 오르막이 있는 경우 감속되므로, 그 중간인 평면이라면 똑 같은 운동이 계속 지속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넷째 날
전날에는 지구가 움직인다는 사실을 천체 현상에서 유추해 냈다면, 넷째 날에는 밀물과 썰물이 지구 운동의 근거가 될 수 있음을 설명한다. 밀물과 썰물에는 세 주기가 있다. 매일매일의 조수 현상(조수 현상이 일어나는 근본적인 이유), 한 달 주기(조수의 크기를 바꿈, 달과 관련), 1년 주기(조수의 크기 바꿈, 해에서 유래). 갈릴레오는 이 중 매일매일의 조수 현상이 지구 운동의 근거가 될 수 있다고 한다.
지구의 운동으로 밀물과 썰물이 생기는 이유는, 명시적으로 이렇게 표현하는 것은 아니지만, 관성의 법칙 때문이다(관성의 원인에 대해서는 아직 임페투스 이론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지구가 가속되거나 감속되는 경우 물이 한 쪽으로 쏠리기 때문이다. 이러한 감속 효과는 공전과 자전이 함께 작용하면서 나타난다.



갈릴레오, 『새로운 두 과학
셋째 날 이야기
갈릴레오는 운동의 종류를 등속운동, 가속운동, 강제된 운동과 포물선운동 세 가지로 분류한다. 먼저 등속 운동에 따라 나오는 여러 결과들에 대해 설명한다. 사실 v=s/t라는 공식 하나로 다 설명되는 내용인 것 같지만, 갈릴레오는 기하학적 방법으로 증명한다.
그 뒤 가속 운동, 정확히 말하자면 자연스러운가속 운동에 대한 설명이 이어진다. 가속 운동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는데, 가장 자연스러운, 따라서 간단하고 분명한 방식으로 일어나는 것은 일정한 정도로 속도가 증가하는 가속 운동이다. 이러한 운동은 a=v/t로 표현될 수 있고, 등속 운동과 마찬가지로 갈릴레오는 여기서 파생되는 결과들을 기하학적으로 증명한다.




The “Rational” Descartes and the “Empirical” Galileo
데카르트는 갈릴레오의 이론에 대해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였고, 여러 부분에 대해 반대한 듯하다. 그런데 데카르트는 갈릴레오의 자유 낙하 법칙을 자신도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자유 낙하 법칙의 초기 형태는 모순적이었다. 거리에 비례해 속력이 오르는 것과, 시간의 제곱에 비례해 거리가 증가하는 것은 모순되지만, 데카르트는 이를 알아채지 못했고 갈릴레오도 나중에 알아챘다. 1618년에 데카르트는 아직 자유낙하법칙의 정확한 정식화를 하지 못했고, 관성의 법칙에 대해서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관성의 법칙이 운동의 보존이 아니라 힘의 보존이라고 생각했고, 가속도가 아닌 속도가 힘에 비례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일정한 힘이 계속 주어지면 물체는 일정한 속도로 움직인다고 생각했다.
자유낙하하는 물체가 점점 더 빨라지는 건 지구에 가까워질수록 힘이 더 크게 작용해서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같은 원리를 추의 운동에 적용하는 것에 대해 혼란스러워했다 그는 임페투스 이론 내에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했는데, 여전히 실제 현상과 맞지 않았다. 그는 1634년에 가서 갈릴레오의 대화에서 자유낙하의 법칙을 찾아냈다고 말했다.
데카르트의 물리학은 1630년 전후로 크게 바뀌어서 자유낙하 운동을 완전히 다르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특히, 중력을 일정한 것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는 진공의 개념을 버리고 수학적으로 중력을 다루려고 했는데, 그의 소용돌이 이론 내에서 낙하 운동을 설명하기에는 수학적 정식화가 어려웠다.
데카르트는 갈릴레오의새로운 두 과학에서 나타나는 경험적 연구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자기 이론이 갈릴레오에게 빚진 것은 없으며 음악에 대해서는 오히려 갈릴레오가 자신의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갈릴레오는자연의 책은 수학의 언어로 쓰여 있다라는 말을 남길 정도로 자연을 연구할 때 수학을 중시했다. 하지만 데카르트는 본인이 뛰어난 수학자였음에도 물리적 실재를 이해하는 것과 그것의 기하학적 구조에 대한 지식을 동일시하지 않았다. 데카르트는 갈릴레오가 경험주의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갈릴레오는 데카르트의 생각보다는 덜 경험주의적이었고 수학적 개념을 많이 사용했다.
한편 이동 거리와 속력의 관계에 대해, 데카르트는 이들을 분리할 수 있다고 보고 갈릴레오는 상호 교환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 경우 데카르트의 분리가 개념적 명확성에 기여했으니 여기서는 합리적인 데카르트가 경험적인 갈릴레오를 이겼다고 볼 수 있다.




