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표: 학술지 Studies in History and Philosophy of Science Part A
논문의 전체 내용 요약(발제자 추가)
■ 논문의 목적: 구조적 실재론은 인식론적이 아니라 형이상학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 인식론적 구조 실재론 비판
ㅇ 맥스웰의 관점: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세계의 구조에 한정된다.
▷ 맥스웰의 관점에 대한 비판: 맥스웰의 해석은 경험에 대한 것일 뿐이므로 존재론적 불연속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ㅇ 이론 변화 문제에 대한 실재론자의 대응: 구조적 실재론은 실재론의 범위를 구조에 국한시키는 것이다
▷ 실재론자의 대응에 대한 비판: 구조와 내용은 분리될 수 없다.
ㅇ 래디먼의 중간 결론: 구조적 실재론을 인식론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기존 실재론보다 나을 것이 없다.
■ 형이상학적 구조 실재론 주장
ㅇ 이론에 대한 의미론적 접근: 이론은 모형(혹은 구조)으로 실재를 표상한다. 모형의 예측적 성공은 모형이 실재의 구조를 올바르게 반영하기 때문이다.
ㅇ 형이상학적 구조 실재론: 세계에 존재하는 것은 구조뿐이다. 대상들은 구조의 변환에서 불변하는 것들이다.
1. 도입(Introduction)
■ 워럴(John Worrall)의 구조적 실재론
ㅇ 워럴의 구조적 실재론은 기적 불가 논증과 비관적 귀납에서 두 마리 토끼를 잡는다. 구조적 실재론에 따르면 이론 변화에서 연속성 혹은 축적이 존재하지만, 그것은 이론의 내용(content)에서가 아니라 구조에서이다. 이론 변화에서 구조가 유지되기 때문에, 구조적 실재론은 세계에 대한 이론의 기술(description)를 그대로 믿을 필요가 없다고 함으로써 비관적 귀납에 대응할 수 있다. 한편 구조가 세계를 올바르게 기술한다는 점을 받아들임으로써 과학의 성공을 기적으로 만들지 않는다.
■ 이 논문의 목적
ㅇ 이 논문은 구조적 실재론을 인식론적인 것으로 해석해야 할 지, 아니면 형이상학적인 것으로 해석해야 할 지를 다룬다. 워럴은 이에 대해서 애매한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래디먼은 만약 구조적 실재론이 단지 인식론적 주장에 그친다면 기존의 실재론과 비교해 별다른 이점이 없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래디먼에 따르면 구조적 실재론은 형이상학적 주장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또한 이를 위해서는 과학 이론들에 대한 의미론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2. 인식론적 구조 실재론(Epistemological Structural Realism)
[2절에서는 구조적 실재론은 인식론적으로 해석하는 두 가지 방식을 다룬다. 첫째는 러셀(Bertrand Russell), 맥스웰(Grover Maxwell) 등이 제시한 방식이다. 그러나 래디먼은 이런 방식은 존재론적 불연속의 문제를 풀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둘째는 실로스(Stathis Psillos) 등이 제시한 방식이다. 그러나 실로스가 스스로 주장하듯이, 이런 해석은 구조적 실재론을 기존의 실재론보다 더 나은 점이 없게 만든다. 구조적 실재론을 인식론적으로 이해하는 두 가지 방식 모두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래디먼은 구조적 실재론을 형이상학적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2.1. 러셀, 맥스웰, 램지 구조(Russel, Maxwell and Ramsey Structure)
■ 맥스웰의 관점
ㅇ 맥스웰은 강한 과학적 실재론을 옹호하면서, 실재론이 이론적 용어의 의미에 대한 개념 경험론(concept empiricism)과 양립 가능하게 하길 원했다. 또, 그는 우리가 관찰 불가능한 존재자에 대한 인식을 어떻게 수 있는지 설명하길 원했다. 맥스웰이 보기에 문제가 되는 점은 우리가 접촉하지(acquaint) 않는 존재자들(entities)과 과정들(processes)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존재자들과 과정들을 어떻게 알고, 어떻게 지시할 수 있는가?
