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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2월 11일 월요일

[요약정리] 브뤼노 라투르, 『젊은 과학의 전선』(책 전체)



원래 2018년 2학기 '과학기술과 사회 연구'(담당교수: 홍성욱) 수업의 기말 서평 과제로 냈던 글이다. 그러나 평가보다는 내용 요약에 중점을 두었으므로 사실상 요약정리글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도입
이 책의 원제는 'Science in Action'으로, 이 표현은수많은 행위자들의 활동으로 만들어지고 있는 상태의 과학을 뜻한다. 역자에 따르면 한국어판 제목인 '젊은 과학의 전선'은 활동적이면서 역동적이고 변화하는 테크노사이언스의 이미지를 보여주기 위해 선택한 것이라고 한다. 원제 및 번역서 제목에 잘 드러나는 대로, 이 책은 이미 확립되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과학 지식을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막 만들어지고 있는 과학이 사실로 확립되기 전까지의 과정을 따라가며 우리가 보는 '확립된' 과학이 어떻게 생성되는지를 보여준다. 
저자는 만들어지고 있는 과학을 추적하기 위해 일종의 '인류학적 연구'를 수행한다. 다시 말해, 과학자들의 연구와 논쟁 등 지식 생산 활동 과정을 따라가며 관찰하는 것이다. 저자는 이를 '(연구)방법의 첫 번째 규칙'으로 소개한다. "활성 상태의, 만들어지고 있는 과학을 연구한다. 사실과 장치가 블랙박스로 닫히기 전에 도래하거나, 아니면 그것을 다시 개봉하는 논쟁들을 쫓는다."(507쪽) 이런 방법론 하에서 저자는 과학자, 기술자, 실험실, 도구, 기입 등이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내고 있는 현장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변화를 끝까지 추적한다. 실험, 문헌 인용, 기록 생산, 도구의 사용 등 과학 활동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간과하기 쉬운 행위들이 갖는 의미가 새롭게 해석되고, 이를 통해 과학 지식이 생산되고 권위를 획득하는 과정이 밝혀진다. 때때로 저자는 마치 독자가 자신을 따라와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처럼 자신의 관찰 내용을 묘사하기도 하는데, 이런 식으로 저자의 생생한 묘사를 따라가는 것은 마치 실제 과학기술학 연구를 현장에서 배우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들게 한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지고 있는 과학에 대한 연구를 수행함으로써 저자는 무엇을 알려주는가? 아주 단순하게 말해서, '과학은 사회적'이라는 점이다. 사실 책의 핵심 내용은 이렇게 표현한 것은 잘못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차차 드러날 것이며, 본 서평의 말미에서 다시 언급될 것이다. 일단은 '과학은 사회적'이라는 표현에 만족하기로 하자. 그런데 누군가는 이렇게 물을지도 모른다. "과학이 사회적이라는 점은 누구나 알고 있다. 과학자들은 연구실 동료들과, 혹은 다른 연구실에 속한 사람들과 공동 연구를 진행한다. 또한 연구비를 지원받기 위해 정부 및 기업과 협상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과학은 사회적'이라고 할 때 이런 사회적 활동과 다른 것을 의미하는가?" 그렇다. '과학은 사회적'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과학자가 사회적 활동을 한다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의미한다. 사회적 활동이 과학 활동에 영향을 주는 것을 넘어, 과학 지식 그 자체에 영향을 줄 수 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또한 여기서 '사회적'이라는 표현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만을 뜻하는 것도 아니다. 과학자가 지식 생산에서 맺는 '사회적' 관계에는 각종 비인간들과의 동맹까지 포함되기 때문이다. 
저자는 과학자가 자기 논문에 다른 논문을 인용하는 방식에 대한, 비교적 사소해 보이는 일에서 과학 지식 생산에 대한 연구를 시작한다. 그러나 지식 생산 과정을 끝까지 추적한다면 놀라운 결론들을 얻게 된다. 과학, 기술, 사회는 뚜렷한 경계를 가지고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이어져 있다는 점이 드러난다. 또한 과학의 합리성·보편성·객관성이라는 관념이 무너진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과학이 왜 그토록 권위 있고 강력한 지식인지 그 진정한 이유가 드러난다. 과학은 합리성·보편성·객관성을 띠고 있기 때문에 권위 있고 강력한 지식인 것이 아니다. 과학이 합리적·보편적·객관적이어 보이는 것은 수많은 인간과 비인간 행위자가 연결된 결과이다.
