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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2월 11일 월요일

[요약정리] Westman, R. S. (1994). "Two Cultures or One?: A Second Look at Kuhn's The Copernican Revolution"

『코페르니쿠스 혁명』에 대한 간략한 소개
(『과학혁명의 사상가 토머스 쿤』 2장 및 『코페르니쿠스 혁명』 일부 구절 발췌)
▶ 쿤은 지구 중심의 우주관을 뒤바꾼 천문학 혁명을 코페르니쿠스에게 돌리기엔 코페르니쿠스의 몫이 상대적으로 작다고 주장한다. 코페르니쿠스의 공헌은,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 체계를 손상시키는 것이 아니라 보존하려고 노력하던 중에 생긴 우연한 부산물로서, 지구가 움직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수학적인 설득력을 부여했다는 데 있었다.
코페르니쿠스 이전에 지배적이었던 ‘두 개의 천구’ 모델, 즉 우주가 지구를 둘러싼 하나의 천구와, 항성이 위치한 다른 하나의 큰 천구로 이루어졌다는 생각은 천문학적 관찰들 간의 관계를 체계적으로 나타낸다. 쿤은 여기서 개념적 도식(conceptual scheme)이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이것은 그 도식이 아니라면 상관관계가 없을 관찰 자료들을 상호 연결해서 관찰 자료의 함축적인 개요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러한 특정 개념적 도식의 영향을 받으면서 과학자들은 알려지지 않은 현상을 예측하고 탐구한다. ‘두 개의 천구’ 모델을 바탕으로 한 도식은 관찰과 잘 맞았으며 따라서 당시에는 지구가 움직인다는 생각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이 도식에 반하는 듯한 관찰들은 오히려 그 관찰을 도식에 맞추기 위한 연구가 계속 수행될 수 있게 한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 자연학과 점성술 역시 이 도식에 대한 근거를 제공했다. 당시까지 아무도 이 도식에 대한 인상 깊은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그러나 중세 과학과 신학의 통합, 스콜라 철학에 대한 비판, 르네상스식 사고 등 과학 외부적 요인들에 의해 이전의 과학적 유산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가 바뀌었다. 즉, 코페르니쿠스 혁명이 받아들여진 것은 과학 내적인 발전이 아니라 다양한 역사적, 사회적 변화 때문이었다. 오히려 코페르니쿠스 본인은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에 수학적인 수정을 가해 회복시키려고 했다. 우주론적 측면에서 그는 ‘두 천구 모델’을 고수했다. 그의 자연철학도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과 크게 다르지는 않다. 코페르니쿠스가 혁명적이었던 것은 지구를 행성으로 분류하는 새로운 도식을 제시한 것뿐이다.

▶ 우리가 코페르니쿠스 혁명에 대해 알고 있는 핵심적인 요소들은 대부분 행성의 위치에 대한 쉽고 정확한 계산, 주전원과 이심의 폐기, 천구들의 해체, 별로서의 태양, 우주의 무한한 확장과 같은 것일 텐데, 이를 비롯해 여타 많은 것들은 코페르니쿠스의 작업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 『코페르니쿠스 혁명』 한국어판 257쪽

▶ 코페르니쿠스에 의해, 움직이는 지구 개념으로 전향한 사람들은 코페르니쿠스가 멈춘 지점에서부터 연구를 시작했다. 그들의 시작점은 지구의 운동이었으며, 그들이 코페르니쿠스로부터 꼭 가져와야 했던 것은 그게 전부였다. (…) 코페르니쿠스는 그들에게 자기 자신이나 자신의 선배들이 직면한 적이 없었던 여러 문제들을 제공했다. 그 문제들을 추구하는 도중에 코페르니쿠스 혁명은 완성됐다. – 『코페르니쿠스 혁명』 한국어판 3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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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stman, R. S. "Two Cultures or One?: A Second Look at Kuhn's The Copernican Revolution" (1994)
발표: 학술지 ISIS