그리스 사상과 아랍 문명
-마흐디와 그의 아들들: 사회, 종교 담론과 번역 운동
아리스토텔레스의 『토피카』는 전문적인 내용을 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칼리프가 번역을 원한다는 의사를 표현했을 정도로 10세기 이슬람 세계에서 많은 관심을 끌었다. 이것은 논증, 토론의 방법을 담고 있는 이 책이 당시 이슬람 사회 상황에 중요했기 때문이다.
압바스 왕조는 이슬람의 보편주의적 주장에 기초해 세워졌다. 그 결과, 이슬람은 우마이야 왕조 때와는 다르게 이교도들에게 개종을 적극적으로 요구하게 바뀌었다. 이는 다른 종교, 종파들의 반발을 일으켰고, 특히 기독교와 관련하여 아랍어로 쓰인 문헌이 급증했다. 기독교인들은 오랜 교리 논쟁을 겪었기 때문에 논증 및 반박 기술에 익숙했다. 이에 대처하기 위해 알-마흐디는 『토피카』의 번역을 원했다.

종교 간 담론의 필요성: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과 초기 신학
이슬람교도들 사이에서 신학적 논쟁이 처음 시작된 것은 번역 운동 이전 이슬람교 첫 100년 동안이었다. 이 시기 정치적, 사회적 발전의 결과로서, 계승의 정통성, 지도력과 신앙의 관계, 불신앙의 문제 등 현실에 관련된 신학이 연구되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신학은 점차 추상적 문제를 다루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이원론, 즉 원자론적 우주관을 가진 이슬람 내 종파였다. 이들의 원자론적 우주관에 대항하기 위해 이슬람 학자들은 고대 그리스의 문헌을 번역하고 이용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은 이러한 문헌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응용 지식과 이론 지식에 도움이 되는 번역
점성학에 대한 요구
특정 학문 분야에 대한 번역은 정치적 고려, 이데올로기적 또는 이론적 지향, 또는 실용적 요구 때문에 시작되었다. 그러다 그 분야의 아랍어 저작이 나타나고, 그 주제에 대한 연구가 계속 발달하여 이미 이용 가능한 텍스트의 더 정확한 번역과 새로운 텍스트의 번역에 대한 요구가 생겨났다. 이러한 과정은 번역 운동의 추동력이었다. 특히 점성학은 실용적 목적과, 이론에 대한 학자들의 관심 때문에 그 발전이 가장 두드러지게 일어난 분야이다.
전문 교육에 대한 요구: 행정서기, 상속변호사, 토목기사, 경제학자
행정 서기, 상속변호사, 토목기사, 경제학자 등에게는 수학과 그 실용적인 응용 능력이 필요했다. 이로 인해 기하학(토지 측량 등), 대수학(법의 세부사항 등) 등 수학 저작의 번역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직업 교육에 대한 요구가 번역운동의 확대에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연금술과 압바스 왕조 국가의 경제
과학 연구와 이론 지식에 대한 요구
제국의 이데올로기적 요소를 보완하기 위한 응용 연구에 대한 요구가 처음부터 번역운동의 기초에 자리잡고 있었다. 공식 정책의 발전은 제도적 지원을 제공하고 과학활동에 중심점을 제시하였다. 전문가들은 연구와 응용에 대한 요구를, 이러한 정책에 의해 깨닫게 된다. 이런 전문가들의 요구가 번역운동에 동력을 부여했다.
의학의 필요성에 대한 요구도 있었으나 해부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아 자체적인 발전에는 한계가 있었다. 갈레노스 해부학 책들이 번역된 것은 이러한 이유이다.
철학은 실용적이지 않았으나, 이슬람 학자들은 사회적으로 관련 있는 용도를 찾아내었다. 여러 학문들에 박식한 사람들이 고대부터 전해오는 학문들을 습득하고 완성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는, 지식 발전의 연구 프로그램을 발전시켜 나간 것이다. 철학의 정밀한 논증은 이러한 프로그램에 필요했다. 한편으로 신학적, 종교적 논의에 철학을 응용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번역과 역사: 번역운동의 결과