저자는 이 책이 어느 정도 교재 역할을 할 것을 기대하고 쓴 것으로 보인다. 저자가 각 장 말미에 연습문제를 추가할 지 고민했다는 언급이나, 저자 본인의 구체적인 연구 내용과 주장을 담기보다는 행위자-연결망 이론의 일반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는 점, 상당히 광범위한 내용을 다룬다는 점 등을 볼 때 그렇다. 하지만 책의 내용 및 그 순서 선정 방식이나 전체적인 구성에서 저자 자신의 목소리를 완전히 지웠다고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책의 내용을 충실하게 전달하는 한편, 저자가 강조하려고 했던 바가 무엇인지 명확히 밝히는 것이 본 서평의 한 가지 목적이 될 것이다. 한편으로는 얼핏 보기에 테크노사이언스의 독립된 층위, 서로 다른 측면, 이질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여섯 장들이 어떻게 이어지고 중요한 개념들이 어떻게 반복되는지를 보임으로써 책에 대한 전체적인 조망을 제공하고자 한다. 그리고 과학기술학자가 이 책의 내용과 방법론을 자신의 연구에서 어떻게 이용할 수 있는지도 짚어보려고 한다.


주요 개념들 
저자가 추적하고 연구하고자 하는 대상은 테크노사이언스이다. 이 용어는 과학(Science)과 기술(Technology)의 합성어로, 과학과 기술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는 저자의 관념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이보다 훨씬 더 넓은 뜻이 담겨 있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테크노사이언스는 "과학적 내용과 연결된 모든 요소"(348쪽)를 뜻하는 말이다. 즉, 과학 연구의 대상이 되는 실체, 과학기술자, 과학 기구, 기술, 과학기술 관련 기관, 과학정책, 과학 관련된 업무를 하는 관료 등의 요소들을 모두 포괄하는 용어인 것이다. 테크노사이언스에 대한 이해에는 이 모든 것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테크노사이언스는 이 요소들 모두의 행위자-연결망이다. 따라서 이 연결망에는 과학기술자, 과학 관료 등의 인간과 연구 대상, 기구 등의 비인간이 모두 포함되며, 이렇게 인간과 비인간 모두를 동등한 행위자로 이해하는 것이 행위자-연결망 이론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테크노사이언스의 행위자들은 동맹을 맺고 연결되기도 하고, 서로 대립되기도 한다. 수많은 행위자들이 커다란 동맹, 강력한 연결망을 형성하면 다른 연결망과의 힘겨루기에서 승리할 수 있다. 승리한 연결망은 테크노사이언스의 좀 더 확고된 지식을 만들어낼 수 있게 된다.
테크노사이언스 지식을 생산하고자 하는 사실-구축자들은 더욱 많은 행위자들을 끌어들여 강력한 연결망을 만들기 위해 기입을 사용한다. 기입이란 테크노사이언스의 연구 대상이 되는 물질적 실체가 도구를 통해 기호, 표시, 그래프, 도표, 도식 등 인쇄된 시각적인 산출물을 낳는 과정, 혹은 그 산출물을 뜻한다. 기입들은 다루기 까다롭고 때로는 변형되며 옮기기도 힘든 실체와 달리, 간편하게 이동될 수 있고 잘 변형되지도 않는 불변의 가동물이다. 연결망 내부의 여러 곳에서 생산된 기입들은 계산의 센터에 축적되어 변형되고 재조합되면서, 사실-구축자가 원거리에 있는 실체들에 대해서도 연구할 수 있게 해준다.
한편 다른 행위자들을 강력한 연결망을 만드는 다른 방법으로는 번역이 있다. 번역이란 다른 행위자들의 이해관계나 사실-구축자 스스로의 이해관계를 변형시켜 동맹으로 만드는 것이다. 때로는 사실-구축자가 자신의 목표와 관련된 관련된 모든 행위자들을 묶을 수 있는 강력한 유인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 그런 경우 그 행위자들이 서로의 목표에 도달하려면 반드시 어떤 지점을 통과해야 하는데, 그러한 지점을 필수 통과 지점이라고 부른다. 
견고하고 단단하게 형성된 행위자-연결망은 블랙박스가 된다. 통상적으로 블랙박스라는 용어는 입력값과 출력값만을 알 수 있고 그 내부에서 일어나는 과정은 알 수 없는 하나의 단위를 뜻하는 말로 쓰인다. 테크노사이언스의 맥락에서 이해하자면,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는 지식, 잘 내부 작동 원리를 알 필요가 없는 장치 등, 이미 잘 확립되어서 그 구조에 사람들이 관심을 갖지 않는 행위자-연결망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블랙박스라고 해서 영구적인 것은 아니다. 확실하다고 받아들여졌던 사실이 다시 논쟁의 대상이 되기도 하며, 잘 작동하던 장치에도 고장이 생겨 그 내부를 열어봐야 할 일이 생기기도 한다.
한 연결망에 다른 연결망보다 훨씬 많은 기입들, 블랙박스들이 연결되고 축적되면 강력한 비대칭이 생긴다. 이렇게 강력한 비대칭은 마치 두 연결망 사이에 대분할을 만든다. 대분할 양쪽에서 강력한 쪽은 합리적·보편적·논리적·객관적인 것으로 인식되고, 약한 쪽은 비합리적·국소적·비논리적·주관적인 것으로 인식된다. 이런 비대칭은 너무 압도적인 차이여서 질적 차이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동맹에 포함된 행위자들의 수적 차이에 기인한 것이다.



