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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4월 8일 월요일

[요약정리] Dretske, Fred. "The Case Against Closure"

in Contemporary Debates in Epistemology

순서:
Dretske. "The Case Against Closure"
Hawthorne. "The Case for Closure"
Dretske. "Reply to Hawthorne"

*2019년 1학기 서울대 철학과 "인식론 연습: 현대 인식론" 수업에서 발제문으로 사용했다.



도입
알려진 함축 하에서의 인식적 폐쇄성: 만약 SP가 참임을 알고 PQ를 함축함을 알면, 이것은 Q가 참임을 알기에 충분한 증거가 된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어떤 것 P를 알면, 그것에서 함축된다는 점을 알고 있는 모든 Q를 안다는 것이다. 이를 다음과 같이 도식화할 수 있다.
 
(K)
SP를 안다.
SPQ를 함축함을 안다.
따라서 SQ를 안다.
 
인식적 폐쇄성과 전건 긍정의 차이: 인식적 폐쇄성은 전건 긍정보다 한층 더 강한 원리이다. 전건 긍정은 만약 P가 참이고, PQ를 함축한다면, Q가 참이라는 것이다. 인식적 폐쇄성은 S<P가 참이라는 것>을 알고, <PQ를 함축한다는 것>을 알면, Q가 참일 뿐만 아니라 S<Q가 참이라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폐쇄성에 대한 문제제기: 알려진 함축 하에서의 폐쇄성은 일반적으로 성립하지 않는 것 같다. 예를 들어 후회에 대해서는 알려진 함축 하에서의 폐쇄성이 성립하지 않는 것 같다. 다음 논증은 타당하지 않다.
(R)
SP를 후회한다.
SPQ를 함축함을 안다.
따라서 SP를 후회한다.
(R의 예)
존은 <술을 마신 것>을 후회한다.
존은 <술을 마신 것><무엇인가를 마신 것>을 함축함을 안다.
따라서 존은 <무엇인가를 마신 것>을 후회한다.
<P: 술을 마신 것><Q: 무엇인가를 마신 것>을 함축하지만, <P: 술을 마신 것>을 후회한다고 해서 <Q: 무엇인가를 마신 것>을 후회한다고 볼 수는 없다. 술이 아니라 물을 마셨다면 후회하지 않았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드레츠키는 후회에 대해서는 알려진 함축 하에서의 폐쇄성이 성립하지 않는 것처럼 지식에 대해서도 성립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우리가 P를 알고 QP에서 함축됨을 알지만 Q가 참임을 알지 못하는 경우가 존재하며, 따라서 지식은 알려진 함축 하에 폐쇄되어 있지 않다.
 
 
 
 
 
1. 전달가능성(Transmissibility)
드레츠키는 먼저 폐쇄성과 밀접하게 관련된 문제인 증거적 보장(evidential warrant)의 전달가능성 여부에서 논의를 시작한다. 그에 따르면 증거적 보장은 항상 전달가능하지는 않다.
 
증거적 보장의 비-전달가능성(non-transmissibility): 우리가 P를 알게 되는 방식은 우리가 <P에서 함축되는 것>을 알게 되는 방식과 반드시 같을 필요가 없다. 우리가 <PQ를 함축한다는 것>을 안다는 사실에서, 우리가 P를 지각할 수 있기 때문에 Q를 지각할 수 있다는 것이 따라 나오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Q: 물질적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하자. 그렇더라도 우리는 Q를 지각하지 않아도 <P: 병 안에 쿠키가 있다는 것>을 지각할 수 있다. <병에 쿠키가 있다는 것>을 지각을 통해 알아냈다는 주장은, <물질적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지각을 통해 알아냈다는 주장이 아니다. 우리가 <병 안에 쿠키가 있다는 것>을 지각하기 위해서는 <물질적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지만, <병에 쿠키가 있다는 것>을 지각했다고 주장한다고 해서 <물질적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지각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병에 쿠키가 있는 환각 경험은 실제 병의 실제 쿠키와 완전히 같아 보일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실제 쿠키와 환각에 의한 쿠키를 구분할 수 없다. , 우리는 세계가 실제로 존재하는 방식이 우리에게 시각적으로 나타나는 방식과 같은지 알 수 없다. <P: 병 안에 쿠키가 있다는 것>을 아는 방식(시지각), <Q: 시지각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을 아는 방식과 다르다.
 
