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재론자들은 추상적 엔터티에 속성, 종, 관계뿐만 아니라 명제도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명제는 언어, 정신과 독립적인 추상적 엔터티이다. 명제는 긍정, 부정이라는 행위의 대상이 되며, 우리 생각의 대상이 된다. 명제는 that절의 지시체이다. 명제는 진리치의 기본적인 소유자이며, 1차적 의미에서 논리적 관계에 놓이는 것이다.
명제 개념에 반대하는 학자들은 존재론에 명제를 도입하지 않고서도 실재론자들이 관심 있어 하는 모든 현상을 처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는 전술에는 메타 언어적 전술이 있는데, 이는 문장만 가지고도 명제 태도, that절, 진리치 등을 처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프라이어는 진리에 대한 잉여 이론과, 명제 태도적 동사에 대한 설명을 통해, 명제에 대한 이야기가 사실 구체적 대상들에 대한 이야기라고 주장한다. 한편 러셀은 다중 관계 이론을 주장한다. 최근에는 명제에 대한 전통적 입장을 뒷받침하는 현상들 자체에 문제를 제기한다.
한편 실재론자들은 사실, 사태, 사건이라는 엔터티들도 상정한다. 사실은 세계 안에 놓인 사물로서, 이 사실과의 대응을 통해 한 명제는 참이 된다. 사태는 상황으로서, 구현됨이라는 속성이나 구현되지 않음이라는 속성을 본질적으로 가진다. 그리고 구현된 사태를 사실이라고 한다. 사건은 일어나는(발생하는) 것이다.
명제에 관한 전통적 이론
화자가 주장하거나 진술하거나 긍정하는 어떤 것이 존재한다. 서로 다른 언어로 무언가를 긍정할 때 같은 무언가를 긍정할 수 있다. 반면, 완전히 같은 문장으로 서로 다른 무언가를 긍정할 수 있다. 그 무엇이 명제이다. that절의 명사적 특징은 단지 구문론적인 것만이 아니라 의미론적이기도 하다. 명제는 언제나 참 또는 거짓이다.
명제는 that절의 지시체이며,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행위의 대상이 되고, 진리치의 소유자이다. 명제는 언어 독립적이고 정신 독립적인 추상적 엔터티들이다. 명제는 필연적 존재자다. 많은 명제가 아직까지 생각되지 않고 있을 수 있다 해도, 그것들은 어떤 사람에 의해 생각될 수 있는 것으로 항상 남아 있는 것이다.
명제는 명제 태도의 대상이 된다.
명제는 상호 주관적으로 주어질 수 있는 것이며, 서로 다른 각 사람이 공통적으로 말하거나 생각하는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명제는 진리치를 필연적으로 가진다(수학의 명제 등). 어떤 명제는 우연적인 진리치를 가진다. 우연적인 진리치를 가지는 명제들의 진리치가 변할 수 있는가? 그렇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상황에 따라 바뀐다고 생각한다.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명제에 규정성(시간, 공간 등의 상황)이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명제는 진리치를 가질 뿐만 아니라, 진리치의 가장 기본적인 소유자이다. 명제 외에도 진리치를 가질 수 있다. 예를 들면 문장들, 믿음들. 그러나 명제 외에 진리치를 가지는 것들은 파생적으로 그러한 것이다. 그러한 것들의 진리치는 사실 그것이 가리키는 명제가 갖는 것이다. 명제가 진리치의 기본적 소유자이므로, 명제들은 논리적 관계의 각 항 기능을 한다. 예: 함축 관계, 양립 가능 관계 등의 항.
that절은 복합 단칭 용어이다. 즉, 명제와 지시적으로 연결된 단칭 용어이다. 그런데 that절은 다른 단칭 용어들과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 다른 단칭 용어들과 달리, that절을 이루는 한 용어가 그 용어와 공지시적인 용어로 교체될 경우 그 that절은 자신의 지시체를 계속 유지할 수 없다. 예: '인디애나 주에서 가장 큰 사람'이라는 단칭 용어를 이루는 '인디애나 주'라는 용어가 '미국의 열아홉 번째 주'로 대체되어도 지시체는 유지된다. 그러나 '인디애나 주에서 가장 큰 사람은 바보임'이라는 that절 단칭 용어가 '미국의 열아홉 번째 주에서 가장 큰 사람은 바보임'으로 바뀌면 그것이 표현하는 명제는 달라진다. 따라서 명제 태도에서 공지시적 용어로 대체했을 때 진리치가 달라질 수 있다.