ㅇ 맥스웰이 내린 답은 러셀의 후기 철학에 따라 구조와 관계를 강조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구조와 관계를 기술을 통해, 즉 그것의 구조적 속성을 통해 알 수 있다. 맥스웰이 보기에 이러한 점이 우리 인식의 한계였다. 이론적 용어들의 의미는 순수하게 구조적인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ㅇ 이론의 구조는 그 이론이 담고 있는 이론적 용어의 인지적 내용을 완전히 포함한다(exhaust). 이러한 점은 그 이론의 램지 문장을 고려하게 한다. 램지 문장은 이론에서 이론적 용어들을 없애고 그것들을 존재양화에 속박된 술어변항들로 대체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이론의 관찰 가능한 귀결들은 남지만 관찰 불가능한 것들에 대한 직접적인 지시는 제거되고, 이론적 내용을 그것의 관찰 가능한 행동과 연결시키게 된다.
ㅇ 그러나 램지 문장이 이론에서 이론적 존재자들을 제거할 수 있게 해준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이론적 존재자들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단지 이론적 용어들로 직접적으로 지시되지 않을 뿐이다. 램지 문장에서 이론적 대상들은, 그 직접적인 지시체가 접촉에 의해 알려질 수 있는 변항들, 연결사들, 양화사들과 술어들을 통한 기술 혹은 논리적 형식에 의해 간접적으로 지시된다.
ㅇ 따라서 맥스웰(과 러셀)은 관찰 불가능한 영역에 대한 지식은 내재적 속성에 대한 것이 아니라 구조에 관한 것이거나, 2차 속성들에 관한 지식으로 제한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구조적 실재론을 인식론적 영역에 제한하는 것이고, 과학적 실재론의 존재론적 개입(ontological commitment)을 수정하지는 않는다. 객관적인 세계는 관찰 불가능한 대상들로 구성되어 있고 그 대상들 사이에는 특정 속성들과 관계들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속성들과 관계들의 속성들과 관계들', 즉 객관적 세계의 구조만 알 수 있을 뿐이다.
■ 맥스웰의 관점에 대한 비판
ㅇ 이런 관점에는 1928년에 뉴먼이 처음 제기했고 1985년에 디모풀로스(William Demopoulos)와 프리드먼(Michael Friedman)이 다시 논의한 문제가 있다. 기본적인 문제는 구조가 세계에 존재하는 어떤 관계들을 유일하게 가려내기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세계가 몇몇 대상들로 이루어져 있고 그 대상들은 R이라는 관계들을 통해 구조 W를 이루고 있는데, 다른 정보는 주어지지 않았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그 대상들이 어떤 것이든 간에 똑같은 구조 W를 만들어낼 수 있다. 이론의 공리들이 일관적이고, 그 공리들의 순수하게 관찰적인 귀결들이 참이라면, 그에 상응하는 램지 문장이 참임은 2차 논리나 집합론에 의해 따라 나온다. 따라서 형식적 구조는 유일한 지시체를 골라내지 않는다.
ㅇ 이런 이유로, 디모풀로스와 프리드먼은 이 때문에 이론을 램지 문장으로 환원하는 것은 이론을 그 이론의 경험적 귀결로 환원하는 것과 동등하다고 결론 내린다. 결국 러셀의 실재론은 관찰 가능한 귀결들이 같은 모든 이론들은 동등하게 참이라는 현상론(phenomenalism)이나 엄격한 경험론의 한 가지일 뿐이다. 이러한 결론은 다른 경로로도 도달될 수 있다. 잉글리시(Jane English)는 양립 불가능한 두 램지 문장은 관찰 가능한 귀결들의 전부를 공통으로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증명했다. 다른 말로, 우리가 이론을 그저 그것의 램지 문장으로 취급하면 경험적 동등성이 곧 이론적 동등성이 되어버린다.
ㅇ 따라서 이론의 구조와, 그 이론의 램지 문장의 구조를 동일시하는 것은 워럴의 의도와 부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워럴은 이론의 구조에 대한 개입이 이론의 경험적 층위에만 한정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국 램지화를 채택하면 존재론적 불연속의 문제는 건드리지 않은 채로 남아있게 된다. 따라서 구조적 실재론에 대한 이런 방식의 인식론적 이해는 이론 변화의 문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2.2. 이론 변화 문제(The Problem of Theory Change) [비관적 귀납]
■ 이론 변화 문제에 대한 실재론자의 대응
ㅇ 이론 변화 문제는 실재론에 문제를 제기하지만, 이론 변화에서 보존되는 부분에만 한정된 것으로 실재론을 받아들이는 전략을 사용하면 실재론은 여전히 옹호될 수 있다. 하지만 이론 변화에서 보존되는 부분은 참이기 때문에 보존되고 포기되는 부분은 거짓이기 때문에 포기된다고 한다면 사후설명(ad hoc)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 전략에 필요한 것은 이론에서 보존되는 부분과 포기되는 부분을 구분하는 원칙을 확립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구조적 실재론은 존재론적 개입의 영역을 구분 짓는 방식을 제공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즉, 이론의 지시적 성공을 구조에 한정하는 것이다.