전지식(protoknowledge): 전지식이란 드레츠키가 도입한 용어로, 우리가 참이라고 지각한 대상 때문에 참이어야 하지만, 그 자체로 참임을 지각하지 못한 것을 뜻한다. 예를 들어 <병 안에 쿠키가 있다는 것>에 대해서 <물질적 대상이 존재한다는 것>이 전지식이다. <병 안에 쿠키가 있다는 것>이 참이면 <물질적 대상이 존재한다는 것>도 참이지만, 전자를 안다고 해서 후자가 참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전지식이 존재하는 이유는 P를 믿게 하는 몇몇 이유들이 P에 의해 함축되는 Q로 전달되지 않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상황에서 우리가 <P: 병 안에 쿠키가 있다는 것>을 믿는 이유는, <병 안에 쿠키가 있다는 것>에 의해 함축되는 <Q: 물질적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믿을 이유로 전달되지 않는다.
 
-전달가능성과 폐쇄성의 관계: -전달가능성을 인정한다고 해서 곧바로 폐쇄성의 거부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폐쇄성의 옹호자들은 P를 믿을 이유가 알려진 함축 Q에 전달되지 않을지라도, P를 알기 위해 여전히 (아마도 다른 이유들에 기반을 두고) Q를 알아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달가능성이 폐쇄성의 거부로 바로 이어지지는 못하더라도, 여전히 비-전달가능성은 폐쇄성이 설득력 있는지 여부를 평가함에 있어 중요하다. -전달가능성을 인정한다면, 폐쇄성의 거부도 받아들이기 쉬울 것이다.
 
지각 증거의 비-전달가능성: 이미 살펴본 것처럼 우리가 세계에 대한 지식을 얻는 중요한 방식인 지각은 증거적 지지를 그 지식의 알려진 함축들로 전달하지 않는다. 쿠키에 대한 우리 지각 경험은 <P: 병 안에 쿠키가 있다는 것>을 믿을 좋을 증거이긴 하지만, 여기서 함축되는 <Q: 물질적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믿을 좋은 이유는 아니다. 심지어 PQ를 함축한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다고 해도 그렇다.
우리가 P를 지각할 때, P의 무거운(Heavyweight) 함축이 항상 존재한다. 무거운 함축이란 P에 대한 알려진 함축이면서 P를 알게 해주는 지각적 이유들(perceptual reasons)로 뒷받침되지 않는 함축을 말한다.
-전달가능성 옹호 논증: 만약 지각에 대해 무거운 함축이 언제나 존재한다는 점이 의심스럽다면, P와 양립 불가능한 Q라는 조건을 상정해보자. SPQ가 양립 불가능하다는 점을 알고 있다. 그리고 특이한 상황 때문에 QS와 똑같은 감각적 영향을 끼친다고 가정하자. P와 양립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QS에게 P와 똑같이 지각될 것이다. 이런 경우 SP를 지각하고 P~Q를 함축함을 아는데도 불구하고 S~Q를 지각하지 못할 것이다.
회의주의자들은 우리의 모든 일상적 지각에 같은 논리를 적용한다. 우리가 지각을 통해 안다고 주장하는 모든 것(P)에 대해서, 지각을 통해 알 수 없는 무거운 함축(Q)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지각은 우리가 <Q: 데카르트의 악마에 의해 기만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려줄 수 없다.
 