1장 문헌
만들어지고 있는 과학을 추적해 나가기 위한 가장 좋은 출발점은 어디일까? 아마도 과학 활동의 가장 기본적인 부분, 즉 하나의 진술일 것이다. 과학을 둘러싼 각종 담론은 과학 이론과 실행에 기반을 두고 있다. 과학 이론과 실행은 논문, 학술대회에서의 발표, 과학자들끼리의 토론의 산물이다. 그리고 논문, 발표, 토론은 하나하나의 진술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저자는 하나의 진술에서 출발한다. 과학자들은 자기의 연구 내용을 주장하기 위해서나 다른 과학자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진술을 한다. 다른 과학자는 그 진술을 믿거나 믿지 않는다. 이와 같이 한 과학자가 진술을 하고, 다른 과학자가 그것을 믿거나 믿지 않으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그리고 진술을 믿거나 믿지 않는 일이 왜 일어나는지가 이 장에서 탐구할 내용이다.
과학적 진술은 사실인지 거짓인지 여부가 항상 명확히 가려진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맥락에 따라 달라진다. 어떤 과학자가 새로 논문을 쓰면서 선행 연구를 인용한다고 해보자. 어떤 선행 연구를 신뢰할 만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긍정적인 맥락에서 인용하면, 그러한 인용이 선행 연구를 더욱 신뢰할 만한 것으로 만든다. 반대로, 선행 연구의 근거가 의심스럽다거나, 데이터와 결론이 제대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부정적으로 서술하면 선행 연구는 신뢰도가 떨어진다. 선행 연구의 지위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진술 그 자체만으로는 아직 지식이 아니다. 그 이후 연구에서 어떻게 인용되는지에 따라 확고한 사실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고, 어느 정도 믿을 만하지만 확고한 사실은 아니라고 받아들여질 수도 있고, 전혀 신뢰할 만하지 못하다고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만약 한 논문이 완전히 무시된다면, 그 논문에 포함된 진술들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사실로 남거나 사실로 변하기 위하여, 한 진술은 다음 세대의 논문을 필요로 한다"(84쪽) 따라서 사실이란 불안정한 상태의 진술을 충분히 많은 사람들이 신뢰할 만한 것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진술의 사실성이 갖는 이러한 집단적 성격은 그 진술을 강력하게 만든다. 어떤 진술을 거부하고자 하는 사람은, 그 한 진술뿐만 아니라, 그 진술에 통합된 수많은 진술을 동시에 상대해야 한다.  
이와 같이 과학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에서도 저자의 핵심적인 통찰 몇 가지가 이미 발견된다. 진술이 사실성을 획득하는 것은 연결망을 통해서이다. 한 진술에 더욱 많은 긍정적 진술이 연결될수록 그 진술은 사실적이 된다. 반대로, 더욱 많은 부정적 진술이 연결될수록 그 진술은 거짓에 가까워진다. 서로 충돌하는 진술들 간에는 힘겨루기가 벌어진다. 결국 사실이라는 것은 어느 한 사람의 인상적인 발견 그 자체가 아니라 집단적으로 안정화된 것이며, 발견되기보다 구축된 것이다. 전문적인 과학 문헌과 일반적인 글을 구분하는 절대적인 경계가 있는 것이 아니다. 둘 사이의 차이는 각각에 연결된 자원과 동맹이 얼마나 많고 강력한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따라서 사실은 정도(degree)를 갖는다.
진술의 블랙박스화는 양식화(stylization)라고 부른다. 어떤 진술을 많은 사람들이 믿을수록 그 진술은 점점 단순해진다. 한 논문의 내용이 사실로 인정되면, 후에 그것을 인용하는 곳에서는 하나의 문장으로 나타난다. 원래의 논문에는 다양한 근거들이 그 내용을 뒷받침하기 위해 실려 있었겠지만, 사실로 인정받으면 더이상 그런 뒷받침이 필요없어지기 때문이다. 해당 내용이 더 널리 퍼져 해당 분야에서는 누구나 아는 상식이 되면 그 내용을 언급할 때도 저자의 이름을 밝힐 필요가 없어진다. 더욱더 확고한 사실로 인정받으면, 해당 분야를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기 때문에 그 내용을 언급할 필요조차 없어진다.
따라서 과학기술자가 논쟁을 계속 연구하기 위해서는, 즉 아직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던 진술이 확고한 지식으로 변모하는 과정을 따라가기 위해서는 첫 번째 논문의 진술을 사실이나 거짓으로 전환시키는 후속 논문들을 모두 읽어야 한다. 반대로, 확고한 지식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어떤 논쟁를 거쳐 사실로 인정받았는지 알기 위해서는 진술이 처음 만들어진 곳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렇게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그 진술을 생산해 낸 장소, 즉 실험실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저자는 2장에서 실험실로 향한다.



