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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2월 11일 월요일

[요약정리] Ramsey, Jeffry L. (1997). "Molecular Shape, Reduction, Explanation and Approximate Concepts" - 수정 필요

Ramsey, J. L. (1997). Molecular shape, reduction, explanation and approximate concepts. Synthese111(3), 233-251.

0.
화학이 물리학으로 환원된다는 점에 동의하지 않는 철학자들은 거의 없다. 화학이 물리학으로 환원되는 것이 실질적으로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원리적 가능성은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설명적으로는 화학적 개념이 환원 불가능하다는 주장도 있다. 한 사례로 분자 모양은 화학적 개념으로 화학에서만 설명력을 갖는다.[1] 그러나 분자 모양에 물리적 실체가 있는지, 혹은 단지 개념일 뿐인지는 좀 더 숙고해봐야 한다.
환원에 대한 일반적인 관념과는 달리 저자는 모양이 설명적으로 환원된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모양이 존재론적으로 환원 가능하다는 기존의 주장에 완전히 반대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동시에 모양이 단지 개념적인 것에 불과한 것도 아니며, 오히려 뚜렷한 인과적 속성을 갖는 실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생각은 겉보기에 모순되어 보이나, 저자는 환원과 이론적 설명에 대한 관념이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환원에 대한 표준적 모형들은 서로 다른 층위 간의 구조적 연결에 기반을 두고 있는데, 층위에 대한 전제를 다시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1.
화학 수업에서 가르치는 ‘통속적 분자 이론’에서의 모양, 즉 원자를 나타내는 공들이 결합을 나타내는 막대로 연결된 모양은 일종의 메타포이다. 양자역학에서는 이러한 모양이 거부된다. 통속적 분자 이론은 화학자들이 기존 이론과의 연속적인 설명을 위해 계속 써온 잘못된 표상에 불과하다. 저온 분자 빔을 이용한 실험에서는 기존의 통속적 분자 이론에서 설명될 수 없는 상태가 발견된다.
이론가들은 분자의 고유상태를 정확하게 기술하기 위해서는 더 정확한 양자역학, 즉 핵과 전자 운동을 분리시키지 않는 양자역학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핵과 전자 운동의 분리는 보른-오펜하이머 근사나 다른 몇 가지 종류의 근사들을 이용해 이루어지는데, 이러한 근사들은 형식적으로만 유효하고 물리적 사실에 대한 표상에는 실패한다.[2] EPR correlation은 고전적 분자 구조 개념을 완전히 배제한다.
2.
반환원주의자들은 모든 환원이 제거적 환원주의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환원이 성립하려면 모양이 다음과 같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1)   성숙한 양자역학에서 유도되어야 한다.
(2)   양자역학의 관점에서 자연스럽게 분리(naturally isolable)되어야 한다.
반환원주의자들에 따르면 분자 모양과 양자 역학의 관계는 위의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분자 모양은 양자역학에서 유도되지 않기 때문에 (1)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또한 (2)도 만족시키지 못하는데 예를 들면 양자역학적 계산은 이성질체를 구분하지 못한다.[3] 따라서 모양은 개념일 뿐이며 실재하는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위의 조건에 따른 환원이 유일한 환원은 아니다. 한 층위의 사건이 다른 층위에서 바로 따라 나오는 것은 너무 강한 조건이다. 저자는 뉴런 활성을 예로 들어 이 점을 설명한다. 뉴런의 활성은 분명 물리적 사건이지만, 물리학의 층위에서 자연스럽게 분리 가능하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뉴런 활성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뉴런은 여러 부분으로 나뉘고, 각각의 부분은 물리학에서 자연스럽게 분리 가능하다. 뉴런은 부분들을 갖는 복합적인 구조이고, 각 구조는 더 근본적인 층위로 분리 가능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통속적 분자 이론은 양자역학의 관점에서 자연스럽게 분리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분리 가능한 부분으로 분해될 수 있으면 충분하다. 우리가 양자역학에서 이성질체를 자연스럽게 분리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환원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같은 논리가 핵과 전자의 분리된 운동에도 적용된다. 분리된 운동, 즉 공-막대 모형은 양자역학의 관점에서 자연스럽게 분리될 필요가 없다. 양자역학의 식에서 우리는 물리적 의미를 갖는 항들을 포착할 수 있고, 공-막대 모형은 그러한 항들로 분해 가능하다.


3.
저자는 다시 모양이 그저 개념적인 것인지, 아니면 객관적인 속성인지에 대한 문제로 돌아간다. 이에 대해 답하기 위해서는 환원의 개념이 바뀌어야 한다. 환원가능성에 대한 논변은 대개 층위의 개념을 전제하고 있다. 하지만 층위의 개념은 다시 고려되어야 한다.
궁극적으로 실재는 오직 하나의 층위이다. 환원 불가능성은 통속적 분자 이론이 근본적인 원리와 분리된 층위를 갖는다는 관점에 의존한다. 이러한 관점은 부적절하다. Bohm과 Hiley는 양자역학이 일정 범위 내에서는 핵과 전자 운동을 분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4] 그리고 대부분의 화학적 상태는 이 범위 내에 있다. 따라서 이 범위 내에서는 통속적 분자 이론도 양자역학과 정합적이다.
범위에 따라 다른 설명이 적용될 수 있다는 점은 적외선 분광법(IR Spectroscopy)의 사례에서도 볼 수 있다. 적외선 영역에서는 분자의 회전 운동이 감지되지 않는다. 하지만 마이크로파 영역에서는 회전 운동도 감지할 수가 있다. 사용하는 해상도에 따라 얻을 수 있는 정보가 다른 것이다. 

