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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26일 수요일

[요약정리] Pesic, Peter. (2014). Music and the Making of Modern Science 2장 Music and the Origins of Ancient Science


보에티우스의 음악에 대한 저작은 2세기 동안 잊혀졌지만, 9세기 초부터 다시 널리 보급되기 시작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이 유럽에 다시 소개되기 전까지 보에티우스의 저작은 음악 이론의 중심이었으며, 덕분에 음악 과학은 다른 고대 자연철학 분야들이 소실되는 와중에도 계속 이어졌다. 12세기 르네상스기 이후, 즉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이 번역된 이후에 천문학, 물리학, 음악에 대한 논의가 더 풍부하게 재개되었다.
니콜 오렘은 14세기에 자연철학자로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천체 운동이 서로 공약가능한지 여부에 대해 고찰했고, 그것은 천체 배열의 반복성에 대해 더 큰 함의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음악 용어로 표현됐다. 대수와 기하의 차이는 음악적, 수학적, 천문학적으로 큰 함의를 가지고 있었다..
오렘은 서로 다른 천구들의 운동이 서로 공약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우주에서 천체의 초기 배열은 다시는 재현되지 않을 것이다. 플라톤은 2 6천년 주기로 천체들의 배열이 초기 상태로 돌아가는 ‘Great Year’이 올 거라고 예상했었으나, 오렘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점은 당시 천문학과 달랐는데, 오렘은 천문학적 결정론을 버리고 천체들의 자유 의지를 이해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의 판단은 새로운 음악과,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새로운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 코페르니쿠스보다 약 150년 전에 오렘의 저작은 이미 지동설에 대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오렘은  불의 구체를중심에 놓고 지구는 그 중심을 도는 어두운 천체라고 보았다. 낮과 밤은 이러한 공전에 의해 생긴다. 지동설을 설명하면서, 오렘은 행성이 중심을 시계 방향으로, 마치 carole(사람들이 원을 만들며 추는 춤) 안의 사람처럼 돈다고 표현했다. 이 관점에 대해 설명하면서 오렘은 우리가 지구의 움직임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그와 비교할 다른 대상이 없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했다. 또한 그는 당대 천문학의 설명대로 천구가 매일 회전하려면 엄청난 속도로 돌아야 하는데 그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오렘은 지동설이 교리적 논쟁을 일으킬 것을 걱정해 한 발 물러났지만, 여전히 지동설을 호의적으로 평가했다. 그는 지동설을 가설에 불과하며, 따라서 교리 논쟁의 대상이 아니라고 봤는데 이는 그전에 그가 지동설을 실제 우주의 표상으로 봤던 것에서 후퇴한 것이다. 오렘은 결론적으로 이 문제를 결정 불가능하지만 가능성 있는 논변으로 남겨놓은 듯하다.
한편 이 문제에 대한 음악적 고려는 천동설에 대한 결정적인 반론으로 쓰였다. 오렘은 천체의 하모니를 우리가 들을 수 없다는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의견을 따랐지만, 음악적 비례를 진지하게 취급했고, 이차원 행렬에 음악적 비례를 나타내기도 했다. (책에서 표 2.1) 행렬의 빈칸은 사용되지는 않았지만 가능한 하모니를 암시한다.
그는 인간의 감각으로는 천체의 비례를 인지할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천체의 음악을 들을 수 없어도 그에 대해 연구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음악은 수학의 초감각적 세계와, 천문학의 지각 가능한 증거들을 연결시키는 접점이었다. 또한 오렘은 천문학의 오래된 문제, 즉 어떤 음정이 어떤 천구에 대응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음악적으로 접근했다.

일반적으로 크고 무거운 것의 빠른 회전은 높은 음과 연결되었다. 지구와 가까워질수록 음은 점점 낮아지고, 움직이지 않는 지구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는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었다. 하지만 오렘은 여기에는 문제가 있다고 보았다. 가장 높은(exalted, 위대한) 천구는 높고 얄팍한 음이 아니라 깊고 장중한 소리를 내야 한다고 그는 생각했다. 이 문제는 순수하게 천문학적인 배경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우주론적 고려가 필요하다. 하지만 이에 따르면 지구에서 가장 높은 음이 나와야 하는데, 정지해 있는 지구가 가장 높은 진동수를 가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천동설을 폐기해야 한다.
그는 천체 운동의 공약 가능성과 불가능성에 대해서도 음악적 접근을 시도했다. 이 문제는 천문학만으로 해결될 수 없다. 천체의 운동이 공약 가능한지 여부는 선헌적으로 알 수 없다. 그는 초기 저작에는 의인화된 대수학과 기하학의 논쟁이 나온다. 오렘은 그 책에서 대수적이든 기하적이든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다는 의견을 내놓는다. 이와 같이 수학적 해결책이 없는 상태에서 음악이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한다.
의인화된 대수는 우주가 신에 의해 유비적(有比的, rational)으로 조화롭게 만들어졌다는 주장을 펼친다. 무리수는 조화에 어울리지 않는다. 반면 의인화된 기하학은 예술적으로 혁신적인 생각을 보여준다. 천체의 운동이 공약불가능한 것이 완전히 공약가능한것보다 훨씬 아름답다는 것이다. 유비성은 우주적 음악의 풍부함을 담아내기에 부적절하다는 것이다. 항상 반복되기만 하는 음악은 훌륭하지 못하다. 전체적인 다양성을 부분적인 부조화만 보고 혼란스럽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천체의 운동이 공약불가능하다면 우주의 음악은 항상 새롭다. 또한 천체의 속도나 주기만 수학적 조화에 포함시킬 것이 아니라, 천체의 무게, 크기, 공간적 차원도 조화의 일부로 봐야 한다.
천체의 음악을 들을 수 있느냐의 문제에서 대수학은 들을 수 있는 것으로 취급한다. 기하학은 우주적 하모니를 들을 수 없는 것으로 다룬 고대인들을 언급하며, 감각으로 유비성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부적절한 기준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면서도 음악적 언어를 우주적 조화를 묘사하기 위해 사용한다. 책은 진실을 알려주지 않은 채 끝난다.
오렘의 생각은 명시적으로 드러나 있지 않지만, 다른 저작에서 그가 기하학의 이야기에 동조한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 그는 우주적 하모니는 들을 수 없으며, 천체의 초기 배치의 재현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주장한다. 한편 오렘은 사태 의 불가역성을 우주적 음악과 관련시킨다. 천체들은 언제나 서로 새로운 관계 속에 놓이며, 같은 배열이 다시 일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들은 이전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뮤직을 끊임없이 만들어낸다. 그는 천상과 지상이 인과적, 음악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본다. 천체들이 서로 계속해서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내는 것과, 인간사에 이전 역사에 존재하지 않았던 일들이 새롭게 일어나는 것은 관련이 깊다.
그는 책에서 합창에 대해 언급하는데, 이는 당시 생겨나던 다성 음악과 관련이 깊다. 오렘은 이 새 스타일의 대가들과 연결되어 있었다. 오렘은 그의 수학 저작을 그 중 한 명인 Vitry에하 헌정하면서, Vitry가 그의 저작을 올바르게 평가해 줄 수 있을 것이라는 내용의 서문을 실었다. 그 저작은 유리수 비와 무리수 비의 덧셈 및 뺄셈에 대해 다루면서 음악과 관련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Vitry를 단지 수학에 교양이 어느 정도 있는 정도가 아니라, 전문적인 내용에 대해 판단하고 고칠 수 있는 권위자로 취급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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