명제라는 개념과 문장의 의미라는 개념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가?
명제가 문장의 의미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명제를 이루고 있는 요소들은 문장을 이루는 요소들이 갖는 의미라고 생각한다. that절 안의 한 용어를 공지시적인 다른 용어로 대체할 경우 전체 that절의 지시체가 달라지는 것은, 공지시적이더라도 의미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ㄴ반론1: 명제는 추상적 엔터티이며, 추상적 엔터티는 부분을 갖지 않는 대상이다.
ㄴ반론2: 문장의 의미와 명제를 동일시하면 명제라는 개념이 갖는 다른 측면들에서 문제가 생긴다.
ㄴㄴ 명제는 태도의 대상인데, 의미는 태도의 대상이 아니다. 우리는 명제가 참이거나 거짓이라고 말하는데, 의미가 참이나 거짓이라고 말할 수 없다.
ㄴㄴ'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라는 문장에는 변하지 않는 의미 요소가 하나 있으면서도 , 이 문장은 서로 다른 명제를 긍장할 때 사용될 수 있는 것이다.
명제에 관한 유명론적 입장
명제 개념에 대한 반론1: 대상들을 구체적, 시공간적 규정을 갖는 것들과 추상적, 시공간적 규정을 갖지 않는 것으로 나눈는 이론은 이 두 유형에 속하는 엔터티들이 서로 어떤 인과 관계를 맺는지 적절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결국 우리 같은 구체적 존재자들이 어떻게 추상적 엔터티들에 인식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남긴다. 명제라는 엔터티는 인간 사유, 의사소통의 가능성에 대해 설명하려고 도입된 것인데,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그러한 설명도 불가능하다.
명제 개념에 대한 반론2: 명제라는 개념을 규정하려면 명제를 상정함으로써 설명하는 현상에 의존하는 순환에 빠진다. 실재론자들은 사유 행위의 대상, 진리치에 대한 상호주관적 소유자, that절의 지시체가 존재해야 하고 그것이 바로 명제라고 하는데, 명제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할 때 다시 사유 행위의 대상, 진리치에 대한 상호주관적 소유자, that절의 지시체라고 답하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설명은 가짜 설명이다.
명제 개념에 대한 반론3: 오컴의 면도날 위반.
유명론자들에 따르면, 실재론자들이 명제에 대해 말하는 것은 실은 문장에 대한 주장(메타 언어적 주장)이다.
실재론자들은 한 문장이 참도 될 수 있고 거짓도 될 수 있으므로, 문장이 아닌 다른 엔터티가 진리치의 소유자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 '나는 네가 방금 있었던 곳에 간다'라는 문장. 그러나 이것은 문장들이 진리치를 절대적으로 가질 수 없다는 점만을 보여줄 뿐, 문장이 진리치의 소유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예로 든 문장의 문제점은 이 문장에 지표사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지표사가 가리키는 것이 규정되면 그 문장은 고정된 진리치를 가진다. 이러한 예가 보여주는 것은, 지표사가 포함된 문장들은 발화되는 상황과 관련해서만 진리치를 가진다는 것 뿐이다.
그러나 메타 언어적 주장이 명제 태도(예: ~임을 믿는다)에 관련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 콰인은 새로운 술어를 도입하여 명제 태도를 설명하는 방식을 제안한다. '~임을 믿는다'를 '~믿참한다'(믿는다-참)로 바꾸어, that절(~임)을 없애는 것이다. 그러나 콰인 자신은 이 해결책이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과정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술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가 새로 생겨나기 때문이다.
또한, 메타 언어적 주장은 서로 다른 언어로 동일한 생각을 표현하는 경우 문제가 된다. 실재론자의 명제에 대한 이야기가 사실 문장에 대한 이야기라면,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은 같은 것을 믿지 못하게 된다. 예: 존은 믿는다-참 '2 더하기 2는 4이다.' John croit-vrai '2더하기 2는 4이다.'
