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표: 단행본 Arguing about Science(Alexander Bird, James Ladyman 편집)
재수록: The Essential Tension
Philosophy of Science(Curd & Cover 편집)
번역: 조인래 역, 「객관성, 가치 판단, 그리고 이론 선택」『쿤의 주제들: 비판과 대응』
재수록: The Essential Tension
Philosophy of Science(Curd & Cover 편집)
번역: 조인래 역, 「객관성, 가치 판단, 그리고 이론 선택」『쿤의 주제들: 비판과 대응』
쿤의 비판자들은 쿤이 과학자들의 이론 선택 과정을 아무런 기준도 없는 비합리적인 과정으로 묘사했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쿤은 다음 다섯 가지 항목이 이론 선택 과정에서 좋은 이론의 기준으로 쓰인다는 점에 동의한다. 과학자들은 기존 이론과 새로운 이론 사이에서 선택해야 할 때 이 기준들을 중요하게 고려한다. (좋은 이론의 기준이 이 다섯 가지만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기준들도 이론 선택 과정에서 고려될 수 있다.)
정확성: 이론은 그 자신의 영역에서 정확해야 한다. 즉, 이론에서 유도되는 귀결들이 기존의 실험 및 관찰의 결과들과 일치함이 입증되어야 한다. 정량적인 것뿐만 아니라 정성적 일치까지 포괄하는 개념이다. 가장 중요한 기준인데, 다른 기준들보다 덜 애매하고, 예측력과 설명력에서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일관성: 이론은 내적으로 일관되고, 현재 받아들여지고 있는 다른 이론들과도 일관되어야 한다.
넓은 적용 범위: 이론은 그것이 애초에 설명하도록 고안된 개별 관찰, 법칙, 하부 이론을 넘어서는 새로운 귀결을 제공해야 한다.
단순성: 이론은 그 이론 없이는 제각기 고립되고 전체적으로 혼란스러운 현상들에게 질서를 가져다 준다는 의미에서 단순해야 한다.
다산성: 이론은 새로운 현상이나, 이미 알려진 것들 중에서 그 전까지 주목받지 못한 관계들을 드러내 주어야 한다.
그러나 과학자들이 이 기준들을 적용하는 데에 두 가지 어려움이 있다. 첫째, 이 기준들 각자를 구체적인 경우에 적용할 때 의견을 달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한 이론이 다른 이론보다 어떤 영역에서는 더 정확하고 다른 영역에서는 덜 정확한 경우, 둘 중 어떤 이론이 더 정확한지에 대해 과학자들의 의견이 갈릴 수가 있다. 또한 초기 지동설은 천동설보다 정성적으로 단순하지만, 계산적으로는 덜 단순하다. 둘째, 이 기준들끼리 충돌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이론은 정확한 대신 일관성이 떨어지고, 다른 이론은 일관된 대신 정확성이 떨어질 수가 있다.
이와 같이 각 기준들은 인정해도, 그 기준들이 충족되어야 하는 유형이나 범위 등에는 의견이 갈릴 수 있다. 따라서 이론 선택에는 이 기준들 외에 개별 과학자의 특성을 고려해야 한다. 그러한 특성에는 과학 내적인 것과 과학 외적인 것이 있다. 과학 내적인 것은 한 과학자가 이론의 기준들 중 어떤 것을 더 비중있게 생각하느냐이다. 그 과학자는 자기 나름대로의 판단을 하고 그에 대한 근거를 제시할 수 있다. 과학 외적인 것의 예로는, 케플러가 지동설을 선택한 것에 신플라톤주의와 헤르메티시즘이 영향을 끼쳤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경쟁 이론들 사이의 모든 개인적 선택은 객관적인 요인들과 주관적인 요인들의 혼합에 의해 이루어진다. (글의 후반부에 나오지만 쿤이 여기서 쓰는 주관성이라는 말은 객관성이라는 말에 반대되는 의미로 쓰인 것이 아니다. 과학자들은 '과학적'인 근거에 의거해 자신의 주관적 판단을 내릴 수 있다.)