2장 실험실
지식 생산을 추적하기 위해서는 문헌들에 대한 분석만으로는 부족하다. 과학자들은 실험실에서 과학 활동의 많은 부분을 수행하고, 문헌에 담긴 진술들은 실험실에서 얻은 결과물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실험실에서 주목할 것은 도구들이다. 저자는 도구를 기입 장치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왜냐하면 도구는 연구 대상이 되는 실체에서 우리가 눈으로 보고 인식하며 이해할 수 있는 시각적 결과물, 즉 기입을 생산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입은 연구 대상인 실체가 기호, 기록, 문서, 논문 등으로 구현되면서 겪는 변형이다. 기입 장치, 즉 도구는 실험실에서 매우 중요해서, 저자는 실험실을 "하나 또는 여러 개의 도구들을 모아 놓은 곳"(143쪽)이라고 정의할 정도이다. 
과학자들은 도구를 통해 새로운 대상을 발견한다. 새로운 대상은 아직 그 속성이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처음에는 실험을 통해서도 명확하게 포착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도구를 이용해 새로운 대상에서 얻은 기입이 정말로 그 대상에서 얻어진 것인지, 아니면 다른 조건들이 영향을 미친 것인지 판별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새로운 대상에 여러 가지 실험을 함으로써 다양한 기입들을 얻어낸다. 점점 그 대상은 그것에서 만들어진 기입들의 목록으로 명확히 확정지어진다. 새로운 대상에서 많은 기입이 생산될수록 그것은 점점 구체적인 대상이 된다.
여기서 과학이 가진 힘과 과학자가 가진 권위의 원천을 확인할 수 있다. 실험실은 일상적인 조건에서는 만들어낼 수 없는 극단적이고 통제된 조건을 만들어내고, 그러한 조건에서 실체가 만들어낸 반응들을 기입할 수 있다. 그래서 실험실에서는 새로운 대상들을 많이 만들어낼 수 있다. 과학자와 엔지니어들은 이런 기입을 가지고 새로운 대상을 정의해낸다. 즉, 실험실은 아무것도 없는 일반인들이 동원할 수 없는 수많은 행위자를 동원한다. 여기서 과학자와 일반인, 전문가와 비전문가, 전문 지식과 비전문 지식의 비대칭이 생겨난다. 실험실이 동원할 수 있는 행위자의 수가 실험실의 힘을 만들어낸다. 
그럼에도 반대자들은 기입들과 과학자의 진술들을 의심할 수 있다. 실제 기입과 그 기입에 대한 과학자의 진술은 일치하는가? 일치한다면, 혹시 과학자가 기입과 진술이 일치하도록 미리 설정해 놓은 결과가 아닐까? 진술과 기입에 군데군데 존재하는 빈틈에서 생겨나는 이런 의심에 대해, 과학자는 더 의심하기 힘든 블랙박스를 내민다. 실험실에서 만들어진 새로운 대상을 의심하는 사람이 있다면, 과학자는 그 대상을 만드는 데에 사용된 더 확고한 지식, 더 단단한 블랙박스들을 보여준다. 잘 확립된 지식을 반박하는 데에는 더 많은 시간, 더 많은 동맹, 더 많은 자원이 필요하다. 반박에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과학자는 또 다른 더 잘 확립된 지식과 블랙박스를 내밀 수 있다. 반대자가 충분히 강하다면, 즉 반대자도 많은 견고한 블랙박스가 연결된 동맹을 동원할 수 있다면, 결국 동맹, 연결망의 힘겨루기가 발생한다. 이 힘겨루기에서 이기는 쪽이 객관적이라고 인정받을 수 있다. 
이처럼 실험실에서도 도구, 기입, 과학자, 새로운 대상 등이 연결된 행위자-연결망을 찾을 수 있다. 도구가 생산해낸 기입이 대상에 많이 연결될수록 대상은 뚜렷하고 부정할 수 없는 실체로 인정받게 된다. 다시 한 번, 사실은 그 연결망, 동맹에 얼마나 많은 행위자들이 연결되었는지로 이해된다. 실험을 하는 과학자라는 인간과, 도구, 기입, 새로운 대상 등의 비인간은 하나의 연결망 안에서 이어진다. 따라서 이 연결망은 잡종적이다. 문헌에 이어 실험실에서도 사실은 발견되기보다는 구축된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으며, 규모의 차이가 비대칭을 낳는다는 점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논쟁을 분석할 때, 이긴 쪽의 주장이 (대)자연에 더 부합했기 때문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팽팽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에는 그 누구도 (대)자연이 어떠한지 모르기 때문에, 논쟁의 승패가 (대)자연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대)자연이 논쟁의 심판자라는 생각은 '만들어지고 있는 과학'의 맥락에서가 아니라 '이미 만들어진 과학'의 맥락에서 논쟁을 바라봤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논쟁을 분석하는 과학기술학자는 (대)자연이 논쟁 종료의 원인이라기보다는 결과 혹은 산출물임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3장 장치
그렇다면 강력한 동맹은 무적인가? 더 약한 동맹은 강한 동맹을 이길 희망이 없는가? 사실이 충분히 강력하게 구축되면 아무도 그 권위에 도전할 수가 없게 되는가? 그렇지 않다. 연결망들 간의 힘겨루기에서 새롭고 예상치 못한 동맹을 끌고 오거나, 상대의 동맹을 전향하도록 하는 방법을 통해서 약했던 동맹은 더욱더 강해질 수 있다. 그러한 방법, 즉 더 많은 동맹을 끌고 오는 방법이 번역이다.
