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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26일 수요일

[요약정리] Oglivie, Brian W. (2008). The Science of Describing: Natural History in Renaissance Europe 5장: Common Sense, Classification, and the Catalogue of Nature 전반부


The Unexpected Consequences of the Science of Describing
Herbaria: From Memoranda to Documentation Centers
16세기 중반, 식물원, 식물 표본실 등에 모인 표본은 자연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환경적 맥락과 떨어지긴 하지만, 식물학자들은 표본을 통해 현장에 나가 연구하지 않아도 됐으며, 표본을 통해 새로운 연구도 할 수 있었다. 한편 이런 방법 덕분에 풍토성, 지역성이 희석되어 국지적 지식이 보편적으로 퍼져나갈 수 있었다.

당시의 식물학자인 Caspar Bauhin는 말린 식물 표본들을 기존 문헌들과 비교하며 연구를 진행했다. 그는 학생들을 통해 유럽 각지에서 식물들을 모았는데, 각 식물들에 표지를 붙여 체계적으로 배열했다. Bauhin의 연구 방법과 사회적 관계를 통한 표본 채집은 자연사 연구에서 탐사의 필요성을 줄였다. 자연 그대로의 식물은 오히려 부차적인 연구 대상으로 밀려났다.
Bauhin는 다른 박물학자들과 달리 식물을 채집한 시간과 장소, 성장의 경과 등은 거의 기록하지 않고 거의 순수하게 형태에 관한 기술만을 했다. 그는 뿌리부터 시작해 줄기, , , 열매의 형태를 기록했다. 당연히 그는 표본의 배열 기준에서도 형태를 가장 중요한 것으로 생각했다.
여러 면에서 그의 묘사와 작업 방식은 훨씬 후대의 학자인 Linnaeus와 비슷했다. Linnaeus처럼 그는 표본실을 만들었고, 학생들을 보내 샘플을 모았으며, 종을 규정했다. 그러나 두 가지 중요한 차이가 있었다. Linnaeus는 식물의 구조에 대해 훨씬 자세하고 정교한 묘사를 했다. 그뿐만 아니라, 보다 의미 있는 정보를 잘 포착했다.
Bauhin과 르네상스 시대 학자들은 종을 묘사할 때 비교에 기반을 두었다. 그러나 아직 종 분류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은 아직 자연을 시스템으로 환원하지 않았다.


Taxonomy and Classification: Renaissance Folkbiology
자연사의 역사에서 분류는 중요하게 다루어지지만, 르네상스기의 박물학자들에게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물론 여러 박물학자들이 자연에 나타난 질서에 대해 인지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Hieronymus Bock은 식물을 나무, 관목, 하위관목under-shrubs, 풀의 네 가지로 크게 분류했다. 또한, 그는 일반적인 형태의 유사성을 개략적으로 제시했다. 이러한 원칙들은 다른 16세기 식물학자들에게 채택되었다.
그러나 많은 경우 분류 기준들은 인간중심적인 요소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러한 분류들은 비과학적이지만, 각자 목적이 있었다. 예를 들어, 사람을 다치게 하는 식물과 그렇지 않은 식물을 나누었다. 때로는 뒤죽박죽으로 보이는 분류법이 교육적으로 도움이 되기도 했다. 독자들은 이러한 책에서 식물들 간의 차이를 식별하는 법을 익힐 수 있었다.
Bauhin는 속과 종을 나눈, 겉보기에는 근대적인 분류 시스템을 도입했다. 근대적인 분류와 Bauhin의 분류는 차이가 아주 많다. 하지만 현대 분류학에서도 완벽한 기준이 없음을 고려하면, Bauhin의 분류도 그 나름대로의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1] 또한 LinnaeusBauhin의 저작을 자주 인용했다. 그러나 Linnaeus의 종과 속 개념은 Bauhin과 많이 달랐고,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은 생물들도 분류할 수 있도록 체계를 세웠다. 한편 Linnaeus 이전에도 속 이상의 수준에 대한 분류가 존재한다고 박물학자들은 생각했지만, 그것을 종속과목강문계 체계로 만든 것은 Linnaeus였다.
르네상스 시기에는 통속적인 분류 방법이 널리 사용되었다. 많은 통속적인 분류는 생활상, 포괄적인 분류군, 구체적인 분류군, 그리고 과family fragment의 수준을 갖는다. 생활상이란 동물과 식물의 구분이며, 포괄적인 분류군과 구체적인 분류군은 근대적 의미에서 속과 종에 해당한다. 포괄적인 분류군은 전반적인 특징을 통해 규정되었고 구체적인 분류군은 다른 생물과의 대조를 통해 규정되었다. 이 분류는 알려진 모든 생물을 포괄하지는 못했지만, 생물학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중요한 생물들은 거의 모두 포함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통속적 속은 통속적 종으로 나누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농경 사회에서는 종으로 나누어지는 속의 비율은 높았다. 수렵채집 사회에서는 종으로 나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Berlin은 이것을 생물학적 사실과 문화적 관심의 상호작용의 결과로 본다. 농경 사회에서는 정교한 종 분류를 통해 품종 개량을 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르네상스 후기 자연사는 통속 생물학과 다르다. 첫째, 르네상스 박물학자들이 사용한 관찰 기술은 통속 전문가들이 분류에 사용하는 생태학적 맥락, 정보를 제거했다. 이것은 과학적 생물학(분류학)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박물학자들에게 알려진 종의 수가 증가하면서 통속 생물학이 다룰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으며, 이는 학자들이 체계적인 분류 체계를 발전시키는 계기가 된다.
Andrea Cesalpino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식물에 대한 경험적 지식을 결합시켰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식물적 영혼이 분류 기준이라고 생각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의 종류들 중 영양의 영혼과 생식의 영혼이 식물에게 속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Cesalpino는 영양과 생식에 관한 기관들을 식물에게 본질적인 것으로 보고 이를 기준으로 식물들을 기준으로 분류했다. 뿌리와 싹(영양), 꽃과 열매(생식)가 그 기관들이다. 주된 분류 기준은 생식성이었다. 이는 서로 생식이 가능한 개체들을 한 종으로 묶는 근대적 관점과 통한다. 환경에 따라 크게 변하는 식물도 이 기준을 적용하면 제대로 분류가 가능했다.
Cesalpino는 식물의 본질과 관련 없는 우연한 성질들은 분류에 적용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특히 의학적 유용성같이, 일관적이기는 하지만 식물 그 자체의 특성은 아닌 것은 배제했다. 다만 형태의 몇몇 측면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가능성을 남겨놓았다.
또 다른 16세기 박물학자 Adam Zaluziansky는 교육에 도움이 되는 분류 방식을 중요시했다. 그의 이론에서는 causehistory가 중요하게 여겨졌다. Cause는 식물의 부분들에 대한 것이고, history는 하나의 종을 기술하기보다 여러 기준을 차례로 적용해서 이분법적으로 구분해 나가는 과정이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이것은 과학적이라기보다는 교육학적이고 실용적인 도구였다.
한편 식용, 약용으로 사용 가능한지 여부는 분류 기준에서 제외했는데, 그 이유는 Cesalpino와 다르다. Zaluziansky는 그런 기준은 식물학이 아닌 다른 영역에 속한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식물학이란 뿌리, 줄기, 가지, 잎 등의 형태를 다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냄새를 기준으로 한 분류도 비판했는데, 그것은 이론적인 면에 대한 것이었고 실용적인 면에서는 초보자들에게 유용하다고 생각했다.