4.
앞의 논의를 바탕으로 분자 모양은 환원 가능한지, 아니면 개념일 뿐인지의 문제로 돌아오자. 이 문제는 철학적 개념인 ‘환원’과 물리적 개념인 ‘모양’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달려있다. 네 가지 가능한 해석이 있다.
1.     만약 환원이 물리학의 표현 내에서 자연스럽게 분리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모양은 환원 불가능하다.
2.     만약 환원이 물리학의 법칙으로 설명된다는 것으로 해석된다면, 모양은 어떤 의미의 설명에 대해서도 환원 불가능하다.
3.     만약 모양이 물리적 층위와 구분되는 층위를 말한다면, 환원에 대한 어떤 해석 기준에서도 환원 불가능하다.
4.     만약 모양이 어떤 물리적 시스템의 한 특성으로 여겨지나 시간과 측정에 의존한다면, 모양이 근사적으로 그리고 존재론적으로 환원 가능하다고 할 수도 있다.
환원 불가능성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1~3번을 지지하지만, 저자는 4번을 지지한다. 4번은 모양 문제를 설명적이나 인식론적 차원이 아니라 존재론적인 차원에서 강조한다.
저자는 많은 화학적 개념들은 설명적으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점에 동의한다. 연결되어야 할 분리된 층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기존의 환원 모델에서 제기된 문제는 발견되지 않는다. 이는 모든 논쟁에 공통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단일한 환원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함축한다.
각각의 이론적, 실험적 기술들은 각자 고유한 특징이 있어서, 다른 기술을 사용하면 같은 것을 다른 관점에서 볼 수 있다. 우리 관심사와 능력에 따라 기술을 선택할 수 있다. 때로는 분자가 모양을 갖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따라서 화학이 물리학에 존재론적으로 의존하지만 인식론적으로는 분리되어 있다는 주장은 의미를 잃는다. 예를 들어 어떤 실험이 모양에 의거한 설명과 잘 맞는다면, 모양은 개념일 뿐이라는 이론적 관점에 꼭 따를 필요가 없다.
게다가 이론이 하나만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모양이 오직 양자역학에 의해서만 해명될 필요는 없다. 모양은 하나의 실재지만, 우리는 다양한 근사를 통해 모양의 서로 다른 측면을 본다. 모양에 실체가 있는지 아니면 개념에 불과한지는 인식론적 차원이 아니라 존재론적 차원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모양은 우리가 사용하는 도구의 해상도에 따라 다르게 표상된다. 표상의 정도가 아니라 인과적 속성이 실재의 근거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관점은 본질주의와 내재적 속성의 개념에 흥미로운 결론을 가져다 준다. 본질주의자들은 ‘x는 F를 본질적으로 갖는다’는 문장을 ‘x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F를 가져야 한다, 그리고 x가 F를 본질적으로 갖는지 아닌지는 x가 선택되는 방법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Primas와 Woolley에 따르면 분자 모양에 대한 논의는 이런 해석을 지지하지 않는다. 철학적으로, 'x가 F를 가지는지 아닌지'는 엄밀하게 형식화되어 있다. 하지만 물리적으로 볼 때, 어떤 속성은 이와 같이 형식화되지 않는다. 모양은 내재적 속성이라기보다는 반응적 속성(response property)이다.
Primas와 Woolley는 모양을 독립적인 이론들의 공존에서 따라 나오는 일종의 게슈탈트로 본다. 그러나 저자는 모양에 대한 본질주의가 실패하는 이유는 그것 때문이 아니라, 모양의 근사적 본성을 지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가 어떤 모양을 택할지는 우리가 어디에 관심을 갖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같은 반응적 속성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표상이 있을 수 있다.

[1]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저자들은 분자 구조(Molecular Structure)와 분자 모양(Molecular Shape)이라는 단어를 구분하여 사용한다. 분자 구조는 원자의 배열을 말하는데, 분자 모양은 구조뿐만 아니라 전자의 분포, 결합의 길이 등 분자의 전체 모양을 뜻한다.
[2] 핵과 전자 운동을 분리시키는 근사는 ‘통속적 분자 이론’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3] 이성질체란 구성 원자들은 같지만 구조가 다르기 때문에 성질이 다른 분자들을 말한다. 예를 들어C3H4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구조를 가질 수 있다.
[4] 그 범위는 에너지의 불확정성 범위이며, 다음과 같이 계산될 수 있다. 양자를 wave packet으로 본다면, 측정 기구로 이 wave packet이 완전히 들어가는 데 Δt = Δx/v 가 걸린다. 그러나, 그 웨이브 패킷은 E = p^2/2m의 에너지를 갖는 입자이기도 하므로, 에너지는 ΔE = 2p Δp / 2m = v Δp.의 불확정성을 갖는다. 따라서 불확정성은 ΔEΔt = ΔpvΔt = ΔpΔx ≒ h를 갖는다.
참고로 불확정성 원리는 ‘입자의 위치와 속력을 동시에 측정할 수 없다’는 식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다른 물리량들의 관계에서도 성립한다. 여기서 언급하는 것은 에너지와 시간 사이의 불확정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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