한 사실-구축자가 강력한 연결망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충분히 많고 강력한 행위소들을 끌어들여야 한다. 그러한 과정에서 사실-구축자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다. 한 가지는 사실-구축자가 다른 행위자의 이해관계에 부응하도록 스스로 목표를 바꾸는 일이다. 다른 방법은 다른 행위자를 설득하여 사실-구축자의 이해관계에 따르게 하는 것인데, 물론 이것은 쉽지가 않다. 다른 방법으로는 사실-구축자가 다른 행위자의 이해관계를 새로 해석하는 것이 있다. 그렇게 해서 설득된 행위자는 원래의 목표를 바꾸지는 않았지만, 사실-구축자의 이해관계와 부합하는 다른 경로를 따르게 된다. 이해관계와 목표를 뒤섞는 방법도 있다. 이러한 방법은 행위자들이 나아가는 방향을 조금씩 틀어, 사실-구축자의 목표를 통해 나아가게 한다. 하지만 이들 어떤 방법들보다 강력하며, 이 네 가지 방법을 종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필수 통과 지점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필수 통과 지점이 만들어지면 모든 행위자들은 사실-구축자가 원하는 지점을 통과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사실-구축자가 이렇게 한 지점에 모인 수많은 행위자를 통제하는 것이 가능할까? 서로 다른 이해관계와 목표를 가졌던 행위자들을 사실-구축자의 확고한 동맹으로 만드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가장 간단한 방법은 이렇게 모인 행위자들을 서로 묶는 것, 즉 장치를 만드는 것이다. 각 행위자들은 서로의 작동에 서로 이해관계가 있게 연결되어야 한다. 이 과정도 번역으로 이해될 수 있다. 서로 다른 다양한 행위자가 모여있는 지점에서 행위자들이 서로의 작동에 이해관계로 얽히도록 번역하는 것이다. 기술자로서의 사실-구축자의 능력은 바로 이러한 장치를 확고하게 만들어내는 데에 있다. 이렇게 행위자들이 모여 하나의 장치로서 행위하게 된다면, 그것은 블랙박스가 된다. 하지만 견고한 블랙박스조차도 계속 유지보수가 되어야 한다. 블랙박스는 영구적이지도, 관성을 갖고 있지도 않다. 장치들은 고장나지 않도록 관리되어야 하고, 만약 고장난다면 수리하는 사람을 불러와야 한다.
이 장을 통해 테크노사이언스라는 용어가 담고 있는 의미의 일부를 이해할 수 있다. 1, 2장에서 살펴보았듯이 논쟁적인 과학 지식을 사실로 만드는 일은 많은 행위자들을 끌어와 강력한 연결망을 형성시키는 일이었다. 기술, 즉 장치를 만드는 일도 다양한 행위자들의 연결망을 형성시키는 일이라는 점에서 과학과 다르지 않다. 이런 점에서 과학과 기술은 본질적으로 같은 일이며, 서로 연결되어 있는 테크노사이언스인 것이다. 과학기술학자가 과학을 연구하려면, 또는 기술을 연구하려면 둘의 연결 또한 따라가야 한다.



4장 내부자의 외부 활동
본 서평의 앞부분에서 테크노사이언스는 "과학적 내용과 연결된 모든 요소"를 뜻한다고 언급하였다. 3장에서는 그 중 과학과 기술의 연결을 보았다. 4장에서는 그뿐만 아니라 사회도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과학자가 하는 일은 실험실에서 실험을 하고 논문을 쓰는 일만이 아니다. 과학자들은 외부 활동을 한다. 과학 연구에는 연구비 지원이 필요하고, 관련 분야의 다른 연구자들과 교류해야 하며, 자신의 연구 성과를 다른 사람들이 인정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 이러한 실험실 외부 활동 없이 연구는 수행될 수 없다. 이를테면 연구비 지원을 받지 못하면 아무리 유능한 과학자도 아무런 지식도 생산할 수 없다. 따라서 실험실에서 실험을 하는 과학자만 '진정한' 연구를 하고 있다고 할 수는 없다. 테크노사이언스의 수행은, 실험실 내에서의 실험과 실험실 밖에서의 사회적 활동이 맞물려 돌아간다. 외부에서 계속 새로운 자원과 지원을 끌어왔기 때문에, 실험실 내부의 과학자들이 실험실에서의 작업에 몰두할 수 있다. 테크노사이언스의 모든 요소들은 서로 이어져 있으며, 외부가 있기 때문에 내부가 있다. 