 
 
2. 폐쇄성
폐쇄성과 비-전달가능성의 귀결: 폐쇄성에 따르면 우리가 <PQ를 함축하는 것>을 안다면, P를 알기 위해 Q를 알아야 한다. 하지만 폐쇄성은 P에 대한 믿음을 P에 대한 지식으로 승격(promote)시키는 이유가 그 자체로 Q에 대한 믿음을 Q에 대한 지식으로 승격시키는 이유여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P에 대한 이유는 Q에 대한 이유로 전달되지 않을 수 있다. 그렇다면 만약 우리가 P를 안다면 우리의 믿음 Q를 지식 Q로 승격시키기 위해 다른 이유들을 가져야 한다. 그러므로 폐쇄성에 따르면 P를 알기 위해서 Q에 대한 믿음을 Q에 대한 지식으로 만드는 무언가를 우리가 가져야 한다.
 
폐쇄성 거부 vs. 회의주의: 위의 논의는 회의주의로 이어진다. <P: 병에 쿠키가 있다는 것>을 알기 위해 P에서 함축되는 <Q: 물질적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폐쇄성), Q를 알기 위한 별도의 증거가 또 필요하다(-전달가능성). 그런데 <Q: 물질적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따라서 P를 알 수도 없다. 그러므로 회의주의를 피하기 위해서는 폐쇄성을 거부해야 한다.
폐쇄성을 거부한다고 해서 우리가 추론을 통해 지식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폐쇄성의 거부는 우리 지식의 모든 함축을 알 수 있다는 생각을 거부하는 것이다. 우리 지식의 일부 함축에 대해서는 여전히 알 수 있다.
또한 폐쇄성의 거부가 드로즈(Keith DeRose)가 말한 꺼림칙한 연언(abominable conjunctions)을 허용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내가 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나는 <내가 손이 없는 통 속의 뇌가 아니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와 같은 진술들은 터무니없다. 그러나 이런 진술들이 이상해 보이는 것은 일반적인 기대에서 어긋나는 진술이기 때문이지, 논리적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다. 우리가 <P: 병에 쿠키가 있다는 것>은 알면서 <Q: 그 쿠키가 가짜가 아니라는 것>을 모르는 경우는 이상하지만, 그렇다고 그 이상함이 해당 진술을 참이 아니게 만들지는 않는다.
 
맥락주의(폐쇄성 유지 & 회의주의 회피): 지식 귀속을 정당화의 맥락(justificational context)에 민감하게 만들어 폐쇄성을 유지하는 동시에 회의주의를 회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지식 주장이 제기되는 일상적인 맥락에서 우리는 <P: 병 안에 쿠키가 있다는 것>을 안다. 이런 일상적인 맥락에서 우리는 P를 알기 위한 모든 근거를 가지고 있다. 이를 의심할 만한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우리는 무엇인가를 안다고 하기에 충분하다. 따라서 회의주의는 틀렸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으로 회의주의를 피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일상적 맥락에 한에서이다. 만약 우리가 무거운 함축에 대해 진지하게 고려하기 시작하면 다시 회의주의로 귀결된다. 우리가 무거운 함축, 예컨대 <물질적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다면 지식 주장이 평가되는 맥락이 변한다. 이렇게 변화된 맥락에서는 우리가 증거를 통해 제거할 수가 없는 새로운 대안들이 도입된다. 예를 들어 <우리가 데카르트의 악마에게 기만당하고 있다는 것>과 같은 새로운 대안을 증거를 통해 제거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병 안에 쿠키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이와 같이 맥락에 의존하는 방식은 폐쇄성을 거부하는 것보다 더 이상한 결론을 가져온다.
드레츠키는 우리가 주변의 물질적 대상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이 설득력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는 회의주의를 피하면서 그러한 지식을 유지하는 유일한 길은 폐쇄성을 포기하는 것뿐이라고 말한다.
 