■ 실재론자의 대응 비판 [실로스는 실재론자이지만 구조적 실재론에 비판적이다.]
ㅇ 파피노(David Papineau)와 실로스는 구조적 실재론이 이런 역할을 할 수 없다고 비판했고, 래디먼도 이에 동의한다. 실로스는 구조적 실재론이 이론의 구조와 내용의 구분을 전제하고 있거나, 구조를 아는 우리의 능력과 세계의 본성을 아는 우리의 능력의 구분을 전제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실로스에 따르면, 합리적인 실재론자들은 이런 구분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는 과학 혁명의 한 가지 성공은 '형식'(forms)과 '실체'(substance)의 구분을 없앴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ㅇ 실로스가 보기에 성숙한 과학에서 말하는 속성들은 그것을 포함하는 법칙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마찬가지로, 맥멀린(Ernan McMullin)에 따르면 우리가 전자들의 행동을 법칙, 상호작용 등의 용어로 기술하는 이론을 가지고 있으면 그것은 전자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법칙, 상호작용 등이 구조에 해당하고 전자는 내용에 해당하는데, 전자에 관한 법칙이나 상호작용을 기술하는 것은 전자라는 내용과 법칙, 상호작용이라는 구조를 함께 말하고 있는 것이다.] 구조적 실재론자들은 관찰 불가능한 존재자에 대한 내용과, 관찰 가능한 구조를 분리해서 후자만 인식할 수 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내용과 구조가 연속체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구조적 실재론은 기존의 실재론에서 더 나아간 것이 없다. 이론에서 우리가 실재한다고 믿어야 할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에 대한 경계가 그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 중간 결론
ㅇ 이론 변화에서 구조가 보존된다는 워럴의 주장은 옳고, 그러한 사례는 워럴이 제시한 광학 사례 외에도 많이 찾을 수 있다. 따라서 구조가 보존된다는 워럴의 주장은 분명 어떤 통찰을 담고 있다. 그러나 워럴의 주장을 인식론적으로 해석하면 워럴의 통찰이 가지고 있는 장점을 취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 구조적 실재론을 해석할 필요가 있다.
ㅇ 기존의 실재론자들은 구조적 연속성이 존재론적 연속성으로 해석될 수 있기를 바랄 것이다. 그러나 구조가 유지된다고 하더라도 그 구조를 이루는 대상들과 그것들의 논리적 유형은 달라지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워럴의 주장은 과학 이론들의 존재론에 대한 개입을 포기할 것을 요구한다.
3. 형이상학적 구조 실재론을 향해(Towards a Metaphysical Structural Realism)
[3절에서는 먼저 형이상학적 구조 실재론을 위해 이론에 대한 의미론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구조적 실재론이 과학의 성공을 기적으로 만들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이론의 (수학적) 구조가 실재의 구조를 직접 표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구조를 원초적인 것으로 보는 새로운 형이상학으로의 전환을 뜻한다. 기존 형이상학에서 이론의 대상이라고 여겨지던 것들은 이론들의 변환에서 나타나는 불변항으로 이해될 수 있다.]
3.1. 의미론적 접근과 구조적 실재론(The Semantic Approach and Structural Realism)
■ 과학 이론에 대한 구문론적 접근과 의미론적 접근
ㅇ 구조적 실재론이 기존의 실재론과 도구주의 모두에 대한 대안이 되려면 이론에서 상정하는 존재론 모두를 받아들이지는 않으면서, 인식적 제약(epistemic commitment)이 경험적 내용에 그쳐서는 안 된다. [경험적 내용 이상, 이론의 존재론 전체 이하] 따라서 이론과 그 이론의 구조를 적절히 특징지을 필요가 있다.