The Wonders of the North
르네상스기 박물학자들에게, 유럽이든 유럽 밖이든 수집되어 온 대상들에 대해서 중요한 문제는 분류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정확성과 신뢰성, 대상의 유래 등이 더 중요했다. 그들은 직접 생물들을 관찰하지 않으면서, , 여행자, 시료 등에서 얻은 정보를 교차검증하였다. 한편 유럽의 가장자리는 박물학자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았고, 이 지역에 사는 생물들은 자연에 대한 관점을 바꾸어 놓았다.
스칸디나비아 반도는 문화적, 지리학적으로 유럽의 가장자리이다. 순록, 엘크, 바다코끼리 등에 대한 박물학자들의 보고는 대개 직접 경험한 것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었고, 여행자의 이야기나 죽은 동물을 통한 것이었다. 또한 인문주의적으로 교육받은 박물학자들은 스칸디나비아에 대한 지식의 상당 부분을 과거의 문헌에서 얻었다. 그러나 과거의 문헌, 여행자의 증언, 다른 인문주의자들의 저작만이 북유럽 자연사의 원천은 아니었다. 영국 등지에서 북유럽 동물들의 가죽이 거래되기도 했고, 교황에게 바다코끼리의 머리가 전해지기도 했다.
사실 그것들은 르네상스 문화에서 거의 잊혀졌다. 16세기의 탐험가들은 바다코끼리를 완전히 새로운 것을 마주친 것처럼 묘사했다. 그리고 이 시기 북유럽의 생물들은 자연사의 대상이었다기보다는 모피, 가죽, 기름 등을 얻어내기 위한 사냥감이었다. .
16세기 말에 가서야 박물학자들이 이 생물들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Conrad Gessner는 백과사전적인 책을 저술했다. 당연히 그가 직접적으로 모든 것을 관찰하고 묘사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는 다른 사람들의 보고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은 문제가 있음을 알았고, 그의 책에 이 문제를 명시했다. 그는 여러 곳에서 자료를 모으고 자료들 간에 상호 검증을 하며 비판적으로 평가했다. 그는 교육 수준이 낮은 사람의 저작을 낮게 평가했는데, 관찰 자체는 믿을 만 하더라도 저작의 학문적 엄밀성은 좋지 않은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 시대 묘사의 과학의 정확성은 학자들간의 네트워크에 의존했다. 반복된 관찰과 서로간의 비교가 없다면 과학은 근시안적일 뿐이었다.



[1] 뉴기니의 원주민들이 사용하던 분류 방식이 서양의 체계와 놀랍도록 유사한 것을 보면, 분류의 기준은 어느 정도 자연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한 가지 다른 점은 서양 체계는 형태 상의 특징을 주요 기준으로 삼는데, 뉴기니 원주민들은 생태학적 요소들을 주로 고려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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