폐쇄성 거부로 이어지는 지식 분석: 드레츠키는 3절의 본격적인 논의에 들어가기에 앞서, 폐쇄성 문제와 관련이 있는 한 가지 고려사항을 언급한다. 그에 따르면 결정적이지는 않지만 폐쇄성의 거부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지식 분석(analysis of knowledge) 방식이 있다. 그에 따르면 P가 지식이기 위한 요건에, P에 대한 모든 유관한 대안들을 우리(또는 우리의 증거)가 배제해야 한다는 점이 추가되면 폐쇄성의 거부로 이어진다.
대개의 경우 <병 안에 있는 쿠키가 가짜라는 것><병 안에 쿠키가 있다는 것>에 대해 유관한 대안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증거가 모든 유관한 대안을 배제함으로써 우리에게 <병 안에 쿠키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고 해서, 그 증거는 <병 안에 있는 쿠키가 가짜라는 것>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우리가 PQ를 함축함을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에게 <P: 병에 쿠키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증거는 <Q: 병 안에 있는 쿠키는 가짜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주는 증거 없이도 존재할 수 있다. 따라서 폐쇄성은 거부된다.
그런데 만약 이러한 지식 분석을 받아들이는 유일한 이유가 지식에 대한 상식적 직관을 포착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면 회의주의를 물리치기에 별로 효과적이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지식 분석은 한 증거가 지식에 대한 좋은 증거로 간주되기 위한 조건이 무엇인지 이미 전제하고 있는데, 회의주의자는 이런 전제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폐쇄성 거부로 이어지는 수정된 지식 분석: 더 효과적인 전략은 알려진 것에 대한 특정한 대안들만을 증거적으로 유관하게 하는 지식 분석을 제공하는 것이다. 먼저 이유 RP에 대한 결정적인 이유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자.
 
이유 RP에 대한 결정적인 이유이다 =def P가 참이 아니라면 R도 참이 아니다.
 
만약 지식이 결정적인 이유에 기반을 둔 믿음이라면 폐쇄성은 거부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P의 알려진 함축 Q에 대해 결정적인 이유들을 가지지 않아도 P에 대한 결정적인 이유 R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의 예들을 고려해 보자.
 
(P) 병 안에 쿠키가 있다.
(R) 쿠키에 대한 시각 경험
(C) 만약 병에 쿠키가 없다면, 우리에게 병에 쿠키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 것이다.
(C*) 만약 병에 교묘하게 만들어진 가짜 쿠키가 있다면, 우리에게 병 안에 쿠키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 것이다.
 
(C)는 참일 수 있다. 따라서 쿠키에 대한 시각 경험은 결정적 이유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쿠키에 대한 시각 경험에 의거해 <병 안에 쿠키가 있다는 것>을 믿는데, <병 안에 쿠키가 있다는 것>이 참이 아니라면 시각 경험도 없을 것이므로 결정적 이유의 조건을 만족한다. 그러나 (C*)는 참이 아니다. 따라서 그 시각 경험이 <P: 병 안에 쿠키가 있다는 것>에 대한 알려진 함축 <Q: 병 안에 있는 쿠키는 가짜가 아니라는 것>을 믿는 것에 대한 결정적 이유가 되는 것을 막는다. , Q에 대한 결정적 이유 없이 P에 대한 결정적 이유가 있을 수 있다.
드레츠키에 따르면 안타깝게도 세계는 이런 지식 이론에 맞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지식의 조건에 반사실적 조건을 넣는 것은 좋은 방법이고, 중대한 반례는 발견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러한 지식 분석 방식을 더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는다. 다만 이와 같이 지식의 조건에 알려진 함축에 의해 만족될 필요가 없는 조건을 넣으면 폐쇄성의 거부에 가까이 갈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한다.
 