ㅇ 구문론적 접근, 즉 이론을 문장들의 집합으로 보는 접근에서, 실재론은 전체 이론에 대해 표준적인 대응 지시 의미론과 참에 개입한다. 그러나 2절에서 구조적 실재론을 위해 이론을 램지 문장화하는 것은 부적절함을 보였는데, 이는 이론에 대한 구문론적 개념화가 적절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 이론에 대한 의미론적 접근
ㅇ 구문론적 접근 대신, 의미론적 접근(특히, 모형-이론적 접근)이 대안이 될 수 있다. 의미론적 접근은 과학 이론들이 구조 혹은 모형을 통해 실재계(system)를 표상하는 것으로 보는 관점이다. 따라서 의미론적 접근은 그 자체로 구조에 대한 강조를 포함하고 있다. 또한 이론들은 단지 명제나 진술의 집합체가 아니고 언어 이상의(extralinguistic) 대상이기 때문에, 서로 다른 여러 가지 언어적 형식화를 통해 기술되거나 특징지어질 수 있다. [즉, 실재를 다양한 수학적 구조 혹은 모형으로 표현할 수 있다.]
ㅇ 그렇다면 이론들에 대한 의미론적 접근에서 이론적 대상들과 세계의 관계에 대한 질문들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기어리(Ronald Giere)의 구성적 실재론(constructive realism)에 따르면 과학의 모형들은 실재의 체계에서 특정 측면을 표상한다. 이러한 의미론적 접근을 채택한다면, 이제 모형 안의 관계들이 어떻게 세계의 현상들의 알려지지 않은 양상 관계들을 올바르게 예측하는지에 대해 설명할 필요가 있다.
ㅇ 카트라이트(Nancy Cartwright)는 법칙이 세계에 대한 사실적 기술이라는 이해는 잘못됐다고 주장한다. 법칙은 사실과는 다른, 이상화되고 추상화된 모형에서만 작동할 뿐이다.*
ㅇ 그러나 카트라이트의 주장과는 달리 의미론적 접근에서 상위 모형(추상적 모형)은 세계에 대한 법칙적 진술일 필요가 없다. 대신 모형들(구조들)의 복잡한 위계를 생각할 수 있다. 추상적 구조는 좀 더 하위 층위의 모형(덜 추상적인 모형)을 발전시키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게다가, 현대 물리학 이론의 구조는 매우 추상적이면서도 어떤 종류의 설명을 실제로 제공한다. 따라서 이론의 가장 추상적 구조들도 실재의 어떤 것을 ‘붙잡는다’고 봐야 한다. 실재를 붙잡는 것은 이론이 현상의 기술을 넘어서 그 사이의 양상 관계를 표상할 수 있도록 한다. [양상은 현상 층위에서 성립하는 규칙성을 넘어서, 실재에 내재된 가능성, 필연성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론이 실재를 붙잡는다면, 어떤 일이 필연적으로 일어난다거나 일어나는 것이 가능하다는 등의 양상 관계를 표상할 수 있게 된다.]
3.2. 구조(Structure)
■ 원초적 개념으로서의 구조
ㅇ 자하(Elie Zahar)에 따르면 과학에서의 연속성은 개념들의 내포에서 성립하지 외연에서 성립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론의 수학적 구조가 이론 변화에서 연속성을 가진다면, 수학적 구조가 내포로 기능하는, 즉 수학적 구조가 직접적으로 표상하는 의미론이 필요하다. 이것은 대상, 속성, 관계의 형이상학에서, 구조를 원초적(primitive) 개념으로 받아들이는 새로운 형이상학으로의 전환을 뜻한다.
■ 미결정성 문제
ㅇ 기존의 실재론이 그 대상에 구조적 개념화를 그 자체로 가지고 있다는 주장은 틀렸다. 이론적 용어들이 법칙, 방정식 등을 통해 구조적으로 이해되더라도, 기존의 실재론은 구조적 속성 이상의 것을 받아들인다. 이론은 증거에 대해 미결정된 영역에 대해서도 형이상학적으로 개입한다.