번역운동의 끝
번역 운동은 200년에 걸쳐 흐름이 유지되다가 기원후 1000년을 전후해 끝났다. , 학문에 대한 관심이 약화되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학문은 계속 번성하였다. 그보다는 그리스의 핵심적인 텍스트들의 번역, 연구, 주석 작업이 오래 전에 거의 다 이루어졌으며, 최신 연구에 대한 요구가 생겨난 것이 그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번역운동에 대한 그 시대의 반발
우마이야 왕조를 지지하던 사람들은 번역 운동에 반발했다. 이러한 반발은 이슬람 정통이나, 이성과 신앙의 대립 때문이 아니었다. 먼저 이슬람 정통이라고 할 만한 것을 단순하게 특징짓기 어렵다. 또한, 당시 이슬람 세계에서 이성과 신앙은 양립 가능한 것이었다.
따라서 번역된 학문, 쿠란과 관련된 전통 학문의 대립 구도는 알-마문의 미흐나 정책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이것이 번역 운동에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영향을 주지는 않았다. 전통주의자들이 반대한 것은 철학적 신학과 그 방법인 변증법적 논박에 대한 것이지, 번역된 외국학문이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이슬람 이전 및 이후 아랍인들의 성취가 그리스인의 성취보다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했으며, 그리스 학문 자체를 배제하는 것은 아니었다.

후대에 남긴 유산: 아랍 철학과 과학, 그리고 그리스 과학에 대한 이슬람의 반대라는 신화
낡은 이슬람 정통이 번역된 그리스의 과학, 철학 전통에 반대했다는 관념을 그릇된 것이다. 먼저, ‘정통이라는 말에 문제가 있다. 수니파 이슬람에게는 중앙집권적인 종교적 권위에 의해 법제화되어 존재했던 전통이 없었다. 지배 세력이 옹호하는 견해가 있었을지라도, 그것이 다수의 견해와 동일하다고 보는 것은 잘못이다.
또한 그리스 학문에 대한 적대의 모든 원인이 종교적이거나 정통적 입장인 것도 아니었다. 낡은 정통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곳에서도 고대 그리스 학문이 번창하기도 했다. 고대 그리스 학문은 천문대의 건립으로 제도화되기도 했다.
한편 15세기에서 18세기까지 오스만 제국에서도 그리스 문헌에 대한 번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해외 유산: 번역 운동과 9세기에 등장한 최초의 비잔틴 인문주의
8세기에 이슬람 세계와 비잔티움 제국에서 그리스어 문헌에 어떻게 접근할 수 있었는가? 비잔티움 제국에서는 책값이 매우 비쌌으며, 도서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별로 없지만 주요 장서는 수도원, 고위 공직자의 서재, 개인 서재 등에 있었다. 이 시기는 고전 문화의 암흑기라고 할 수 있다.
9세기에는 비잔티움 르네상스라고 할 수 있는 흐름이 있었는데, 비잔티움 사람들이 이슬람 세계의 학문 활동과 번역 운동을 알게 된 것이 한 원인이었을 것이다. 800년경 그리스어 필사본들이 비잔티움 제국에서 다시 복사되기 시작했다. 아랍의 번역 운동이 그 중요한 원인이라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이러한 필사본들은 수학, 천문학이 대부분이었는데 당시 비잔티움 학자들 중 이런 것을 연구할 수 있을 만한 훈련을 거친 사람이 거의 없었다. 둘째, 점성학자 스테파누스가 천문학, 점성학, 수학 등의 저작을 이슬람 세계의 학문 발전 소식과 함께 비잔티움으로 가져간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비잔티움에서 만들어진 그리스어 필사본들이 아랍 번역을 모방한 것이거나 거기에 대한 반응이었다고 할 수 있다. , 아랍인들의 청탁의 결과였다고 볼 여지도 있다. 그리스어 필사본 제작은 수요가 꽤 있었고 보수도 높았기 때문이다.