 
 
3. 무거운 함축들
앞선 1절에서 드레츠키는 P를 알게 되는 방식이 P에 대한 증거적 지지를 P의 모든 알려진 함축들까지 전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우리가 지각을 통해 아는 일상적 대상들은 항상 지각의 지지 범위를 넘어서는 무거운 함축을 가진다. 우리는 그 무거운 함축들이 참이라는 것을 알 수 없다. 따라서 만약 폐쇄성을 받아들이면서 회의주의로 빠지지 않으려면, 이런 무거운 함축들이 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다른 방법들이 항상 존재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 만약 폐쇄성이 말하듯 우리가 <P: 병 안에 쿠키가 있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Q: 외부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면, <Q: 외부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방식(쿠키의 예에서는 시각적이지 않은 방식)이 있어야 한다.
그런 방식은 무엇인가? 어떤 방식이 지각과 독립적으로 무거운 함축들이 참임을 알게 해주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는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앎의 모든 방식들은 무거운 함축을 지지하는 데 실패하거나 그 자신의 무거운 함축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어떠한 증거도 그것이 증거가 되는 것의 모든 함축에 전달될 수는 없다. 드레츠키는 그러한 대표적 사례로 증언과 기억을 든다.
 
지식을 얻는 지각 외의 방식1 - 증언: 흔히 증언은 지식의 중요한 원천으로 간주된다. <병 안에 쿠키가 있다는 것>을 내가 직접 보지 않아도 다른 사람에게 그 이야기를 듣는다면 나는 <병 안에 쿠키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P: 쿠키가 물질적 대상이라는 것>을 내가 안다고 하더라도, 나는 <Q: 물질적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배울 필요 없이 증언에 의해 <병 안에 쿠키가 있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 나에게 <물질적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말해준 사람은 없는데, 만약 누군가가 나에게 그런 것을 말해줬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내가 <물질적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방식이라고 믿기는 어렵다. 다시 말해, <Q: 물질적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가 증언에 의해 알게 되는 것(<P: 병 안에 쿠키가 있다는 것>)에 의해 함축된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지만, Q 자체는 우리가 증언에 의해 배우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만약 폐쇄성이 성립하고, 우리가 외부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낼 다른 방법이 없다면, 증언은 지식의 원천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지식을 얻는 지각 외의 방식2 - 기억: 기억은 일반적으로는 지식을 얻는 방식이라기보다는 다른 방식으로 얻은 지식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여겨지긴 하지만, 기억도 무거운 함축을 가진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에 의해 P라는 지식을 유지할지라도, 그것이 우리가 P의 알려진 함축 Q를 유지하게 해주는 것은 아니다.
만약 내가 <아침으로 시리얼을 먹었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나는 <아침에 시리얼을 먹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나는 <P: 아침에 시리얼을 먹었다는 것><Q: 과거가 실재했다는 것>을 함축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만약 과거가 실재하지 않았다면 나는 아침으로 시리얼을 먹었을 리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Q: 과거가 실재했다는 것>은 내가 기억하고 있는 무엇인가가 아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것 대부분에 대해 <과거가 실재했다는 것>은 무거운 함축이다. 하지만 <과거가 실재했다는 것> 자체는 우리가 기억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P를 기억하고, P에서 Q가 함축됨을 안다고 해서 우리가 Q를 기억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만약 폐쇄성이 참이라면, 우리는 <Q: 과거가 실재했다는 것>을 알지 않는 한 <P: 아침으로 시리얼을 먹었다는 것>을 기억할 수 없다. 기억, 화석, 역사책과 같은 것들을 통해 과거가 실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런 것들은 만약 과거가 실재했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알려준다. 그러나 그것들에서 <과거가 실재했다는 것>이 함축되는 것은 아니다.
 
