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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2월 11일 월요일

[요약정리] 마이클 루, 『형이상학 강의』7장: 시간의 본성

맥타가르트: 시간은 실제적이지 않다. 맥타가르트에 따르면 시간 안에 있는 사물들(사건과, 사건들이 그 안에서 발생하는 시간)은 두 가지 방식으로 순서지을 수 있다.
B 계열: '먼저', '나중에'라는 무시제적 관계를 통해 사건들과 시간들을 순서짓는다.
A 계열: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제적 속성들을 통해 사건들과 시간들을 순서짓는다.
맥타가르트에 따르면 B계열은 A계열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A계열이 있다는 가정은 모순이다. 따라서 실제적이지 않다.
ㄴ반박1: B이론가들 - B계열은 A계열을 전제로 하지 않으며, B계열만으로도 적절한 시간 틀이다. 시간은 3차원 공간과 함께 있는 또 하나의 차원이다. 시제를 갖는 언어는 무시제적 언어로 번역될 수 있다.
ㄴ반박2: A이론가들 - A계열은 모순적이지 않다. 시간은 그 자체로 시제적이다. 
ㄴ반박3: 새로운 B이론가들 - 대체로 B이론가들과 비슷하지만, 시제적 언어는 제거될 수 없다고 본다. 그러나 시제적 문장의 진리 조건을 구성하는 사태는 무시제적 사태이다.

맥타가르트의 논변
시간 안에 있는 대상들이 있다. 속성, 명제, 수 등. 그러나 우연적 존재자들을 모두 시간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가진다.
시간 내에서의 위치는 사건들과 사건들이 발생하는 개별적 시간들에 의해 특징지어질 수 있다. 이 위치는 더 먼저, 더 나중이라는 관계적 개념들을 통해 특징지을 수도 있고, 과거, 현재, 미래라는 단항적 개념들을 통해 특징지을 수도 있다. 전자가 B계열, 후자가 A계열
B 계열 내에서 한 사건이나 시간은 고정되고 불변하는 위치를 가진다. A계열에서 사건들과 시간들이 가지는 규정성은 끊임없이 바뀐다('시간적 도래').
맥타가르트에 따르면 B계열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그 시간 틀을 구성할 때 여러 A규정성일 필요로 한다. 그러나 A계열은 모순이므로 B계열도 불가능함다.
B계열이 A계열을 전제하는 이유: 시간은 변화를 전제로 한다. 그런데 B계열만으로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므로, 적절한 시간 틀을 구성해 낼 수 없다. 변화는 사물의 존재 방식이 바뀜을 함축한다. 사물의 존재 방식은 사건이 발생함에 대한 문제이다. 즉, 변화가 있으려면 세계를 이루는 사건들이 변해야 한다. B계열에서 그러려면 예전 사건이 존재를 멈추고 새로운 사건은 존재를 시작해야 한다. 그러나 B계열 내의 사건들은 생성될 수도, 소멸될 수도 없다. 사건들은 언제나 B계열 내의 고유한 자기 위치를 점하는 바로 그 사건으로만 존재한다. 
그렇다면 B계열 내에서 변화가 있으려면 그것은 다른 방식이어야 한다. 즉, 과거 사건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도 아니면서 새로운 사건이 갑자기 존재하는 것도 아니어야 한다. 글거려면 사건은 서로 다른 여러 요소로 구성된 복잡한 구조물이고, 예전 사건과 새로운 사건은 일부 요소를 공유해야 한다. 그런데 그런 요소들도 B계열 내에서 자기 고유의 위치를 점하고 있으므로, 앞의 문제가 다시 생긴다.
사건들은 A규정성과 관련해서는 변화할 수 있다. 따라서 B계열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A계열을 전제해야 한다. A계열이 더 근본적인 시간 틀이다.
ㄴ반론: 변화하는 것은 사건들이 아니라 사물들이다. B계열만 있더라도 변화를 겪을 수 있다. 한 사물이 변한다는 것은 그 사물이 서로 다른 순간에 서로 다른 속성을 가진다는 것이다. 예: 어떤 물체가 뜨거웠다가 차가워진다.
ㄴㄴ맥타가르트의 재반론1: 그런 일은 공간적으로도 있을 수 있는데 아무도 그걸 변화라고 하지 않는다. 시간적으로도 마찬가지다. 예: 어떤 물체가 한 부분은 뜨겁고 다른 부분은 차갑다.