논평
이 글에서 눈여겨볼 만한 점은 두 가지인 듯하다. 첫째, 번역이 이루어지는 이유와 번역 대상은 그 사회의 요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토피카』, 『자연학』은 당시의 신학 논쟁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기에 번역 수요가 있었고, 그러한 논쟁은 또다시 정치적 변화와 관련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어떤 책이 왜 번역되었는지 완전히 이해하려면 그 번역을 촉발하게 된 학문적 배경과, 그러한 배경이 사회와 어떤 관련을 맺으며 형성되었는지도 이해해야 할 것 같다.
둘째, 외래 문화가 유입될 때 전통 문화와 대립 구도를 이루게 된다는 전제는 잘못되었다는 점이다. 내가 발제를 맡은 Saliba의 책에도 외래 학문과 이슬람 학문의 관계를 대립 구도로 단순화하고 있다. 하지만 이 글에 따르면 전통의 지지자로 분류될 수 있는 사람들 중에서도 외래 학문을 특별히 배척하지 않은 사람이 많았다. 또한 외래 학문이라고 해서 무조건 배척한 것이 아니라 그 중 일부를, 그것도 이슬람 신학과 배치되는 부분을 반대한 것이었다. 이러한 점으로 볼 때, 반대가 전통의 지지자 집단 전체에서 일어났는지 아니면 일부에서 일어났는지, 그런 대립이 있었더라도 그 이유가 무엇이고 구체적으로 어떤 쟁점에 대해 대립이 일어났는지 따져보는 것이 옳은 것 같다.
한편, 글에서 한 가지 의문이 드는 것이 있다. 저자는 비잔티움 르네상스의 중요한 요인들 중 하나로 스테파누스라는 점성학자가 이슬람 세계에서 발전한 학문들을 비잔티움에 전해준 것을 들고 있다. 저자는 이 사람이 전한 학문이 비잔티움에는 전혀 없던, 완전히 새로운 내용인 것처럼 서술하고 있다. 물론 그가 중요한 역할을 했을 수 있겠지만 단 한 명의 역할이 다른 요인과 나란히 놓을 수 있을 정도인지는 의심스럽다. 이러한 서술이 뒷받침되려면 비잔티움 학자들이 그리스 전통에 정말로 철저하게 무지했다는 점이 입증되어야 한다. 내가 알기로는 오랜 기간 동안 서양사학계에서 비잔티움 제국이 굉장히 낮게 평가되어 왔고, 그러한 경향이 이 글에도 반영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든다.  