지표(indicators): 드레츠키는 우리에게 무거운 함축을 알게 해주는 지식의 원천을 찾는 일은 희망이 없다고 말한다. 대신 그는 좀 더 일반적인 관점에서 접근하고자 한다. 우리가 P가 참임을 알게 될 때, P가 참임을 우리에게 말해주는 어떤 지표(indicator) 혹은 정보의 원천(source of information)이 항상 존재한다. 직접적 지각의 경우에는 P에 대한 경험이 그러한 지표이다. 우리는 <병에 쿠키가 있다는 것>을 그 쿠키들을 지각함으로써 알게 된다. 증언에서 정보는 친구, 선생님, 각종 미디어 등의 매개체를 통해 비간접적인 방식으로 전달된다. 이런 각각의 사례에서 우리가 P를 알게 되는 방식은 P가 참임을 표지하는(indicate)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점에 항상 의존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지표가 P가 참임을 표지하는 관계가 그것과 P(모든) 알려진 함축들이 참임을 표지하는 관계는 아니라는 점을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지표는 P가 참임을 표지하긴 하지만, P가 잘못 표지되지 않았다는 것을 표지하지는 않는다. , 지표는 그 지표 자신의 신빙성을 표지하지는 않는다. 지표의 신빙성을 표지하는 일, <P에 대해 지표가 잘못 표지하지 않았다는 것>P에 대한 무거운 함축이다. 지표의 신빙성을 표지하는 일은 지표의 역할이 아니다.
이러한 점은 모든 지표들에 대해 참이다. 이것이 <물질적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표지하는 것이 없는 이유이다. 우리의 시지각이라는 지표는 <P: 병에 쿠키가 있다는 것>만을 전달할 뿐 <Q: 물질적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과 같은 무거운 함축은 전달하지 않는다. 회의주의에 대한 대답은 표지 자체에서 얻어지지 않는다. 무거운 함축이 참이라는 것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이지, 표지를 통해 알아내는 것이 아니다.
 
폐쇄성 거부 vs. 회의주의: P를 알게 하는 모든 승인된(accredited) 방식은 지표에 의해 P에 대해서 전달된 정보에 의존한다. 드레츠키는 물질적 세계에 대해 알게 하는 어떠한 승인된 방식도 물질적 세계가 존재한다고 말해줄 수는 없다고 결론 내린다. 이것이 옳다면, 우리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1) 회의주의: 폐쇄성을 유지하고 회의주의를 받아들인다. 모든 P에 대해, 우리가 만약 P의 모든 (알려진) 함축들을 알지 못한다면 P를 알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그 함축들을 모두 알지는 못한다. 무거운 함축들이 참이라는 것은 표지해주는 것은 없다. 따라서 (폐쇄성이 주어지면) 우리는 이러한 무거운 진리들을 함축하는 어떤 것도 알 수 없다(그리고 대부분의 것이 여기에 포함된다).
 
(2) 폐쇄성의 거부: 폐쇄성을 거부함으로써 일상적인 지식을 유지한다. 우리는 P를 알기 위해 P의 무거운 함축들을 알 필요가 없다. 우리는 P의 무거운 함축들에 대한 정보를 얻지 않고서도 P가 참이라는 것을 알기에 충분한 정보를 얻을 수 있고 실제로도 그렇게 한다.
 
 
물질적 세계에 대해 무언가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선택은 쉽다. 폐쇄는 거부되어야 한다. 알려진 무거운 함축 Q를 함축하는 P가 참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기 위해 Q가 참이라는 것을 알 필요는 없다.
 
3의 선택지?: (1)(2) 사이의 선택을 회피하는 선택지도 있다. 만약 우리가 지식을 무거운 함축들에까지 확장하고자 한다면, 어쩌면 우리는 폐쇄성을 유지하면서 지식을 가질 수 있을지 모른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P에 대한 믿음을 뒷받침하는 사실들에 의해 기만당하고 있지 않다는 증거가 없을지라도, 무거운 함축에 대한 우리 지식은 특별하다고 여전히 주장될 수 있다. 무거운 함축들에까지 증거를 전달하는 승인된 앎의 방식이 없을지라도 어쨌거나 우리는 무거운 함축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무거운 함축들은 그것들을 믿기 위한 이유 없이도, 대안들(예를 들어 내가 기만당하고 있다는)을 배제하지 않고서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드레츠키는 이것이 말장난에 불과하다고 일축한다. 병 안에 쿠키가 있다는 시지각 그 자체는 <쿠키가 가짜가 아니라는 것>에 대한 증거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를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우리 경험이 일반적으로 믿게 하는 것(<병에 쿠키가 있다는 것>)에 의해 <우리가 기만당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 함축된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기만당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고 말하는 것은 터무니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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