I. What Kind of Revolution Was It?
▶ 『코페르니쿠스 혁명』은 쿤이 하버드 대학교에서 했던 강의 내용을 발전시킨 것이다. 쿤은 당시 천문학에 대한 기초 지식과, 과학 혁명에 대한 역사적 서술을 통해 개념적 변화에 대해 설명했다. 이 책은 ‘두 문화’를 연결한 것으로 인식됐는데, 과학 발전의 내재적 요인과 외재적 요인에 대한 설명을 결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학자 공동체에서의 의미, 기준, 과학적 실천을 다룬 『과학혁명의 구조』가 나온 뒤 『코페르니쿠스 혁명』의 철저하게 개념적 변화에 대한 내용은 가려졌다.
개념적 변화의 연구에서 한 가지 중요한 점은 과학자들이 자신들의 발견에 대해 서술한 내용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쿤은 다음과 같은 사례로 이러한 점을 설명한다. ”코페르니쿠스주의로 전향한 사람은 달을 쳐다보면서 ‘나는 이제까지 행성을 보고 있었지만 지금은 위성을 보고 있다’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이런 말투는 프톨레마이오스 체계가 한때는 옳았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새로운 천문학으로의 전향자는 그런 말 대신에 ‘나는 한때 달을 행성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내 잘못이었다’라고 말한다.”
『코페르니쿠스 혁명』에서 쿤은 ‘개념적 도식’이라는 용어를 도입하는데, 이는 복잡한 관찰 결과를 요약하고 패턴화해서 설명하는 것이다. 그는 이론과 개념이란 실재와는 거리가 있는 일종의 도구라고 생각한다. 이론은 관찰된 사실들을 조직화하는 것이지, 관찰의 성격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혁명 과정에서 기존 관찰은 변하지 않고, 다만 새로운 개념에 의해 다시 조직화될 뿐이다.
이론과 관찰(개념적 도식의 논리적 부분)은 단지 도구일 뿐이므로, 그것들만으로는 과학자들이 왜 특정 개념적 도식에 헌신하는지 설명할 수 없다. 개념적 도식에 대한 형이상학적 믿음과 심리적 확신이 이런 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 그 다음으로는 내재적 요인들이 설명된다. 혁명은 새로운 개념과 연구방법이 과학과 과학 외 영역 모두를 변화시킬 때 끝난다. 즉 천문학, 물리학, 광학, 정치철학, 신학이 공통되고 통합된 개념적 직조물을 만들 때 혁명은 끝난다. 과학 교육의 관점에서, 『코페르니쿠스 혁명』의 이러한 내용은 과학 전통을 인문학 전통과의 관련성 하에 위치시켜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준다.
『코페르니쿠스 혁명』의 coherence-of-science 테제는 논리경험주의자들의 주목을 끌었고, 쿤이 『과학혁명의 구조』를 ‘통합과학 총서’의 일부로 내게 되는 계기가 된다. 쿤은 『코페르니쿠스 혁명』보다 급진적이고 비연속적인 과학혁명의 개념을 보여준다. 정상과학은 누적적이지만, 혁명은 개념, 도구, 방법, 설명, 사실의 의미를 완전히 바꿔놓는다.
『과학혁명의 구조』와는 달리, 『코페르니쿠스 혁명』에서 나타나는 과학의 이미지는 실증주의 및 실용주의 전통과 더 닮았다. 그렇다고 쿤이 그러한 전통을 그대로 따르는 것은 아니다. 실증주의 전통의 이론가인 뒤엠은 물리학 이론은 실재를 정확히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하고 정확하게 관찰적 사실을 표상하는 수학적 명제의 체계라고 한다. 그에 따르면 이론이 도전을 받고 수정이 요구될 때, 순수하게 표상적인 부분은 거의 전부가 새로운 이론으로 옮겨지는 반면, 설명적 부분은 새로운 설명에 자리를 내준다. 쿤은 이보다도 덜 실재론적이다. 『코페르니쿠스 혁명』에서, 개념, 법칙, 관찰은 거의 변하지 않고 전해지며, 달라지는 것은 이것들의 조직화 방식이다.

II. The Autonomy of Science and a Positive Role for the External
▶ 쿤은 과학 외부의 요소들에 대한 거부감이 적었다. 그는 심리학과 형이상학, 관념들의 역사와 같은 외재적 요인들은 새로운 개념의 가능성을 열어준다고 생각했다. 많은 과학자들은 그들이 실재를 표상한다고 믿었는데, 이러한 믿음은 예측하고 탐사하는 데에 편리했다.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관은 심리적으로 받아들이기 좋았고, 학자들은 이에 기반해 연구를 한다.
그러나 쿤에 따르면 다른 분야에서의 새로운 발견이 새로운 개념 형성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지리적 탐험이 프톨레마이오스가 틀렸을 가능성을 제기해주기도 하고, 달력 개정 과정에서 기존 천문학의 문제점이 발견되기도 한다. 이런 외재적 요소들의 기능은, 코페르니쿠스가 혁신을 내놓도록 하는 개념적 조건(환경)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코페르니쿠스의 스승이자 친구였던 de Novara는 신플라톤주의적 관점에서 프톨레마이오스의 행성에 관한 이론을 비판하였는데, 이런 점은 코페르니쿠스에게 영향을 끼쳤을 수가 있다. 하지만 이 논문의 저자는 『코페르니쿠스 혁명』에서 쿤이 이런 관점을 너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다고 주장한다.

