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반실재론자들의 실재론 비판은 주로 의미론적 주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더밋에 따르면, 실재론을 근거 짓고 있는 의미론은 결정 불가능한 진술들(진리치가 원리적으로 결정될 수 없는 진술들)의 의미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따라서 의미와 진리에 대한 반실재론이 지지된다. 퍼트넘에 따르면 단어와 세계 사이의 대응 관계는 성립하지 않는다. 따라서 반실재론이 지지된다.
실재의 본성에 관한 두 견해
형이상학에 대한 전통적 개념화와 근대적 개념화 사이에는 우리의 사유, 언어와 세계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한 문제가 깔려 있다.
전통적 견해(실재론. 추상적 엔터티에 관한 형이상학적 실재론의 문제와는 독립적이다.)의 표준적인 입장은 다음과 같다. 세계는 대상들로 구성되어 있는데,이 대상들의 존재, 본성, 대상들 사이의 관계는 우리 정신과 독립적이다. 우리는 이 대상들에 대한 믿음을 형성하고 이 대상들에 대해 진술하는데, 이 믿음과 진술들은 표상적이다. 믿음이나 진술들은 긍정적assertoric(?)이다. 이것들은 사물이 어떠어떠하다고 긍정한다. 이러한 견해는 참이거나 거짓이다.
진리, 참은 맞아 떨어짐fit 혹은 일치match의 문제다. 이러한 대응은 우리가 그것이 일어나는지를 알 수 있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일어나는 것이다. 대응이 일어나는가 하는 문제와, 우리가 우리의 인식적 도구를 사용해 얻어내는 결과는 독립적이다.
2가 원리Principle of Bivalence: 각 믿음이나 진술은 두 진리치 중 어느 하나를 가진다는 주장. 전통적 견해에서는 이 원리가 다소 제약되어야 한다. 비지시적 단칭어를 포함하는 문장에 의해 표현되는 믿음과 진술들은 2가 원리가 적용되지 않는다. 또, 문장에 모호한 용어(예: 크다, 뚱뚱하다, 빠르다 등)가 포함된 경우에도 적용이 어렵다. 또, 의미론적 역설에도 적용이 어렵다(예: '이 문장은 거짓이다'라는 문장).
ㄴ실재론에 대한 비판1: 반실재론. 세계는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우리의 개념화 방식에 의해 구성된 것이다. 더밋과 퍼트넘(콰인의 착상에서 발전시킴)은 언어철학적 방법을 통해 이 주제에 접근한다. 이들에 따르면 실재론은 받아들여질 수 없는 의미론을 근거로 삼고 있다. 의미에 대한 이론theory of meaning과 진리론을 모두 반실재론으로 처리하는 이론만이 진정으로 옳은 이론이다. 우리에 의해 부분적으로 만들어진 세계에 대한 형이상학적 그림을 얻어내려면, 우리는 그 그림을 의미론 안에서 찾아야 한다.
ㄴ실재론에 대한 비판2: 진리에 대한 잉여 이론. p가 참이라고 긍정하는 것은 그냥 p를 긍정하는 것이며, 대응 같은 것은 없어도 된다.
더밋의 반실재론
실재론은 의미에 대한 진리 조건 이론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에 따르면 한 진술은 진리 조건과 연계됨으로써 의미를 얻는다. 진리 조건이 구현될 때 그 진술이 참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연계는 첫째, 개별 단어와 세계 내 대상 사이에 지시 관계가 있고, 둘째, 단어들이 서로 묶여 적당한 진술적 문장을 형성할 때 가능하다. 한 진술이 어떤 사태와 연계되는 것은 그 진술이 갖는 의미론적 구조 때문이며, 어떤 진술의 의밀를 안다는 것은 그 진술의 진리 조건을 파악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의미라는 개념과 진리라는 개념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우리가 진리 조건이 구현되었는지 원리상 확인할 수 없더라도, 그 진술은 참이나 거짓일 수 있다(진리 조건이 주어질 수 있다). 2가 원리 등 실재론의 주장들이 여기에 연계된다.
더밋은 실재론에 반대하며 의미에 대한 인식적 이론을 내세운다. 의미는 진술과 정신 독립적 사태 사이의 연관으로 분석될 수 없다. 의미는 인식론적 용어를 통해 이해되어야 한다. 한 진술의 의미는 그 진술의 증거, 즉 그 진술을 긍정하는 것에 대한 보증 혹은 정당화를 제공하는 것에 의해 고정된다. 어떤 진술의 의미를 안다는 것은 무엇이 그 진술에 대한 보증 혹은 정당화가 되는지를 안다는 것이다. 그런 증거가 원리적으로 불가능한 진술에 대해서는 진리치를 할당할 수 없다.
