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gel, T. (1974). What is it like to be a bat?. The philosophical review, 83(4), 435-450.
번역: 김동광 역. 「박쥐가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이런, 이게 바로 나야!』
관련 내용(PhilPapers의 'What It Is Like' 항목)------------------------------------------------
'어떤 것이다'(what it is like)라는 구절은 현상적 의식을 언급할 때 자주 쓰이는 구절이다. 예를 들어 '박쥐가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빨간색을 본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라고 묻는 것은 그와 관련된 의식 상태에 대해 묻는 것이다. '어떤 것인지 안다'(knowing what it is like)라는 표현은 의식적 상태에 대한 지식을 언급할 때 자주 사용한다. 어떤 사람들은 물리적 지식이 이런 상태에 있는 것이 어떤 것인지 설명하기에 충분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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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은 심신 문제를 다루기 힘들게 만든다. 환원주의 논의는 환원 일반에 관한 것으로, 심신 문제의 고유한 측면을 반영하지 못한다. 기존에 논의된 환원 개념은 의식에 적용할 수 없다. 저자는 '왜 일반적인 환원의 사례가 마음과 뇌의 관계를 우리에게 이해시키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인지, 즉 현 시점에서 왜 우리는 정신 현상의 물리적 성질에 대한 설명이 어떤 것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지에 대한 것'을 이 논문에서 다루겠다고 말한다.
어떤 생물이 의식 경험을 갖는다는 것은 그 생물 특유의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어떤 생물이 의식적인 상태를 갖는다는 것은 그 생물이 되는 것과 같은 무엇, 즉 그 생물에게만 특유한 무언가가 존재할 가능성이 있을 때에 국한해서이다. 따라서 경험은 주관적 성격을 띤다. (의식이 없는 단순한 생물체는 그 생물 고유의 경험을 갖지 못한다.) 기존의 환원 개념에는 경험의 주관적 성격이 빠져 있다.
또한 경험의 주관적 성격은 마음이 갖는 기능적 상태나 지향적 상태, 인과적 역할로서 분석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상태들이나 역할은 인간과 똑같이 행동하지만 경험을 갖지 않는 로봇이나 자동인형에게도 똑같이 적용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 (원문의 'intentional state'가 번역본에는 '의도적'이라고 되어있지만 '지향적 상태'가 맞는 것 같다. 마음에 대한 분석의 예시로 기능적 상태와 '의도적 상태'를 언급하는 것은 범주가 맞지 않다. 또, 뒤에서 경험을 갖지 않는 로봇이나 자동인형에 대해서 'intentional state'를 통한 분석이 가능하다고 하는데, 로봇이나 자동인형에게 '의도'가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물리주의를 옹호하려면 경험이 갖는 현상학적인 특성에 대한 물리적인 설명이 주어져야 한다. 그런데 주관적인 현상은 단일 관점과 결부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어떤 물리 이론이 객관적이라고 하기 위해서는 단일 관점을 넘어서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을 보이기 위해 저자는 박쥐를 사고 실험 대상으로 삼는다. 박쥐는 포유류로서 인간과 적당히 가까운 동물이므로 경험을 갖는다는 것이 확실해 보이는데, 박쥐의 감각 기관은 인간과 크게 다르기 때문이다. 박쥐는 고주파를 내보내고 이것이 물체에 반사되어 돌아오는 것을 감지하는 소나(sonar, 반향 위치 결정법)를 통해 물체의 위치, 크기, 질감 등을 감각한다. 이러한 감각은 인간의 감각과 매우 이질적이어서, 우리 자신의 경험을 통해 박쥐의 경험을 이해하기가 힘들다. "내가 갖고 있는 현재의 경험에 무언가를 덧붙이거나 그 경험에서 일부를 삭제하거나, 부가 삭제 변형 등 온갖 방식으로 조합한 무언가를 상상해 내도 박쥐의 경험을 상상할 도리는 없다. (...) "만약 어떤 사람이 적절한 개념이나 이론을 발전시켜서 그들의 풍부한 경험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면 정말로 대단한 업적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본성에서 기인하는 제약 때문에 박쥐들의 경험을 이해할 수 있는 문은 영원히 닫혀 있을지도 모른다."
인간이 기술(describe)하거나 이해할 수 없다고 해서 그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비합리적이다. 인간 언어에서 참으로 간주되는 것들로 구성되지 않는 사실이 존재한다. 즉, 어떤 사실에 대해 말하거나 이해할 수 없다 해도 그러한 사실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인간의 구조 자체가 그것들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유형의 개념들에 의해서는 작동할 수 없도록 되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위와 같은 고찰은 심신 문제에 대해, 특히 경험의 주관적인 성격에 대해 일반적 논의를 가능하게 해준다. 경험을 객관적으로 기술하는 것은 그 기술의 대상과 충분히 비슷한 누군가가 그 대상의 관점을 채택할 수 있을 때만 가능하다. 따라서 박쥐가 되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개념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박쥐의 관점을 취해야 한다. (눈 감고 거꾸로 매달려보는 느낌을 상상하는 것은 기껏해야 우리가 박쥐'처럼' 행동할 때의 느낌을 알려줄 뿐이다.)
그런데 박쥐 고유의 경험을 박쥐의 관점에서만 접근할 수 있다면, 그러한 경험이 갖는 성격이 어떻게 박쥐의 물리적 과정을 통해 설명될 수 있는지 문제가 된다. 물리적 설명은 객관적으로, 즉 각자 다른 지각 체계를 가진 다양한 관점의 개체들에게도 공통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경험의 경우 특정 관점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주관적인 관점을 포기하고 경험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려고 시도하면 오히려 경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우리는 '정신적 과정은 곧 물리적 과정이다'라는 물리주의가 어떻게 옳은지에 대한 개념을 전혀 갖고 있지 않다. 'X는 Y이다'라는 명제에서 '이다'라는 말을 정말로 이해하려면 우선 X와 Y가 무엇인지에 대해 알아야 하며, 왜 이것이 참일 수 있는지 이해해야 한다. ('물질은 에너지이다'라는 명제를 이해하려면 물질, 에너지가 각각 무엇인지 이해해야 하고, 둘이 같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도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물리주의의 명제가 어떻게 참일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갖고 있지 않다. 우리는 마음에 대한 용어와 물리적인 용어가 어떻게 동일한 대상을 지시할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어떤 것이 참이라는 증거가 있다는 점과, 우리가 그것을 정말로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은 별개이다. 내 경험의 본성이 물리적으로 기술될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나의 경험이 객관적인 본성을 갖는다는 점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해야 한다.
또한, 마음에 대한 용어로 물리적 사건을 지시한다고 할 때, 그것을 통해 물리적 사건에 대한 정신적 지시가 확보되는 작용으로서 분리된 주관적 사건이 다시 등장한다. (we construe the reference of mental terms to physical events on the usual model, we either get a reappearance of separate subjective events as the effects through which mental reference to physical events is secured, or else we get a false account of how mental terms refer (for example, a causal behaviorist one)
> (제대로 이해 못 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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