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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2월 11일 월요일

[번역] 게리 거팅, "메리와 좀비: 과학은 의식을 설명할 수 있는가"

게리 거팅, "메리와 좀비: 과학은 의식을 설명할 수 있는가?"



우리는 과학을 신뢰하는데, 왜냐하면 과학이 경험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험 그 자체는 주관적이기 때문에 객관적이고 과학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워 보인다. 빨간색을 보고, 고통을 느끼고, 사랑에 빠지는 등의 경험이 뇌의 상태 같은 물리적 세계에 의존하기 때문에, 과학이 원리적으로는 경험을 완전히 설명할 수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경험 그 자체가 물리적이라는 생각은 이해하기 어렵다. 경험이 객관적인 물리적 사실들과 관련이 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주관적인 현상인 경험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내가 강렬한 고통을 느낄 때 과학자들은 그 고통을 야기하는 뇌 내의 현상을 관찰할 수 있겠지만, 내가 느끼는 바로 그 고통을 관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과학으로 관찰 가능한 것은 공개적이고 객관적인 것이다. 반면 내가 느끼는 것은 사적이고 주관적인 것이다.

| 두 가지 유명한 사고실험은 경험이 물리적이지 않다는 것을 시사한다.

경험이 어떻게 물리적인지 이해하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단지 우리가 적절한 개념들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생화학이 발전하기 전에, 사람들은 생명체가 어떻게 완전히 물리적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 생명체가 물리적이라는 생각은 훨씬 그럴 듯해 보인다. 마찬가지로 미래에 과학이 발전하면 경험들이 어떻게 완전히 물리적인지 이해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그러나 경험이 완전히 물리적일 수 없다는 점을 시사하는 두 사고 실험이 제안되었고, 이를 둘러싼 흥미로운 철학적 논의들이 있다. 이 문제가 완전히 종결되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꽤 많은 철학자들이 이 사고 실험들에 동조하면서 경험이 완전히 물리적이라는 주장에 중요한 반박들을 제기했다.

먼저, 메리라는 이름의 뛰어난 신경과학자를 상상해보자. 메리는 색깔에 대한 신경과학이 완벽하게 발달한 미래에 살고 있고, 색깔 지각의 전문가이기 때문에 색깔과 색깔 지각에 대한 모든 물리적 사실들을 알고 있다. 그러나 메리는 태어날 때부터 색맹이었다. (원래 이 사고 실험은 메리가 온통 흑백인 곳에서 살았다고 가정하지만, 나는 이 이야기를 약간 변형했다.)

다행히도 자신의 연구 덕분에 메리는 정상적인 시각을 얻을 수 있는 수술을 받았다. 수술이 끝나고 안대를 제거했을 때, 메리는 방 안을 둘러보며 남편이 보낸 붉은 장미꽃 다발을 보았다. 그 순간 메리는 빨강이라는 색깔을 처음으로 경험했고 그제서야 빨강이 어떻게 보이는지 알게 됐다. 분명히 메리의 경험은 색깔에 대해 몰랐던 사실을 새로 알게 해준 것 같다. 그러나 수술 전에 메리는 색깔에 대한 모든 물리적 사실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색깔에 대해 물리적이지 않은 사실이 존재한다고 결론내릴 수 있다. 물리 과학은 색깔에 대한 모든 사실을 표현할 수 없다.

둘째로, 철학적 좀비에 대해 생각해보자. 뇌를 뜯어먹는 영화 속 좀비들과 달리 철학적 좀비들은 인간과 물리적으로 똑같지만 내적인 주관적 경험을 완전히 결여하고 있다. 예를 들어서, 다른 우주에서 당신과 물리적으로 완전히 동일한, 즉 모든 소립자들이 완전히 똑같은 방식으로 배열되어 있는 쌍둥이가 존재한다고 상상해보자. 이 쌍둥이가 경험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 논리적으로 가능한가?

물론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에서는 자연법칙에 의해 객관적인 물리적 구조와 주관적 경험이 연결되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자연법칙은 논리적으로 필연적이지 않다(자연법칙이 논리적으로 필연적이라면 마치 논리법칙이나 수학법칙을 발견하는 것처럼 자연법칙도 경험적 사실과는 상관없이 순수하게 추론만으로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다른 우주에서는 나와 물리적으로는 완전히 동일하지만 경험은 갖지 않는 좀비 쌍둥이가 존재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가능하다.

좀비 쌍둥이의 존재가 논리적으로 가능하다면, 그것은 경험이 물리적 구성을 넘어서는 무언가와 관련되어 있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내 좀비 쌍둥이의 물리적 구성은 나의 물리적 구성과 완전히 같지만 경험은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물리 과학이 내 경험에 대한 모든 사실을 표현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 두 사고 실험이 설득력 있다고 생각하는 철학자들도 경험이 물리적이라는 것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결론내리지는 않는다는 점은 유념해야 한다. 예를 들어 빨간색을 볼 때, 우리가 색깔에 대한 주관적 감각을 갖기 전에 광자가 눈의 망막에 부딪히고 망막의 정보가 처리되는 물리적 과정들이 이어진다. '본다'는 것에는 이처럼 완전히 물리적인 의미가 있다. 이것이 감시 카메라가 누군가가 방에 들어오는 것을 '본다'고 표현할 수 있는 이유이다. 그러나 '보고 있는' 카메라는 주관적인 경험을 갖지 않는다. 즉, 카메라에게는 무엇인가를 보는 것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 현상적 의식(phenomenal awarness)이 없다. 현상적 의식은 우리가 카메라에 찍힌 것을 볼 때만 나타난다. 경험이 물리적이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이다. 물론 우리에게 의미 있는 풍부한 내적 경험을 구성하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의 경험이다.

몇몇 철학자들은 이 사고 실험들이 영혼같은 초자연적인 존재자가 존재한다는 점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메리 이야기를 처음 만든 프랭크 잭슨(Frank Jackson)이나, 철학적 좀비 이야기를 설득력 있는 형태로 제시한 데이비드 차머스(Daivd Chalmers)같은 철학자들은 여전히 철학적 자연주의자들이다. 그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넘어선 초자연적 세계가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그보다 그들의 주장은 물리적 설명의 범위에 포착되지 않는 자연적 실재(의식)가 이 세계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특히 차머스는 "자연주의적 이원론"이라는 입장을 옹호하는데, 이것은 환원되지 않는 주관적(현상적) 속성들을 상정함으로써 의식에 대해 자연주의적 설명을 할 수 있도록 물리 과학을 보충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철학자들은 잭슨과 차머스의 논증이 자연적 신체와 초자연적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는 전통적인 이원론을 옹호하는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나 자신은 이 사고 실험에서 제기된 질문들에 대해 확고한 결론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Stone의 독자들이 가지고 있을 아이디어와 주장들이 무척 궁금하다. 우리는 지식 동료들(epistemic peers) 사이의 의견 불일치가 무척 생산적일 수 있다는 점을 알았고, 이로 인해 나는 현재의 철학적 주제에 대해 '크라우드 소싱'(crowd sourcing)을 하는 것이 가치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전문 철학자들은 철학자가 아닌 사람들이 갖고 있지 않은 전문적인 기술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철학적 질문에 대해 열려 있어야 하며,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지적인 사람들은 생산적이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독자들이 이 질문에 대한 의견을 공유했으면 좋겠다. 이 사고 실험들이 의식에 대해 물리 과학의 범위를 넘어서는 사실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가? 즉, 의식에는 비물리적인 측면이 있는가? 나는 대답들을 다음 주의 후속 칼럼에서 논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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