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스크리트어와 페르시아어 문헌들의 번역이 이른 시기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페르시아어
구사자들은 외래 학문의 필요성을 느낀 첫 번째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점은 8세기 전반에 페르시아인들이 우마이야 왕조의 부패에 반기를 들고, 8세기
중반에 혁명을 통해 아바스 왕조의 성립으로 귀결되는 성공을 가져왔다.[1]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리스 고전 전통이 이들을 넘어서기 시작했다. 시리아어
구사자들은 그리스어 문헌들을 아랍어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철학, 논리학, 과학에 대한 문헌들이 먼저 번역되었고, 의학과 약학이 뒤따랐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이 학문들은 다양한 현상에 적용되는 근본 원리로 연결된 커다란 철학 체계에 포함되었다. 또한 산스크리트어 천문학 문헌들을 아랍어로 번역한 사람들도 있었다. 이러한
천문학 문헌들은 아랍의 실정에 맞게 다소 수정이 가해졌다.
820년에서 870년 사이
약 반 세기 동안, 번역 대상은 산스크리트어 혹은 페르시아어 문헌에서 거의 전부 그리스어 문헌들로 바뀌었다. 이 시기에 그리스어로 된 거의 모든 철학, 과학 문헌들이 번역되었다고
할 수 있다. 기술적인 면에서 번역 작업은 좀 더 체계화되고 팀 단위로 이루어졌다. 이런 활동들은 몇몇 독점적 사업가들이나, 특정 정보만을 이슬람 세계에
들여오려는 후원자들에 의해 조정되기도 했다. 독점적인 사업가들은 그리스어를 아랍어가 아닌 시리아어로
번역하는 전문가들도 포함하고 있었는데, 그럼으로써 그들은 그 문헌들이 아랍어로 번역되기 전까지 정보를
독점할 수 있었다. 갈레노스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이 그러한 사례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그리스어를 통해 외래 학문에 정통한 사람들은 정부 혹은 정부
밖에서 높은 지위에 오를 수 있었다. 다른 한편에서는 아랍어에 정통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주로 종교계 인물이거나 법률가였다. 아랍어는 이들이 코란을 읽기
위해 필요했다. 아랍어를 통해 권위를 얻는다는 공통점 때문에 이들은 서로 연대하기도 했다. 외래 학문과 이슬람 학문의 구분은 이러한 맥락에서 자리를 잡았고, 이슬람
지성사에서 지속되었다.
이 두 집단 간에, 그리고 각 집단 내에서 새로운 지식을 둘러싼 경쟁이 일어났다. 지식의 비대칭은 정치력의 비대칭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새로운 지식에
대한 반대자들도 옹호자들을 공격하기 위해 그 지식을 면밀하게 검토했다. 이러한 경쟁을 통해 이슬람 역사에서
살아남은 분야와 그렇지 않은 분야가 나뉘었다.
Reaction
to the Greek Scientific legacy
그리스 과학 문헌들은 철학 문헌들보다 보다 쉽게 받아들여졌다. 수학이나 천문학에서
맞거나 틀린 것을 가리기는 쉬운 반면, 철학 사상은 그 경계가 그렇게 뚜렷하지 않았다. 또한 철학이 종교의 영역과 배치되는 영역이 있다는 것도 문제였다. 그리스
철학에서 세계는 시작도 끝도 없이 영원한데, 이것은 신이 세계를 창조했다는 교리와 충돌한다. 이렇듯 사회적 조건을 살피면 어떤 분야가 받아들여지고 어떤 분야가 그렇지 않은지, 또 그 이유는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다. 외래 학문의 지지자들은
자신들이 수입하고 있는 학문이 외부의 공격에 견딜 수 있는지에 주의를 기울였다.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은 외래 학문의 수용의 역사를 잘 보여준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오류들은 아랍 천문학자들에 의해 수정되어 받아들여졌다. 앞서 이야기한 경쟁적인 환경 하에서, 아랍 천문학자들은 관찰 방법, 관측 기구를 개선하는 등 보다 정교한
천문학을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초창기의 번역가들은 이러한 길을 열어주었다고 할 수 있다.
Subtler
Observations
Almagest에서 발견된 오류들 중 몇 가지는 아랍어로 번역될 때 바로 알려지지
않았다. 첫 번째는 일식에서 태양과 달의 겉보기 크기에 관한 것이다.