그러므로 실험실 내에서의 연구의 성패는 실험실 외부와 네트워크를 얼마나 잘 맺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학기술자가 얼마나 많은 행위자들을 설득해 내어, 그 행위자들이 그 실험실을 통과 지점으로 삼게 만드는지는 직접적인 실험 못지않게 중요하다. 다른 한편으로, 과학기술자들은 그들 자신의 숫자가 무척 적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따라서 과학기술자들은 자신들의 연구를 더 크고 강력한 집단의 이해관계에 연결시킬 필요가 있다. 저자는 그러한 이해관계의 예로 군사와 의료를 든다. 과학기술자들은 자신의 연구가 군사적으로 응용 가능하거나, 의약품 개발에 중요하다고 다른 행위자들을 설득해야 충분한 연구 지원을 받을 수 있다. 
과학기술자의 숫자가 매우 적다는 점은 다른 한 가지 의문이 떠오르게 한다. 전체 인구에서 극히 적은 비율에 불과한 사람들이 생산해 낸 지식이 어떻게 현대 사회 전체에 이토록 큰 파급력을 지닐 수 있는가? 이에 대한 해답은 앞서 테크노사이언스를 어떻게 정의했는지 다시 떠올려보면 찾을 수 있다. 테크노사이언스란 "과학적 내용과 연결된 모든 요소"이다. 우리가 과학자, 기술자로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만이 테크노사이언스의 구성원이 아니라는 것이다. 과학기술을 통해 개발된 상품을 판매하는 기업의 수많은 종사자, 정부의 과학기술정책 담당자, 과학기술에 대한 직간접적인 후원자 등이 모두 테크노사이언스의 필수불가결한 구성원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과학'과 '기술'이라는 말을 쓸 때는 이들 각 행위자들에 대한 책임 귀속이 모두 끝난 뒤에 남아있는 지식만을 말한다. 따라서 테크노사이언스라는 용어를 쓰는 것은 과학-기술-사회의 연결을 보다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게 해준다. 
이 장에서도 앞선 장들에서 나온 개념들이 대상을 달리해 반복된다. 앞선 장들에서 진술들의 연결, 기입들의 연결이 이야기되었다면, 이 장에서는 과학자들과 그 외의 테크노사이언스 구성원들의 연결이 이야기되었다. 이번에도 역시 크고 강력한 동맹, 연결망이 테크노사이언스 지식 생산을 이끈다. 또한 테크노사이언스 구성원들간의 이해관계의 번역도 중요한 내용이다. 이전 장들과 다른 내용이 있다면, 연결망의 범위가 훨씬 더 넓게 확장되었다는 것이다. 이 장에서 확인할 수 있는 테크노사이언스의 연결망은 사회 전체에 뻗어 있다. 과학-기술-사회는 절대적으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테크노사이언스를 이해하려고 하는 과학기술학자들은 과학기술자 공동체와 실험실만 연구해서는 안 되고, 그럴 수도 없다. 테크노사이언스의 행위자들을 추적하면 과학-기술-사회의 경계를 가로지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5장 대분할 
4장에서는 테크노사이언스의 연결망이 굉장히 넓게 퍼져있음을 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넓게 퍼져 있는 연결망도 모든 곳에 연결되어 있을 수는 없는 법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연결망에 포함되지 않은 행위자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테크노사이언스 연결망과, 그밖에 다른 연결망은 어떤 차이를 가지고 있는가? 테크노사이언스 연결망은 왜 다른 많은 연결망보다 강한가? 이러한 문제들이 5장과 6장에서 다루는 내용이다.
현대 사회에서 테크노사이언스가 갖는 권위는 막강하다. 테크노사이언스 연결망에 속했는지 아닌지를 두고 합리성와 비합리성, 보편성과 국지성, 객관성과 주관성, 과학과 비과학의 경계가 그어진다. 이들 각 쌍에서 뒤에 속하는 것들은 전근대적이고 덜 계몽된 것이며, 심지어는 야만적인 것으로 비판받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경계는 당연한 것도, 절대적인 것도 아니다. 앞 장에서 테크노사이언스의 여러 요소들, 즉 문헌, 실험실, 장치, 외부 활동은 행위자들의 연결을 통해 구축된 것임을 보았다. 마찬가지로 테크노사이언스 전체의 연결망 또한 수많은 행위자들이 연결된 행위자-연결망이다. 이제 3장에서 이제 3장에서 아무리 견고해 보이는 블랙박스도 유지보수가 되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해체될 수 있다고 했던 것을 상기해 보자. 마찬가지로 현대 사회에서 드높은 위상을 갖는 테크노사이언스라는 행위자-연결망 또한 수많은 행위자들의 유지보수 작업으로 지탱되고 있는 것이며, 그런 작업이 없다면 점차 와해될 것이다.