동물의 심장과 피의 운동에 대한 해부학적 논고
하비 이전에는 동물의 피가 간에서 만들어져 정맥을 통해 온몸으로 보내진 뒤 신체조직에서 소모된다고 알려져 있었다. 하비는 해부학적 논고에서 피가 인체를 순환한다는 것을 처음으로 밝혀냈는데, 이는 갈렌의 의학을 근대 의학으로 대체한 사건이었다. 그는 정맥의 판막이 간에서 피를 인체 각 부위에 보내기 수월한 방향이 아니라 인체에서 돌아오는 피가 역류하지 못하게 하는 방향으로 붙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이것이 그가 갈렌의 이론을 의심한 계기가 되었다. 해부학적 논고에서 그는 정량적인 방법과 실험적인 방법을 이용하였다. (과학고전선집 해설)
피의 양에 대해: 심실로 들어가고 나오는 혈관들의 대칭성과 크기(의 거대함), 판막의 배열과 구조 등을 고찰함으로써 피가 순환한다는 결론을 내림.
피의 순환에 대한 세 가지 근거
1.     피는 맥박에 의해 지속적으로 대정맥에서 동맥으로 전달되는데, 그 양은 섭취한 음식만으로는 도저히 공급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2.     신체 각 부분으로 전해지는 피의 양은 영양공급에 필요한 정도나 음식에서 나올 수 있는 양보다 많다.
3.     정맥은 지속적으로 신체의 각 부분에서 심장으로 피를 돌려보낸다.
그는 시신에서 직접 측정한 심장 속 피의 양과, 맥박의 빈도를 통해 그 양을 대략적이지만 합리적인 방법으로 계산한다.
판막의 기능에 대해: 판막이 피가 아래로 쏠리는 것을 막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는 심장과 반대 방향으로(굵은 정맥에서 가는 정맥으로) 역류하는 것을 막는 것이라는 점을, 신체 여러 부위의 판막의 방향, 네발 동물의 판막의 방향 등을 통해 이야기함. 이에 대한 근거로 정맥을 해부할 때 탐침을 한 방향으로밖에 넣을 수 없다는 점을 듦. , 팔을 묶었을 때 혈관이 튀어나오는 부분(판막)을 누르면 판막을 통과하지 못함을 보임.


The Canon of the Human Body: Vesalius’s De Humani Corporis Fabrica

이 챕터는 베살리우스(Vesalius)의 대표적 저작인 De fabrica에서 인체의 표준적인 모습, 인체에 내재된 목적론에 대해 설명하고 고전적인 문헌들을 평가하기 위해 그림을 이용한 방식을 다룬다.


The Book
De humani corporis fabrica (On the fabric of the human body) - De fabrica의 서문에서, 베살리우스는 예전에는 의사(physician)가 모두 다뤘던 의학의 세 가지 분과들인 식이 요법, 약물 치료, 수술이 서로 다른 사람들에 의해 수행되고 있다는 점을 것을 한탄한다. 의사는 내과만 맡게 되었고 수술은 barber들이 맡게 되었다. 이로 인해 의사는 해부학에 대한 직접적인 지식을 잃었고, 해부는 의학을 잘 모르는 사람에게 맡겨진 것이다. 이러한 분업은 의사가 직접 해부를 했던 고대 의학 전통에 어긋난 것이다.
당시의 이런 상황과는 다르게, 베살리우스는 책에 실린 삽화에서 해부를 하는 사람을 한 명으로 묘사한다. 베살리우스는 근육의 힘줄이 손가락을 어떻게 움직이는지 설명하고, 그 밑 근육의 힘줄을 보여준다. 신체 구조는 전능하신 신의 뛰어난 위업으로 여겨졌다. 고대부터 손은 인간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으며, 게다가 팔뚝과 손은 갈렌이 책의 가장 첫 부분에서 설명하는 부위였다. 한편 해부 중인 손을 들고 있는 모습은 해부는 자기 손으로 직접 해야 한다는 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베살리우스는 갈렌의 전통에 있었다. 갈렌의 계승자였던 Theophilus는 갈렌의 De usu partium을 수정한 자신의 책에서 영혼의 그릇인 인체가 다른 동물들의 몸보다 어떤 점에서 더 신성한지 보여주었다. 인체에 대해 이러한 관점일 가진 전통에서, 베살리우스는 그의 작업을 기독교화된 해부학적 작업으로 여겼다. 타이틀 페이지에서 베살리우스가 하늘 위를 가리키는 몸짓은 이를 상징적이로 보여준다.