III. The Conceptual Scheme of Astronomy: Inside/Outside
▶ 쿤은 코페르니쿠스가 생각했던 것과 다른 의미로 ‘과학’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 같다. 쿤은 증거, 합리성 등, 역사 속 인물들이 명시적으로 언급했던 가치들에 주목하지 않는다. 그 사람들의 의미가 아니라 개념적 도식이 『코페르니쿠스 혁명』의 기저를 이룬다. 개념적 도식은 과학자들에게 받아지고 있는 기하학적 모델과 관찰들로 이루어진 전문적인 문제들을 포함하는데, 이것들은 사회적 관계에서 벗어나 있다.


IV. Crisis, Aesthetics, and the Break with Tradition
▶ 5장에서 쿤은 마침내 코페르니쿠스의 혁신 그 자체를 설명하기 시작한다. 그는 이전부터 전해 내려오던 전통과 코페르니쿠스주의의 관련성과, 코페르니쿠스 이후에 일어난 일이 혁명에 끼친 영향에 대해 각각 설명한다. 전자에 대해, 쿤은 코페르니쿠스는 혁명을 시작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었으며, 그의 혁신은 행성 위치 계산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의 부산물이라고 본다. 후자의 입장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코페르니쿠스의 의도와는 다르게 그의 이론을 기존 천문학에 대한 이의 제기에 이용했다고 본다..

▶ Swerdlow는 코페르니쿠스 이전 전통과 코페르니쿠스에 대해 쿤과는 상당히 다른 설명을 한다. 코페르니쿠스의 문제제기는 그의 예전 책에서 이미 이루어졌다. 코페르니쿠스는 천구가 단단해서 equant같은 것들이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또한 코페르니쿠스 이전에도 코페르니쿠스의 체계와 굉장히 닮은 모형을 제시한 아랍 학자들이 있었는데, 우연이라고 보기에는 코페르니쿠스의 모델과 너무 비슷하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코페르니쿠스의 목적은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을 조금 수정하는 정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면적인 혁신을 의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쿤은 패러다임의 위기 상태에 대해 이야기했다. 하지만 『코페르니쿠스 혁명』에 따르면, 프톨레마이오스의 체계는 1500여 년 간 문제없이 작동했으며, 코페르니쿠스 시대의 사람들은 이 체계에 큰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정말로 위기였을까? 쿤은 이 문제에 대해 코페르니쿠스 개인의 심리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면을 고찰한다. 코페르니쿠스는 우주의 기하학적 조화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으며, 따라서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의 아주 작은 수학적 결함도 용납할 수 없었다.
외부적 요인에 대한 쿤의 강조는 철학자들에게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Lakatos나 Zahar같은 사람들은 코페르니쿠스의 사례를 합리적으로 재구성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런 시도는 성공적이지 않았다. 70년대 이후 역사학계에서 중요하게 받아들여진 역사적 설명은 역사적 인물들이 실제로 사용했던 범주와 의미를 복원하는 것이었다. 당시 사람들에게 ‘천문학’, ‘이론’과 같은 개념들은 어떻게 받아들여졌는가? 그들은 자기 주장을 내세우기 위해 어떤 설명과 설득법을 사용했는가? 어떻게 설명의 표준이 국지적인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으로 퍼져나갔는가?