ㄴㄴ맥타가르트의 재반론2: 진정한 변화는 사물의 속성과 관련해 일어나야 한다. B계열이 전제되었을 경우, 대상이 갖는 속성은 불변하며 고정되어 있다.
A계열의 모순성: 과거, 현재, 미래는 양립 불가능하다. 그런데 A계열이 있다면, 이 계열 내의 모든 사건은 이 세 속성을 모두 가져야 한다. A계열이라는 착상에서 본질적인 것은 사건들이 먼 미래에서 현재를 거쳐 먼 과거로 간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한 사건이 현재, 미래, 과거라는 속성을 모두 가지는 것이다.
ㄴ반론: 사건은 과거, 현재, 미래를 잇달아 갖는 것이지, 동시에 갖는 것이 아니며, 동사의 시제를 통해 이러한 점을 보여줄 수 있다.
ㄴㄴ맥타가르트의 재반론: 대상이 F라는 것은 현재에 무시제적으로 F라는 말이다. 대상이 F였다는 것은 대상이 과거에 무시제적으로 F라는 말이다. 대상이 F일 것이라는 것은 대상이 미래에 무시제적으로 F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한다면, 이런 시간들(과거, 현재, 미래)은 원래의 사건들처럼 세 속성 모두를 가진다. 만약 시제를 이용해 이 양립불가능성을 제거하려고 하면 무한퇴행에 빠진다.

B이론
시간은 먼저, 나중에, 동시에라는 무시제적 관계들에 의해 구조화된 영원히 고정된 틀이다. 시간은 공간 3차원에 더한 또 하나의 차원이다. 다양한 시간적 위치는 똑같은 존재론적 위상을 가진다. '지금'은 형이상학적으로 특별하지 않다. 4차원주의, 영원론.
시간과 변화가 긴밀하게 연관된 것은 맞으나, B계열에서도 변화가 가능하다. 사건이 변화한다는 주장은 범주 오류이다. 사건들 중 일부가 변화 그 자체이다. 변화하는 것은 이러한 변화라는 사건을 겪는 대상들이다. 대상들은 공간 뿐만 아니라 시간 안에도 펼쳐져 있다. 
ㄴ반론: B계열을 이루는 그 무엇이라도 자기 고유의 시간에 존재한다. B계열의 모든 사실은 무시제적이다. 따라서 그것들이 그 속성을 갖게 되는 일은 불가능하며, 갖지 않게 되는 일도 불가능하다. 언제나 그런 속성을 갖는 것이며, 생성이나 소멸은 없게 된다. 
ㄴㄴB이론의 재반론: 시간 꼬리표 속성과 비시간 꼬리표 속성을 구분해야 한다. 
> 시간 꼬리표 속성이 아닌 단순히 뜨거움이라는 속성도 있다고 하는데, 그게 뭔지 모르겠다.
B이론가들은 A계열이 모순이라고 생각한다. A계열을 구성하는 시간들은 미래, 현재, 과거를 지나가는데, 그 속도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속도를 재려면 그것을 재기 위한 시간이 새로 필요하므로 무한 퇴행에 빠진다.
B이론가들은 특수 상대성 이론이 B이론을 지지한다고 생각한다. 
시제화된 형태의 문장은 비시제적인 문장으로 번역될 수 있다.
번역 방법1: 시각을 포함시키기. 예: 어제 눈이 왔다 -> 2005년 12월 24일에 눈이 온다.
번역 방법2: 개별어 상관 분석. 시제적 문장의 개별어token은 항상 그 개별어에 대한 지시를 포함한다. 그리고 시제화된 문장은 사실 어떤 사건의 발생 시간을 규정한다. 이에 따르면, 그 발생 시간은 사건의 발생과 그것을 보고하는 발화 사이의 B관계에 근거해 규정된다. 예: 지금 눈이 온다 -> 이 발화와 동시에 논이 온다.

A이론
시간은 시제적인 것이며, 이는 환원될 수 없는 사실이다. 시간들 사이에는 존재롡적으로 의미 있는 차이가 있다. 현재는 형이상학적으로 특권적 지위를 갖는다. 
시제적 문장은 비시제적 문장으로 번역될 수 없다. 