환상 일식(고리 모양 일식, 태양의 크기가 달의
크기보다 크게 보여서 일식 때 태양이 완전히 가려지지 않아서 생김)은 프톨레마이오스가 언급하지 않았던
것이다. 두 번째는 달의 운동에 관한 것으로, Almagest에
따라 계산하면 특정 상황에서 달의 겉보기 크기가 실제와 다르다. 아랍 천문학자들은 관측으로 얻은 새로운
정보와, 더 정교한 계산법을 통해 얻은 값으로 이러한 문제들을 수정했다.
10세기경 항성에 관한 문헌은 두 가지 갈래로 나뉘기 시작했다. 한 가지는 Almagest등의 그리스어 문헌에서 직접 파생된 것이다. 다른 한 가지는 농업이나 일상 생활에서의 사용을 위해 별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한 것이었다. 후자는 기존 아랍 문헌에서 유래된 지식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여기서도
외래의 고대 과학을 적극 수용한 비아랍계 고위 관료들과, 아랍 전통의 정부 밖 혹은 하급 관료 집단을
이루던 아랍인들의 분리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Mathematical
Reconstruction of the Almagest
앞서 언급한 오류들과는 별개로 Almagest를 개정하려는 작업도 진행됐다. 첫 번째는 Almagest의 수학적 접근법을 당시의 신식 수학으로
업데이트하려는 것이었다. Almagest에는 그리스의 고전적인 삼각비 이론, 즉 원 위의 두 점을 잇는 현의 길이를 이용해 sine값을 계산하는
방법을 사용되었다. 이슬람에서는 우리에게 좀 더 친숙한 삼각비 이론이 발전했고, 이를 통해 개량된 천문학 서적들에는 sine, tangent 표가
첨부되었다. 이와 같이 그리스 과학 문헌들은 아랍어로 번역된 뒤 당시의 지식에 의해 개선되었다.
두 번째는 Almagest를 교육에 쓰기 위해 편집하는 것이었다. Almagest의 내용은 재구성되고 여기에 일부 내용이 추가 혹은 삭제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프톨레마이오스는 행성들 각각에 대해서 이심률을 계산하는 과정을 상세하게 서술했는데, 그 대신에 한 행성에 대해서만 자세히 서술하고 그 방법을 일반화시킨 설명을 제시하는 식으로 개정이
이루어졌다.
Cosmological
Problems of the Almagest
Almagest는 행성의 위치를 설명할 수 있는 수학적 예측 모형을 다루고 있다. 한편 프톨레마이오스의 다른 저작인 Planetary Hypothesis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적 관점에서 천구에 관해 서술되어 있다. 이 두 문헌의 내용은 서로 모순되었고, 이는 당시의 우주론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켰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우주론의 핵심은 우주의 중심에 지구가 고정되어 있고, 행성들은 그 주위를 원운동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Almagest의 수학적 모형은 이와 모순을 일으킨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과학적이라기보다는 철학적 문제로 취급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 불일치는 과학적 문제로 인식되었다. 과학에서 물리적인 측면(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원운동)과 그에 대한 표상(Almagest의 수학적 모형)이 모순되는 것은 심각한 문제였다. 천구의 개념을 단지 사변으로 취급하여 문제를 회피할 수도 있지만, 이
개념을 이용해 행성의 위치를 예측하는 데에 사용한다면 분명 실재와 어떤 관련이 있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천문학자들에게
이 문제는 무척 중요했는데, 그리스 천문학을 받아들이지 않는 학자들의 공격을 방어해야 했고, 그리스 천문학을 받아들이는 학자들 내에서도 자신의 지적 우월성을 증명해야 했기 때문이다.
Almagest의 서문에서 프톨레마이오스는 천체의 위치를 예측하는
것과 별개로 실제 운동을 인식하는 것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며 신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우리가 실제로 보고 예측하는 측면들은 어떻게 존재하는지 문제가 되고, 따라서 이것은 여전히 프톨레마이오스
이론의 허술한 점으로 남는다.
이러한 문제가 빠르게 제기되었다는 것은 이슬람 세계에서 그리스 학문들에 대한 수용이 매우 정교하게 이루어졌다는 것을 뜻한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우주론과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의 불일치는 Almagest와
Planetary Hypothesis를 그리스 철학의 전체 체계 내에서 비교하며 읽어야 찾아낼 수 있다. 천문학이 아닌 다른 분야에서도 이러한 불일치가 발견되었고, 이슬람
학자들은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 활발히 연구했다.
[1] 과거 역사학계에서는 이 혁명이 우마이야 왕조에 대한 페르시아인들의 반발이었다고 해석했는데, 최근에는 페르시아인들 뿐만 아니라 다양한 민족이 가담한 초민족적인 반발이었다고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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