그렇다면 합리성와 비합리성, 보편성과 국지성, 객관성과 주관성, 과학과 비과학, 테크노사이언스와 비-테크노사이언스의 대분할은 절대적이지 않다. 대분할은 공약불가능한 대상들간에 그어진 질적인 경계가 아니다. 연결된 행위자의 수에서 나오는 수적인 차이인 것이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것은 '사회 논리학'의 문제이다. 어느 행위자 혹은 행위자-연결망이 논리적인가(권위가 있는가, 합리적인가, 객관적인가)는 어떤 것이 더 강한 동맹을 맺고 있는지, 어떤 것이 다른 행위자들과 더 많은 관계를 맺고 있는지에 달렸다. 
이 지점에 이르러 우리는 이미 만들어진 과학이 아니라 만들어지고 있는 과학을 연구한다는 것의 의의를 뚜렷이 이해할 수 있다. 이미 만들어져 잘 확립되어 있는 테크노사이언스 연결망만을 보면 그 권위는 절대 깨지지 않을 것 같다. 따라서 이미 만들어진 과학을 연구한다면 대분할 양쪽에 존재하는 지식에 대해 각각 다른 설명을 찾아야 한다. 이러한 관점 하에서, 과학-기술-사회를 통합적으로 이해할 수 없고, 합리성/비합리성, 객관성/주관성, 과학/비과학의 이분법이 생겨난다. 그러나 만들어지고 있는 과학을 연구함으로써 우리는 양쪽에 대해 같은 설명을 제공하고 대칭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저자가 제시한 (연구) 방법의 여섯 번째 규칙을 특별히 강조해야 할 것 같다. "비합리성에 대한 기소 또는 단순히 무엇에 대한 믿음에 대면해, 사람들이 사물을 믿는다거나 그들이 비합리적이라고 우리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며, 어떤 논리 규칙이 어겨졌는지를 찾지 않을 것이며, 다만 관찰자의 전위의 각도, 방향, 이동, 그리고 규모를 고려할 것이다."(419쪽)
이제 남은 문제가 한 가지 있다. 대분할 양쪽의 차이는 질적인 차이라기보다 수적인 차이라는 것은 이해했지만, 어쨌거나 그 차이가 어디서 연유했느냐는 것이다. 6장에서 이 문제를 탐구한다.


6장 계산 센터들
테크노사이언스 연결망은 계산 센터들을 갖는다. 계산 센터들은 연결망의 서로 다른 위치에서 서로 다른 시기에 서로 다른 행위자에 의해 생산된 기입들이 모이는 지점이다.  테크노사이언스 연구의 대상이 되는 많은 실체들은 있는 그대로 연구될 수가 없다. 예컨대 생태학자들은 숲을 연구하기 위해 숲 전체를 실험실로 가져올 수 없다. 그래서 실체는 기입으로 변형된다. 기입은 움직이기 쉽고, 연구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변형되는 경우가 드물다. 게다가 다루기가 까다로운 원래의 실체와 달리, 쉽게 조작(manipulation)할 수 있다. 서로 다른 시간, 서로 다른 장소, 서로 다른 조건에서 모인 기입들은 "마치 한 팩의 카드들처럼 쌓이고 모이고 뒤섞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기입은 이동성, 안정성, 조합 가능성을 지닌다. 이런 특성 덕분에 많은 수의 기입들이 계산 센터에 모여 다양하게 조합되고 변형되면서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낼 수 있다. 
기입의 축적은 순환적으로 일어난다. 첫 회차에 원정, 채집, 탐침, 관측, 조사 연구 등이 이루어지면 약간의 기입이 생긴다. (물론, 기입이 회차로 전달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없었던 것이나 다를 바가 없다.) 다음 회차에서 얻은 기입은 그 전 회차의 기입을 반복할 필요가 없다. 그 전 회차의 기입이 끝난 곳부터 다음부터 시작하면 된다. 이렇게 여러 회의 기입 생산 과정이 반복된다. 연결망 곳곳에서 여러 회차에 걸쳐 생산된 기입은 계산 센터로 모인다. 거대한 연결망은 다량의 기입을 만들고, 그러한 과정이 순환적으로 반복되면서 점점 더 기입의 축적을 늘려간다. 순환이 여러 번 반복되면 연결망 외부와 비교해 압도적인 비대칭이 만들어진다. 거대한 비대칭은 이제 '대분할'로 인식된다. 연결망의 크기와 축적된 기입의 양에 의한 압도적인 수적 차이가 마치 연결망 내부와 외부에 질적 단절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이다. 