번역 방법1에 대한 반박: 예: 지금 눈이 오고 있다. 2005년 12월 24일에 눈이 온다. 이 두 문장은 의미가 다르다. 전자는 믿으면서 후자는 믿지 않을 수 있다. 
번역 방법2에 대한 반박: 예: 지금 눈이 오고 있다. 이 발화와 동시에 눈이 온다. 이 두 문장은 함축이 다르다. 후자는 어떤 발화가 있었음을 함축하지만 전자는 그렇지 않다.
예: 고통스러운 경험이 끝났을 때, "감사합니다, 이제 끝났어!". 고통스러운 경험이 끝났는데 날짜를 헷갈리고 있을 수 있다. 또, 개별어 상관 분석을 하면 '고통의 마지막 순간이 이 발화보다 먼저 있음에 감사드립니다'라는 문장이 있는데, 고통이 끝났음에 감사하는거지 저 발화와 관련해 감사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A이론가들은 논리학이나 수학 같은 학문에서의 문장은 무시제적이라고 주장하나, 어떤 A이론가들은 모든 문장이 시제적이라고 주장한다. 후자의 경우 수학이나 논리학의 문장은 '언제나 참'이라는 것. 어쨌거나 모든 A이론가들은 시제적 언어는 환원되지 않는 시제적 속성, 시제적 사태를 가리킨다고 생각한다.
시제와 관련된 형이상학적 구분들은 현상학적으로 표현된다. 현재임이라는 속성은 우리의 경험을 동반하며, 지각과 내성 안에서 우리 앞에 주어진 것이다. 나의 경험은 오직 지금 이루어지는 것만이 실재성을 가진다. 경험 안에서 우리는 현재임이라는 속성과 대면하는 것이다.
ㄴA이론에 대한 반론: 양립 불가능한 과거, 현재, 미래라는 속성이 A이론에 의해 양립하게 된다. 이는 모순이다.
ㄴㄴ재반론: 차례차례 가진다.
ㄴㄴㄴ재재반론: 위에서 나온 과거, 현재, 미래 무시제적.
ㄴㄴㄴㄴ재재재반론: 왜 굳이 시제화된 동사를 분석하냐? 그건 그냥 기본적인 것이다. 맥타가르트는 A계열이 더 근본적이라는데, 그럼 시제화된 동사가 무시제적 동사를 통해 분석될 필요가 없잖아. 시제적 술어들은 환우너될 수 없으며, 시간의 객관적인 측면을 표현하고 있다.
브로드의 '라이트 이론'(브로드 자신은 거부): 과거, 현재, 미래의 사건들은 거기 있지만, 라이트가 비춰지는 것은 현재 사건들이다. 현재는 줄지어 있는 사건들을 가로질러 움직인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에게 익숙한 운동이 아니며, 우리는 이것이 얼마나 빠른지, 느린지 질문할 수 없다.
커져가는 덩어리 이론(브로드 자신의 견해): 현재와 과거는 실제적인 것이다. 실제성이란 커져가는 덩어리이고, 현재란 이 덩어리의 맨 바깥쪽이다. 사건들은 멈추지 않는다. 단지 자신보다 뒤에 오는 새로운 사건들을 갖게 될 뿐이다. 시간적 도래는 독특한 종류의 변화이며, 친숙한 다른 종류의 변화로 환원되지 않는다. 이 변화의 속도를 묻는 것은 의미 없으며, 이 변화야말로 다른 모든 변화의 근거가 된다. 미래는 그 어떤 존재론적 위상도 갖지 않는다. 미래에 대한 명제의 진리치는 없다. 이런 이론은, 우리가 자유로운 행위자라는 함축을 가지고 있다.
줄어드는 덩어리 이론: 커져가는 덩어리 이론과 달리, 현재와 미래가 실제적이고 과거는 존재론적 위상을 갖지 않는다. 다른 점에서는 비슷하다.
위의 세 이론 모두 4차원주의에 해당한다. B이론과 다른 점은 모든 시간이 똑같이 실재적이라는 것을 부정한다는 점, 실재성이란 그 자체로 시제적이며 환원 불가능하다는 점이 있다.
