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서:
Dretske. "The Case Against Closure"
Hawthorne. "The Case for Closure"
Dretske. "Reply to Hawthorne"
*2019년 1학기 서울대 철학과 "인식론 연습: 현대 인식론" 수업에서 발제문으로 사용했다.
드레츠키는 폐쇄성의 거부에 드는 비용이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크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여전히 다른 대안들보다는 폐쇄성 거부의 비용이 더 작다고 말한다. 물론 회의주의를 택할수도 있겠지만, 드레츠키는 이를 피하고자 하고 호손도 그럴 것이다. 만약 선택지가 폐쇄성 거부와 회의주의밖에 없다면 폐쇄성을 거부하는 것이 낫다. 단, 드레츠키가 폐쇄성을 거부하는 것은 단지 회의주의를 피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보다 중요한 동기는 폐쇄성의 거부가 그가 제시한 지식 이론, 즉 지식의 조건에 반사실적 조건을 추가하는 것의 결과였다는 것이다.
지식의 조건에 대한 문제
드레츠키가 제시한 지식의 조건에 대해, 호손은 그의 글 3절에서 여러 반론들을 제기했었다. 드레츠키는 그 반론들의 정당성을 인정하지만, 범주 2의 사례2에 대해서는 재반론을 내놓는다. 호손은 드레츠키의 지식 분석에 따르면 미래에 대한 지식이 결정적인 이유를 갖지 못하게 되는 문제가 생간다고 지적했다. 예를 들어 월요일에 나는 이유 R을 토대로 <내가 수요일에 누군가를 만날 것>을 믿는다고 하자. 실제로 내가 수요일에 누군가를 만났다면, 월요일의 내 믿음은 지식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런데 내가 수요일에 누군가를 만나지 않은 반사실적 상황에서도 월요일에는 이유 R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R은 결정적 이유가 되지 못한다.
이에 대해 드레츠키는 반사실적 분석대로 미래에 대한 지식이 결정적인 이유를 갖지 못한다는 점이 오히려 직관에 부합한다고 반론한다. 신중하게 생각했다면, 월요일에 나는 <내가 수요일에 누군가를 만날 것>을 알지 못한다고 말했을 것이다. 월요일에 내가 아는 것은 단지 <내가 수요일에 누군가를 만날 것을 의도하거나 계획하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수요일에 누군가를 만나지 못할 수도 있는 한, 나는 <내가 수요일에 누군가를 만날 것>을 알지 못한다. 일반적으로 말해,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한 믿음에 대해서는 결정적인 이유가 있을 수 없다.
이 사례는 예외였지만, 드레츠키는 호손이 제기한 비판의 핵심은 받아들인다. 호손에 따르면 우리가 명백하게 무거운 명제들을 믿을 결정적 이유를 가질 때도 있고, 가벼운 명제들을 믿을 결정적 이유를 결여할 때도 있다. 따라서 드레츠키는 결정적 이유와 무거운 명제의 관계가 자신의 방식대로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는다는 점을 인정한다.
맥락주의
그러나 드레츠키는 자신의 입장이 아닌 다른 입장, 예컨대 맥락주의에는 더 큰 문제가 있다고 본다. 호손에 따르면, 만약 우리가 지식을 귀속 맥락에 상대적인 것으로 생각하면 우리는 폐쇄성을 유지하면서 회의주의를 피할 수도 있다. 지식이 귀속 맥락에 상대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인식 주체 S가 무엇을 아는지 여부가(예를 들어 S가 자신이 두 손을 가진다는 것을 아는지 여부가), S에게 그 지식을 귀속시키는 귀속자의 맥락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만약 귀속자가 회의주의를 걱정한다면, S는 자신이 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알지 못한다.
반면에 회의주의를 이해 못하는 S가 <자신이 두 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안다고 말한다면, S가 말하는 것은 참이다. 데카르트의 악마 같은 것들이 유관한 대안이 아닌 일상적인 맥락에서 S는 자기 자신에게 지식을 귀속시킨다. 이 경우 데카르트의 악마 같은 것들은 S가 자기 자신에게 지식을 귀속시킬 때 배제하고자 하는 대안이 아니다. 따라서 S가 말하는 것(<자신이 두 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참이 된다. 한편으로 S가 회의주의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 철학자에게 지식을 귀속시킬 때도, 그 철학자가 두 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철학자 자신이 아는지 여부는 (그 철학자가 아니라) S가 어떤 대안들이 유관하다고 간주하는지에 달려 있다. 이 경우에도 S가 회의주의는 틀렸다고 말한다면, S는 참을 말하는 것이다(앞서 말했듯 S는 회의주의가 무엇인지 이해하지는 못한다). 결론적으로, 회의주의가 틀렸다고 참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S처럼 회의주의가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한 경우뿐이다.
이와 같이, 맥락주의가 폐쇄성을 유지하는 데에 성공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단지 무거운 함축들을 회피할 때뿐이다. 반대로 폐쇄성 원리를 통해 무거운 명제들을 도출해 낸다면 회의주의로 귀결된다. 무거운 함축들을 계속 회피하는 것이든 회의주의를 받아들이는 것이든 둘 다 좋은 선택지가 아니다. 따라서 폐쇄성을 거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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