18세기 말 프랑스의 항해자들의 사할린 탐사는 기입의 축적에 따른 대분할의 형성 과정을 잘 보여준다. 프랑스의 항해자들이 사할린에 처음 도착했을 때, 그들은 그곳의 지리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첫 항해에서 생산해낸 기입은 계산의 센터에 모였고, 두 번째 항해는 그 이전 항해가 끝났던 곳에서 시작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럼으로써 새로운 기입이 축적됐다. 이러한 순환이 몇 번 반복되자 그들은 그곳에 대대로 천 년 넘게 살았던 원주민들보다 훨씬 많은 지리 지식을 갖게 되었다.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연결망의 서로 다른 부분, 서로 다른 시기, 서로 다른 행위소들에 의해 생산된 기입이 어떻게 축적될 수 있으며, 조합 가능하느냐는 것이다. 그에 대한 답은 도량형이다. 도량형은 계산 센터와부터 연결망 말단까지 동일한 형식, 기준, 표준을 적용하는 것이다. 도량형으로 상호 비교 가능해진 기입들은 연결망 내를 원활하게 순환할 수 있게 된다. 도량형 덕분에 과학자들은 계산의 센터에 앉아서 지구 반대편에 놓여있는 대상들을 연구할 수 있다. 도량형은 "궤적들의 이동성을 가속화하고, 그들의 충실성, 조합, 그리고 응집을 증진시키기 위해, 그럼으로써 원격 행위를 가능하게 하기 위한 것들이다."(500쪽)




결론
지금까지 테크노사이언스의 기본적인 단위인 하나의 진술에서 시작해, 현대 사회의 큰 특징 중 하나인 대분할까지 이어지는 지식의 생산 과정을 따라가 보았다. 이 과정에서 저자는 과학자들의 실행을 추적하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과학기술학 연구의 한 범례를 보여주는 한편, 테크노사이언스, 행위자-연결망, 블랙박스, 기입, 계산의 센터 같은 개념들을 소개했다. 그런데 이러한 연구 방식과 개념들을 이용해 테크노사이언스에 대해 충실한 기술(description)을 하는 것을 넘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일반적인 결론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이에 대해 앞에서 책 내용을 따라가며 부분적으로 나왔던 것들을 몇 가지 정리해서 언급하며 본 서평을 끝마치고자 한다. 
첫째는 과학-기술-사회의 경계가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본 서평의 도입에서 필자는 저자의 주장은 '과학은 사회적'이라는 표현으로 요약했지만, 동시에 저자의 연구를 충실하게 따라가면 이 표현이 적절하지 않음을 알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과학-기술-사회는 테크노사이언스 연결망 속에서 연결되어 있는 것이며, 그 연결망 이전에 정의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좀더 정확한 표현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과학과 기술과 사회는 테크노사이언스라는 거대한 연결망에서 이어져 있다.'
둘째는 첫째 결론에서 얻어낼 수 있는 것인데, 현대 사회에서 테크노사이언스의 힘과 권위는 많은 행위자를 동원한 강력한 연결망을 형성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테크노사이언스는 실험실에서 만들어내는 새로운 대상들과, 그러한 대상들에서 얻어지는 기입들, 연결망의 여러 곳에서 얻어지는 또다른 기입들, 기입들이 모여 변형되고 재조합되는 계산 센터의 역할 등을 통해 강력한 연결망을 형성했다. 다만 이 부분에서 책의 서술이 다소 아쉬운 부분이 있었는데, 테크노사이언스가 다른 연결망에 비교해 이런 점에서 얼마나 우위를 갖는지 서술되지 않은 것이다. 이를테면 기입이 생산되고 모이는 것은 다른 분야에서도 일어나는 일이다. 아마도 실험실에서 극단적인 조건을 만들고 다른 사람들은 동원할 수 없는 행위자를 동원할 수 있었다는 점이나, 도량형을 통해 연결망 내에서 기입의 원활한 이동 및 조합이 일어날 수 있었다는 점이 다른 분야와 테크노사이언스가 차별화되는 점일 것이다. 책에서 이런 부분을 강조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셋째는 다시 둘째 결론에서 얻어낼 수 있는 것인데, 테크노사이언스의 힘과 권위가 절대적인 합리성·보편성·일반성·객관성에 기반을 두었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테크노사이언스 연결망과 다른 연결망의 차이는 질적인 것,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수적인 것이고 가변적인 것이다. 테크노사이언스는 특권을 갖는 지식이 아니며, 다른 지식들과 대칭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결론은 과학기술학에서 다루는 여러 주제들, 즉 위험, 불확실성, 국지적 지식, 과학의 정치성 등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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