진리 조건 의미론에 대한 더밋의 비판: 일반적으로 화자가 진술에 대한 진리 조건이 되는 사태를 모두 파악하고 있다고 할 수 없다. 지식에는 명시적 지식과 암묵적 지식이 있다. 화자가 자신이 이해하는 모든 진술의 진리 조건에 대한 명시적 지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지식을 가질 수 있다는 가정은 순환이나 무한퇴행에 빠진다. 화자가 이해하고 있는 진술을 S라고 하자. 또, 이 진술의 진리 조건에 대한 지식이 명시적이라고 하자. 그럼 그 진리 조건을 S 그 자체를 사용하거나 다른 진술 S'를 사용함으로써 표현해야 한다. 전자는 순환적이다(S를 사용하려면 S를 이해해야 한다). 후자는 무한 퇴행에 빠진다. 한편 암묵적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 그것은 표명되거나manifested 대중적으로 표현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적 인식 상태의 문제(다른 어떤 사람도 원리적으로 접근할 수 없는 인식 상태. 후기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이러한 것은 일관적이지 못하다.)에 얽히게 된다. 표명될 수 있다면 암묵적 지식을 가진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많은 진술은 비결정적이다(먼 옛날에 대한 진술들: 자홍색은 샤를마뉴가 가장 좋아하는 색이었다, 무한한 대상들의 총체에 대한 양화를 포함하는 진술들: 이 지점에는 결코 도시가 세워지지 않을 것이다, 가정법적 조건문: 클린턴이 당선되지 않았다면 미국 경기는 후퇴했을 것이다.). 이러한 진술들은 각 사태와 연계되는데, 그 사태가 구현되었는지는 화자가 알 수 없다. 또한 이런 진술들의 의미를 파악한 화자는 그 진술이 그에 대응하는 사태를 표상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지식은 분명 암묵적 지식이다. >왜? < 진리 조건에 대한 화자의 암묵적 지식이 표명될 방법이 없다. 따라서 화자가 어떤 진술의 진리 조건에 대한 암묵적 지식을 갖고 있다는 주장은 사적 인식 상태가 존재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표명 논증)
획득 논증: 진리 조건 의미론이 옳다면, 그 어떤 화자도 결정 불가능한 진술의 의미를 배울 수 없다.
의미에 대한 인식 이론: 더밋은 언어적 이해라는 것은 공개적으로 표명될 수 있는 실행적 기술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한 진술에 대한 증거가 되는 것을 인지하는 능력이 바로 그 기술이다. 그 기술이 바로 언어적 이해가 되는 것이다.
결정적 정당화: 한 진술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 진술에 대한 결정적 보증을 제공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인지한다는 것이다. 결정적 보증을 한다는 것은 그 진술을 검증한다는 것이다.(검증주의적 의미론) 어떤 진술의 의미론적 내용물로 간주되는 것은 다른 화자들도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진술이 결정 가능한 경우와 불가능한 경우 모두에 적용된다. 화자가 특정 진술의 진리치를 결정할 수 없다 하더라도 그 진술의 증거로 간주되는 것은 인지할 수 있다.
의미에 대한 인식 이론은 반실재론으로 이어진다. 어떤 진술의 의미는 그 진술을 결정적으로 정당화하는 증거적 정황들evidential conditions이 무엇인지 밝힘으로써 주어지는데, 그렇다면 어떤 진술이 참이라는 것은 이런 증거적 정황들이 구현된다는 것이다. 진리는 인식론적으로 무제약적인 대응일 수 없다. 진리는 정당화된 긍정 혹은 보증된 긍정이어야 한다.
결정 불가능한 진술들에 2가 원리를 적용하면 실재론이고 적용하기를 거부하면 반실재론이다.
이런 의미론은 어떻게 형이상학으로 이어지는가? 첫째, 우리는 참인 진술을 가질 때, 사실을 가진다. P가 참일 경우, 오직 그 경우에 P라는 사실이 있다. 둘째, 세계는 사실들의 총체이다. 이러한 두 착상에서, 참을 인식화하는epistemologize 어떤 이론이라도(진리라는 개념 속에 어떤 인식론적 기준들을 넣는 어떤 이론이라도) 세계 역시 인식화한다. 어떤 것이 참이라는 것이 우리가 그것을 알 수 있는가 하는 것에 의존한다면, 사실이 무엇인지 역시 우리가 그것을 알 수 있는가 하는 것에 의존하는 것이다. 따라서 완전히 정신독립적인 사실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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