현재론: 4차원주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실재는 시간적으로 연장되어 있지 않다. 지금 존재하는 것만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다. 시제적 명제를 표현하는 문장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진리치가 변한다. 현재론은 시간에 대한 현상학적 사실들과 잘 맞아 떨어진다.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지금 존재하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우리가 자유로운 행위자라는 함축을 가진다.
ㄴ반론1: 특수 상대성 이론과 양립할 수 없다. 특수 상대성 이론은 어떤 시간이 다른 시간보다 특권적이라는 견해와 양립할 수 없다. 이런 반론은 A이론 전체에 해당된다.
ㄴㄴ재반론: 상대성 이론에 실재론적 입장을 취할 필요가 없다.
ㄴㄴ재반론2: 특수 상대성 이론과 경험적으로 동등한 이론들이 있을 수 있다. 
ㄴ반론2: 우리는 현재뿐만 아니라 과거나 미래에 대해서도 어떤 주장을 한다. 그러나 과거와 미래가 실제적이지 않다면, 이런 주장이 무엇에 대해 말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이 반론도 A이론 전체에 해당한다.
ㄴㄴ재반론: 미래 시제 진술은 진리치를 갖지 않는다. 
ㄴㄴㄴ재재반론: 그럼 과거 시제 진술은? 예: '조지 워싱턴은 의치를 끼고 있었다' 이런 문장에 진리치가 없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들다.
ㄴㄴㄴㄴ대응: 이런 진술은 회고적 속성을 가지고 있다. 즉 이것이 과거에 한 번 참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런 문장의 진리치는 존재한다. 이런 의견을 뒷받침하려면, 위의 예가 조지 워싱턴에 관한 명제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조지 워싱턴의 개별적 본질individual essence에 관한 명제를 표현한다고 해야 한다. 개별적 본질은 필연적 존재로서, 조지 워싱턴이 존재하지 않는 지금도 여전히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위의 문장은 '개별적 본질이, 의치를 낌이라는 속성과 함께 예화되었음이라는 회고적 속성을 가진다는 명제'를 표현한다.

새로운 B이론
기존 B이론가에 동의하는 점: 시간은 또 다른 차원. 모든 시간, 시간 안의 내용물이 똑같이 실재함. 
동의하지 않는 점: 시제적 언어를 무시제적 언어로 번역할 수 있다는 점. 
시제적 언어를 제거할 수 없는 것이 시간 그 자체가 시제화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번역은 하지 못하더라도, 시제적 문장에 대해 무시제적 진리 조건을 제공할 수 있다면 B이론은 성공적이다. 시제적 문장들을 참으로 만둘어주는 세계 내의 사실들은 그 자체로는 무시제적 사태들이다. 
'현재'와 같은 지표사는 제거되지 않는다. 이러한 점은 시제적 언어가 왜 무시제적 언어로 번역되지 않는지를 보여준다. 표현들에 대한 의미론적 해석은 발화되는 맥락에 따라 변한다. 그러나 이것은 시간의 본성과 상관 없다.
스마트: 시각을 통한 번역 -> 시각을 통한 개별적 시제 문장의 진리 조건 제시
멜러: 개별어 상관 분석 -> 개별적 시제 문장에 대한 진리 조건 제시.
예: 지금 눈이 온다: 2005년 12월 24일에 눈이 오는 경우(스마트), 발화와 동시에 눈이 오는 경우(멜러)
시제적 문장과 무시제적 문장은 의미가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시제적 문장의 발화를 참이게 만들어주는 것은 B계열을 이루는 무시제적 사실이다.
그렇다면 왜 시제가 필요한가? 우리의 행위가 시간적이기 위해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수행하기 원하는 행위를 우리가 수행할 수 있으려면, 우리에게 언제 그 행위가 수행되어야 할 지에 대한 참된 무시제적 믿음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예: 3시에 회의가 있다. '지금'이 3시다.
A이론가들의 비판: 위의 두 형태 모두 진리 조건을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스미스Quentin Smith의 예: 지금은 1980년이다. 진리 조건: 1980년은 1980년이다. 전자는 우연적 주장이고 후자는 동어반복이다.(스마트에 대한 비판). 지금은 1980년이다. 1980년은 현재이다. 이 두 문장은 등가로서 서로를 함축한다. 그러나 멜러의 개별어 상관 분석에 의해 제시된 진리 조건에는 이러한 함축 관계가 반영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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