The Artists
여러 명의 예술가들이 De fabrica의 그림을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책에 직접 실려있는 것은 아니지만, 빨간 분필로 그린 그림이 두 개가 De fabrica와 관련 있다고 알려져 있다. 이 그림들 중 하나는 몇 가지 종류의 뼈를 묘사하고 있다. 그 중에 턱뼈가 두 개 있는데, 이 턱뼈들은 살짝 다른 각도로 그려져 있다. 이 중에서 아래에 있는 것이 턱뼈의 구조를 가능한 한 명확하게 보여줄 수 있는 각도로 제시된 것이다.  
다른 빨간 분필 그림은 근육 그림을 위한 예비 스케치이다. 이 그림은 해부의 특정 단계를 묘사하기보다는 해부가 진행되는 과정을 한 그림 내에서 보여줌으로써 인체의 내부 구조를 보여주었다.

The Pictures
De fabrica에는 200개 이상의 그림이 포함되어 있다. 몇 가지 그림은 의도적으로 반복해서 그려져 있다. 한편 인체의 구조를 다른 사물과 비교하여 이해하도록 비유적인 묘사를 위해 그려진 그림들도 있다.
근육에 대한 그림들은 피부에서 시작해 근육의 층들을 연속적으로 보여준다. 베살리우스는 독자들이 앞뒤의 그림과 비교하면서 무엇이 위층에 있고 무엇이 아래층에 있는지 비교하도록 한다. 이로써 독자들은 인체의 층 개념과 입체감(depth)을 이해하게 된다. 몸 전체 근육의 상호관계를 이해했다면 더 작은 부위들에 대한 내용으로 넘어간다.
베살리우스의 또 다른 책인 Epitome에서도 몸의 층과 입체감이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이 책은 뼈에서 시작해 점점 바깥쪽이 설명되며 중반부에는 남녀의 나체 그림으로 살갗에 대한 묘사가 나온다. 독자들은 반대 방향으로 읽음으로써(, 책의 중반부에서 앞으로) 살갗에서 시작해서 뼈로 이어지는 층 개념을 이해할 수도 있다. 중반부 이후에는 동맥과 정맥, 그리고 장기들의 그림이 포함되어 있다. 베살리우스는 단단한 종이로 그 그림들을 조립하여 인체의 다층적인 모습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지침을 제공한다.
갈렌이 권고한 것처럼, 베살리우스도 그림이 실제 해부 경험의 대체제가 될 수 없으므로 학생들이 스스로 해부를 해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베살리우스가 그림을 이용하게 된 데에는 역사적인 필요성이 있었는데, 해부에 대한 고대의 문헌들이 오랫동안 잊힌 상태로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글로 된 설명에 비해 그림이 갖는 묘사의 힘을 강조하기도 했고, 직접적인 해부와 달리 보편적인 인체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을 언급하기도 했다. (발제자 추측: , 초보자가 실제로 해부해보면 인체의 각종 기관들을 구분하기가 힘든데, 그림은 뚜렷하게 알아볼 수 있게 그려져 있기 때문에 교육에 도움이 되는 면도 있었을 것이다.)