ㅇ 미결정성은 (a) 이론 선택은 합리적이지 않다는 점과, (b) 세계는 우리의 최선의 이론이 말하는 것과 같다고 믿는 것은 정당화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준다고 흔히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경험적으로 동등한 이론들이 존재한다고 해서 그 점이 이론 선택이 비합리적임을 함축하지는 않는다. (즉, (b)가 성립한다고 해서 (a)가 반드시 성립하지는 않는다.) 경험적 증거 외의 다른 증거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론 선택이 합리적 과정이라고 인정하면서도, 그 이론의 존재론을 전부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ㅇ 우리가 이론의 표준적인 형식을 결정할 수 있다고 해도 [즉, 과학에서의 미결정성 문제가 해결된다고 해도] 여전히 형이상학적 미결정성은 남는다. 예를 들어, 이론에 의해 상정되는 존재자들은 개체(individual)인가? 양자 입자나 시공간 점이 개체인지 아닌지에 대해 많은 논쟁이 있다. 기존의 실재론자들은 아마 이런 것을 결정하는 것은 과학에서 해결해야 할 일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물리철학의 최근 역사는 형이상학에서 물리학을 떼어놓을 수 없음을 보여준다.
ㅇ 봄-EPR 실험의 맥락에서 비국소성에 대한 논쟁이 한 예가 될 것이다. 이 논쟁은 세계가 국소적인지 비국소적인지는 미결정되어 있으며, possessed values, 결정론 등 어떤 가정을 선택 하냐에 따라 [어떤 형이상학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입증될 수도 있고 반박될 수 있다. 전자의 개체성 문제도 이러한 예이다. 전자들은 개체로도 비-개체로도 해석될 수 있다.
■ 개체성에 대한 새로운 이해: 변환 하에서의 불변항
ㅇ 위와 같은 예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우리는 최선의 이론들에서 상정하는 존재자들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존재론적 특성들을 결정하는 데에도 실패했다. 따라서 개체성의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다른 존재론이 필요하다. 아마 이론적 존재자를 개체로 보느냐 비-개체로 보느냐는 같은 구조의 서로 다른 표상들로 봐야 할 것이다.
ㅇ 구조를 존재론적으로 원초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이론 변화 문제와 미결정성 문제 모두에 대응할 수 있다. 우리가 어떻게 구조적 실재론을 해석할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현대 과학에서 군론(group theory)의 사용에 대해 살펴보자. 바일(Hermann Weyl)은 상대성 이론을 군론적으로 접근한다. 즉, 상대성 이론이 상정하는 존재자들을 대상이 아니라 여러 변환(transformation) 하에서의 불변항으로 보았다. 마찬가지로, 양자역학의 두 경쟁 이론들이었던 하이젠베르크의 이론과 슈뢰딩거의 이론은 같은 수학적 구조를 공유한다. 이런 관점에서, 기본 입자들은 입자 물리의 대칭적인 이론들에서 불변항들일 뿐이다.
ㅇ 여기서 철학적으로 중요한 점은 '불변성'이라는 수학적 개념이 객관성 개념을 특징짓기 위해 이용되었다는 것이다. 특정 변환들에서 불변하는 관계들만이 객관적인 상태라고 합의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 변환될 수 있는 다양한 표상들(다양한 이론들)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환들에서 불변하는 상태(state)를 찾을 수 있는데, 바로 그 상태들이 객관적인 사태(state of affairs)를 표상한다.
ㅇ 표상은 물리적 상태와 관련은 없지만 우리가 물리적 상태에 대한 경험적 지식을 얻게 해준다. 대상들은 변환 하에서 개별화하는(individuating) 불변항에 의해 포착된다.
ㅇ 형식(form)은 이론들에서 불변하는 구조에 의해 주어진다. 구조에 대한 이러한 개념은 구조적 실재론을 해석하는 한 가지 방식을 제공한다. 물론 여기에는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4. 결론(Conclusion)
■ 실재론자의 주장은 과학자들이 세계의 구조를 발견한다는 것이다. 이 구조들이 거시세계의 범주들 내에서 상상될 수 있는지는 고려 사항이 되어서는 안 된다. 개체 기반 존재론은 정신-독립적 세계의 구조가 경험 세계의 범주(categories) 내에서 상정될 수 있어야 한다고 전제한다는 점에서 비판될 수 있다. [즉, 경험 세계가 개체성을 인정한다고 해서 세계가 실제로 개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 기존의 실재론은 모형과 세계 사이의, 개별적이 아닌 전면적(global) 관계를 고려한 설명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그러한 설명은 개별 존재자에 대한 이론적 용어의 성공적인 지시나, 개별 존재자에 대한 문장들이 참인지 여부에 의존하면 안 된다. 구조적 실재론은 이론들이 세계의 대상들과 속성들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구조와 관계들에 대해 말해야 한다. [구조는 대상들에 수반하는 것이 아니라, 구조 그 자체로 원초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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