V. Reception and the Demarcation Problem
▶ 쿤에 따르면 과학혁명은 과학 내부와 외부 양 쪽에서 일어난다. 혁명은 새로운 이론이 더 포괄적이고 더 많은 성과를 낼 수 있을 때, 그리고 과학 외의 영역을 과학 지식과 적절하게 조직화할 때 완결된다. 그러면 언제 과학자들은 새로운 개념적 도식으로 이동하는가?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쿤이 ‘개종’이라고 표현했던 개념은 『코페르니쿠스 혁명』에서는 아직 잘 다듬어지지 않았다. 왜 미학적 조화가 케플러와 레티쿠스(코페르니쿠스의 제자)에게는 설득력 있었는데 티코 브라헤에게는 아니었는가? 쿤은 ‘개종’에 대해 이야기하는 대신, 코페르니쿠스의 작업이 그 분야를 바꿨다고 설명한다. 코페르니쿠스는 이전의 천문학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문제(새로운 연구 목표)를 제기했다. 
그러나 이후 과학사학계에서 쿤의 해석에 대한 대한 다음과 같은 반론들이 나왔다.
1.     『코페르니쿠스 혁명』에 언급되는 많은 중심 인물들은 연구 평가의 기준과 이론적 적합성에 대해 메타적인 이해를 갖고 있었다. 또한 쿤이 보수주의적 도식으로 역사를 서술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의 작업을 단순한 문제 풀이가 아니라 신의 신성한 계획을 밝혀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2.     쿤이 사용하는 ‘코페르니쿠스주의’라는 말과 ‘개종했다’는 말은 잘못됐는데, 왜냐하면 그들 사이에서도 굉장히 다양한 부류가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케플러와 브루노(쿤은 둘 다 코페르니쿠스주의자로 분류함)의 차이는, 티코 브라헤(코페르니쿠스주의자가 아님)와 케플러의 차이보다 컸다.
3.     쿤이 설명에서 배제한 신학, 연금술, 점성술 등은 당시의 개념적 도식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당시 사람들에게 신성한 힘, 행성들의 질서, 인간사에 대한 행성의 영향 등은 중요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게다가 해석하기에 따라서 코페르니쿠스의 가장 급진적인 생각과 성경의 내용을 조화시키는 것도 가능하다.
4.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둘러싼 논쟁은 주로 학자들 사이에서 일어났다. 이러한 점에서 과학 외의 영역과의 적절한 조직화를 통해 과학 혁명이 완결된다는 쿤의 설명은 지지 받기 어렵다.
5.     당시의 학자들과 후원자들의 관계가 새로운 이론을 둘러싼 논쟁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다양한 학문적 관점에 대한 자유는 어느 정도 보장되었는지 등에 대한 고찰이 더 필요하다.


Vi. The “Two Cultures” in the Recent Historiography of the Copernican Question
▶ 쿤은 뒤엠식의 개념적 연속성 대신, 혁명적인 인식론적/사회적 단절을 통해 과학사를 서술한다. 패러다임간에는 번역이 불가능하다. 패러다임 이동은 패러다임 밖의 여러 요인들에 의해 일어난다. 최근의 다른 학자들은 문화적 공약불가능성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특히 코페르니쿠스 당시의 학자들과 그 후원자들의 관계를 분석해 보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후원자들은 자연철학을 일종의 즐길 거리로 생각했지만 그 이상의 관심은 없었다. 신분 상승을 원하는 ‘과학자’들은 그들의 지적 작업을 높은 사회적 지위를 위한 도구로 여겼다. 뛰어난 학자들을 후원하는 것은 후원자에게도 도움이 되었고 학자들은 그들의 후원자가 자신의 이론에 동의하느냐와는 별개로 자신들의 이론을 퍼뜨릴 수 있었다.


VII. The Ascendancy of Kepler: Inevitability? Incommensurability? Selective Appropriation?
▶ 『코페르니쿠스 혁명』의 서술에서 케플러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케플러 이후 쿤은 내부적 요인에 초점을 맞추고, 필연주의적인 견해를 보여준다. 외부 요인은 개념적 도식의 논리적 요소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케플러가 문제를 해결한 과정을 서술하면서 쿤은 그것이 경험적으로 잘 확립된 법칙들에 의한 것이며, 이론 내부적인 이유로 ‘코페르니쿠스 본인의 제안(V1)’보다 ‘케플러 버전의 코페르니쿠스 이론(V2)이가 더 설득력 있다고 말한다.
케플러의 동시대인들은 케플러의 저서에서 우월한 예측력을 발견했다. 그 케플러의 저서는 외부적 요인, 즉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았는데, 동시대인들은 그것보다는 케플러의 경험적 면에서 영향을 받았다. 예를 들어 뉴턴은 중력 법칙을 케플러의 경험적 법칙들에서 찾았고, 그의 신학은 별로 상관하지 않았다. V2는 V1과 다른 개념적 도식을 제공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갈릴레오는 V1의 영향을 받았고 다른 사람들을 그 쪽으로 설득했다는 것이다. 코페르니쿠스주의 내부의 차이들에 대해 쿤은 민감하게 반응하지 못했다.