The Canon of Policlei
De fabrica는 베살리우스의 공개 해부(여러 사람들 앞에서 해부를 시연하는 것)의 순서를 따르도록 되어 있다. 공개 해부는 작은 집단의 학생들 앞에서 해부하는 것보다 교육에 도움이 덜 되었지만, 당시에는 전문 해부학자도 적고 해부할 시신도 적기 때문에 필요했다.
물론 공개 해부와 작은 집단의 해부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작은 집단의 해부에서 해부자는 질병의 본성, 인체들 간의 차이, 해부학 기술 등을 익혀야 한다. 공개 해부에서는, 차분한 안색을 가진 중년 남성 혹은 여성의 모습, 그러니까 Policleitus의 조각과 같은 인체를 보여주어야 했다. Policleitus는 고대의 유명한 조각가인데, 그가 쓴 Canon이라는 책에는 인체의 균형과 비례에 대해 서술되어 있다. 그는 똑같이 ‘Canon’이라는 이름을 갖는, 인체의 완벽한 모델로서의 조각상도 만들었다. 갈렌은 이 조각상의 모습을 체액이 균형을 이룬 상태로 보고 자주 언급하였다.
하지만 공개 해부에서 이용된 시신에서 완전한 인체(Canonical body)에 있어서는 안 되는 특이한 것이 발견되는 경우가 있었다. 베살리우스는 사람들이 이런 것에 관심을 가지는 것을 부정적으로 생각했다. 완전한 몸은 공개 해부에 여러 번 참가해야 알 수 있었다.
책 제목인 De febrica에서 ‘fabrica’는 창조자에 의해 잘 조직된 것을 의미한다. 베살리우스가 생각하기에 몸의 각 부위는 각각의 기능에 맞춰져 있었다. 그는 인간의 몸이 잘 자연의 법칙에 따라 조절되어있다고 표현했다. 그가 많이 쓰는 표현은 본성에 따라서according to nature’라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두개골의 자연스러운 탸원형 모양은 뇌의 모양을 따르는 것이고, 그것은 본성에 따라 뇌를 보호하게 만들어진 것이다. 다른 모양의 두개골은 자연스럽지 못한 것으로 간주했다. 각 부위의 목적에 어긋나는 것(여섯 손가락 등)은 질병, 부패 등과 마찬가지로 자연에 어긋나는 것으로 생각했다.
             
Establishing the Canonical Body
완전한 몸의 기준은 빈도에 의해 정해졌다. 자연스러운 것은 항상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완전한 몸에 대해서 알기 위해서는 해부를 자주 해봐야 했다. 한 가지 사례로, 갈비뼈의 개수에 변이가 있었다. 이런 경우들은 해부를 자주 해봐야 한다고 여기는 이유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불일치가 완전한 몸에 대한 관념을 바꾸지는 않았다.
한편 빈도가 완전한 몸의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손가락에서 드물게 작은 뼛조각이 발견된다. 베살리우스는 기껏해야 평생에 한 번쯤 이 뼛조각을 봤을 것이다. 그는 책에서 이 뼛조각이 나타난다면이라는 표현으로 이 뼈가 항상 나타나는 것이 아님을 드러낸다. 하지만 이 뼈가 새끼손가락에서 하는 기능이 있음을 설명하며, 손가락의 자연스러운 구조로 취급했다. 갈렌은 신체 부위의 목적을 중요하게 여겼고, 신체 부위의 가장 중요한 형태는 그 기능을 가장 잘 하는 것이었다. 베살리우스는 각 신체부위의 목적에 대해 항상 갈렌의 설명을 따르지는 않았지만, 그도 갈렌의 목적론적 관념은 그대로 따랐다. 이러한 점은 그가 해부학을 자연철학의 일부라고 여긴 이유였다.

Comparative Authority
베살리우스는 해부를 하면서 갈렌의 설명과 어긋나는 점들을 많이 찾아냈지만, 이것이 해부에 대한 강조나 갈렌의 체계을 거부하게 만들지는 않았다. 갈렌은 때때로 다른 동물에게는 있으나 인간에게 없는 구조를 인체에 대한 설명에 덧붙였다. 베살리우스는 자신의 실제 해부 결과를 설명할 때, 갈렌이 묘사한 것을 구체적으로 그림과 함께 언급하고 그것이 틀렸다는 것을 지적하는 방식을 취했다. 이것은 그가 갈렌의 설명을 모른 채로 자기 주장을 한다는 오해를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갈렌과 반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과 다른 동물들이 공유하는 구조에 대해서도 다른 구조를 가졌다고 잘못 서술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갈렌은 이런 점도 지적했다. 하지만 그는 동물의 전체 구조를 이야기하지 않았고, 동물에 대해 언급할 때는 어디까지나 세부적인 구조에 대해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동물 구조와 비교한 인체 구조가 꼭 완전한 몸에 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은 갈렌이나 아리스토텔레스보다 정확하게 인체를 묘사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로써 De fabrica의 그림들은 인체의 표준적인 모습과 인체에 내재된 목적론을 밝히고 고대 의학의 새롭고 적절한 부흥에 기여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