그렇다면 왜 기존의 과학철학자들은 이론 선택을 철저하게 객관적인 과정이라고 주장했을까? 쿤은 그 원인이 '발견의 맥락'과 '정당화의 맥락'의 이분법에 있다고 본다. 주관적인 요소들은 발견의 맥락에 속하는데, 이것은 과학철학의 경계 밖에 있으며 과학적 객관성에 무관하다는 것이 기존 과학철학자들의 주장이다. 정당화의 맥락에서 이론은 객관적이 되며, 이론 선택은 여기에 속한다. 이러한 입장을 견지한다면 이론 선택 과정에서 작용하는 기준들에 절대적인 가중치가 존재하여 이론 선택이 완전히 객관적인 과정이라는 주장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러나 쿤은 이러한 이분법이 실제 과학 활동과 부합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게다가 이러한 이분법은 과학에 대한 유용한 이상화(idealization)조차 되지 못한다. 이러한 이분법이 받아들여지는 원인은 '교과서 과학'에 있다. 실제 과학사에서는 패배한 이론에 유리한 근거도 많이 있었기 때문에 이론들 간의 경쟁이 존재하지만, 과학 교과서에는 패배한 이론에 유리했던 증거들이 서술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교과서에서 언급되는 결정적 실험들은, 사실 이미 이론 선택이 이미 훨씬 더 애매한 증거에 근거하여 이루어진 후에 실행된 것이다. (쿤은 교과서의 이러한 서술을 발견의 맥락, 정당화의 맥락과 구분되는 '교육의 맥락'이라고 부른다.)
경쟁하는 이론들 중에 한 이론으로 동의가 이루어진다고 해도, 각 과학자들이 그 이론을 선택하게 된 기준들의 가중치가 다 다를 수 있다. 왜냐하면 위의 다섯 기준들은 선택을 '결정'하는 '규칙'이 아니라, '선택'에 영향을 주는 '가치'들이기 때문이다. 여러 종류의 가치들 중에서 어떤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길지는 사람마다 다르며, 이러한 점은 위의 기준들에도 적용된다. 이론 선택의 기준들이 규칙이 아니라 가치라는 점을 염두에 두면, 불합리한 것으로 여겨지던 다양한 과학적 행위들이 설명된다. 또한, 이론 선택의 가장 초기 단계에서, 아직 여러 기준에서 기존 이론보다 열등한 새로운 이론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는지가 설명된다. 예를 들어 초기 지동설은 정확성이나 일관성 면에서 천동설보다 매우 뒤떨어졌지만, 초기 지동설의 단순성을 중요하게 여긴 사람들에 의해 옹호되었다. 모든 가치를 포괄해서 계산되는 절대적인 수치가 있다면 이런 경우가 설명되지 못할 것이다.
한 가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이론의 각 가치에 부여되는 비중이 시간에 따라 변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옛날 과학에서 정량적인 정확성을 추구했던 것은 천문학 뿐인데, 시간이 지날수록 다른 분야에서도 정량적 정확성이 추구되었다. 화학에서는 위에서 제시된 다섯 가치들 외에도 유용성을 매우 중요하게 고려한다. 또, 적용 범위를 희생하는 대가를 치르면서 중요한 과학적 진보가 성취되는 일이 많았다. 따라서 선택에서 적용 범위의 비중은 시간이 지나면서 줄어들었다고 할 수 있다. (쿤은 구체적인 예를 들고 있지 않지만, Brown 1985에서 이러한 예로 점성술과 결별한 천문학을 들고 있다. 천체의 운동과 인간 행동을 모두 설명하는 점성술에서 천체의 운동만 설명하는 천문학으로 변한 것은 적용 범위를 희생한 것이지만 과학적 진보이다.)
이와 같이 가치가 변화한다면, 이론 선택이 가치 선택에 영향을 끼치고 가치 선택이 이론 선택에 영향을 끼치는 순환에 빠지며, 이 경우 서로 정당화가 되지 않는다는 비판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가치 변화는 이론 선택보다 뒤늦게, 거의 의식되지 않은 채로 일어났다. 또한 가치 변화는 이론 변화에 비하면 그 변화의 폭이 작았다. 따라서 가치들은 이론 선택의 기반으로 충분히 기능할 수 있다.
한편 서로 다른 이론들이 공약 불가능하다면 이론들 간의 비교가 어떻게 가능한지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여기에 대해 쿤은 의사 소통이 불완전하더라도 여전히 각 기준들에 의거한 비교는 가능할 수 있다고 답한다. 예를 들어 두 이론들 중 어떤 이론이 더 정확하고 다산적인지는 각 이론의 구체적인 내용을 비교하지 않아도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서로 공약 불가능한 이론들 간에도 많은 용어들은 비슷한 의미를 가지므로 비교의 토대가 될 수 있다.('국소적 공약 불가능성'. 이에 대해서는 쿤의 다른 논문인 "Commensurability, Comparability, Communicability"(1982)에서 자세히 논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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