▶ 한편 쿤이 이야기하는 필연성은 실제 역사와 거리가 있는 듯하다. 케플러가 한 일은 태양을 중심에 놓는 것으로 ‘가정’한 것이다. 케플러의 모델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모두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나온 식의 개종을 한 것은 아니었다. 어떤 사람들은 케플러의 모델을 티코 브라헤의 모델에 수학적으로 일치시키려고 했다. (티코 브라헤는 천동설의 옹호자)
케플러의 Epitome(‘개요’라는 뜻)이라는 책은 뉴턴의 시대까지 코페르니쿠스주의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이론서였다. 그것은 문답식으로 서술되어 있었는데, 법정과 대학의 청중들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이러한 문답식 서술은 갈릴레오의 대화 형식 저술에 영향을 주었다. 또한 주석가들에 의해 코페르니쿠스주의를 따르는 다양한 이론들이 퍼져나갔다.
이런 영향에도 불구하고 『코페르니쿠스 혁명』에는 Epitome의 영향에 대한 내용을 찾아볼 수 없다. Epitome의 내용은 『과학혁명의 구조』에 묘사되는 정상과학 교과서의 특징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은 지난 세대의 천문학을 무시하지 않고, 공약 불가능하게 서술되어 있지도 않다. 케플러는 그의 책을 오랜 기간 동안의 천문학 교육 매뉴얼의 축적이라고 본다.
당시에는 이론들의 선택적 취합이 무척 자유로웠다. 공약 불가능한 패러다임들간의 경쟁, 양자택일의 구도로는 당시의 과학 활동을 이해할 수 없다. 예를 들어 갈릴레오와 데카르트는 Epitome의 주요 내용을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이 새로운 천문학이라는 생각을 거부했다. 쿤은 『코페르니쿠스 혁명』에서 예수회 천문학자들을 언급하지 않는데, 실은 그들이 케플러의 가장 큰 적이었다. 그러나 그들도 케플러 천문학의 중요한 부분을 받아들였고, 이는 의도치 않게 케플러의 이론을 퍼뜨리는 결과를 낳았다.

▶ 쿤이 『코페르니쿠스 혁명』을 출판하던 시기에, 학생들은 코페르니쿠스의 세계관을 무조건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수업을 들었다. 그 정당성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에 대한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코페르니쿠스 혁명』의 개념사는 전문가와 아마추어, 과학자와 인문학자 사이에 다리를 놓아준다.

VIII. Newton and the Ethos of Scientific Autonomy
▶ 쿤은 뉴턴을 최종적인 문제 해결자로 본다. 뉴턴은 케플러의 법칙에 대한 적절한 설명을 제공했다. 그는 V1과 V2를 믿을만하게 만들었다. 뉴턴의 개념적 도식은 기존의 것을 모두 설명하면서 새롭게 설명할 수 있는 현상을 더했다.

▶ 『코페르니쿠스 혁명』의 뉴턴에 대한 부분에는 외부적 요인에 의한 설명이 거의 사라졌다. 대신, 쿤은 이제 코페르니쿠스 혁명의 영향에 주목하며, 과학이 변화시킨 사회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나 쿤은 그는 뉴턴의 예언, 연금술, 신학적 저술들에 대해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두 문화의 분열을 재생산한다.
뉴턴은 다양한 요소들을 통합적으로 이해하려던 사람이었다. 수학적, 물리학적 탐구는 신이 창조한 세계관에 대한 이해의 일부였다. 역설적으로, 기존 역사 속 뉴턴의 이미지는 자연신학(신의 계시가 아닌 사람의 이성으로 자연을 연구함으로써 신의 존재와 속성을 연구하는 신학 사조)이 번창하던 시기에 그것의 가장 중심적인 부분이 되었다.
19세기 중반에는 성과 속을 화해시키려는 노력이 줄어들었고, 역사가들은 ‘세속화된’ 뉴턴을 과학의 자율성의 표상으로 받아들이는 한편 그의 비과학적인 연구들을 그의 과학 연구들과 조화시키는 것을 곤란하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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