ㄴ메타 언어 옹호자의 대응: 셀라스의 점표 표기법. 명제 태도는, 한 개인이 어떤 언어적 표현을 개별화하는tokening 활동이다. 여기서 셀라스는 생각하는 것은 내적으로 말하는 것inner speech라는 이론을 암시한다. 점표 표기법은 사유언어(language of thought, mentalese)에도 적용될 수 있다. 명제 태도는 사유언어 표현들을 개별화하는 행위에 관해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이다. that절은 점표에 의해 포착되는 범언어적 표현functional classification을 통해 평서문을 잡아낸다. 예: 존은 2+2는 4라고 믿는다 -> 존은 사유언어 점 2더하기 2는 4이다 점 을 개별화한다.
프라이어(Arthur Prior)는 명제 개념을 가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주장했지만, 명제에 관한 이야기를 메타 언어적으로 이해하기를 거부한다. 프라이어에 따르면 명제에 대한 이야기는 사실 구체적 대상들에 대한 것이다. 명제라는 개념은 기본적으로는 진리치를 부여하는 맥락에서 등장한다. 프라이어에 따르면 '잔디가 초록이라는 것은 참인 명제이다'같은 주장은 '잔디는 초록이다'를 주장하는 것이다.(진리에 대한 잉여 이론: P가 참임을 주장하는 것은 P임을 주장하는 것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
프라이어는 명제 태도가 관계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어떤 사람이 p라는 명제와 믿음 관계에 놓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심리가 p적으로 된다는 것이다. 명제 태도 명사(~를 믿는다)는 사실 '술어 형성사'predicate-forming operator로서, that절에 붙어서 복합 술어(다음과 같이, 즉 ~라고 믿는다)를 만들어낸다.
ㄴ단점1: 완전한 형태를 갖춘 that절에만 잘 작동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that절 이하가 완전한 형태를 가지지 않거나 완전히 규정되지 않고 있는 경우들이 있다. 예: John berlieves some falsehoods, Sam believes everything peter says.
ㄴㄴ프라이어의 대응: 문장 변항을 도입하고, 문장들이 이러한 변항들의 양화를 포함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예: John believes some falsehoods -> For some p, not-p and John believes that p.
ㄴㄴㄴ반박: for some은 존재 양화사로 해석할 수도 있다. 이 경우 명제가 다시 생긴다.
ㄴㄴㄴㄴ프라이어의 대응: 양화사에 대한 언어적 해석. 양화사 다음에는 일련의 단어가 나오는데, 그 단어들 안에 있는 변항들은 빈칸 같은 것으로서, 어떤 언어적 표현들로 채워진다. 그리고 양화 문장은 그것의 빈칸이 채워져 참인 문장이 될 수 있을 때에 참이다. > 제대로 이해 못 함. '존재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냥 빈칸 같은 거라는 뜻인 듯.
ㄴ단점2: 프라이어의 방법이 비시적 명제를 제대로 처리할 수 없다. 단점1의 사례는 당장 that절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that절을 갖게 할 수 있는 문장들이었다. 비시적 명제의 경우 그럴 수 없다.
ㄴ단점3: 진리치를 갖지만 그것에 대한 언어적 표현이 없는 경우 문제가 된다. 'p이고, p에 대한 그 어떤 언어적 표현도 없다' 이것이 참이려면, 이 양화 문장의 빈칸이 채워 이 문장을 참으로 만들어주는 언어적 표현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는 역설을 낳는다. 그런 표현이 있다고 하면 이 문장은 참이고 그런 표현은 없다. 그런 표현이 없다면 이 문장은 거짓이고 이 문장을 참으로 만드는 언어적 표현이 있다. 이러한 문제는 셀라스의 설명에서도 마찬가지다. 셀라스는 that절에 초점을 맞춰서 설명을 제공하는데, 완전한 that절이 아닌 것에 대해서는 프라이어처럼 처리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똑같은 문제가 생긴다.
러셀의 다중 관계 이론: 러셀은 속성, 종, 관계의 존재는 인정하지만 명제는 제거하려고 한다. 그렇다면 참이나 거짓은 무엇인가? 러셀에 따르면, 정신적 행위가 어떤 대상을 가지며 그 대상이 진리치를 갖는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그 대신, 정신적 행위 자체가 진리치의 가장 기본적이고 가장 적절한 소유자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렇다면 정신적 행위가 무엇인지 설명되어야 한다. 러셀은 정신적 행위의 본성, 구조에 대해, 믿음 행위의 예를 통해 설명한다. 명제에 대한 전통적인 설명은 믿음을 2항 관계로서 사람과 명제를 연결해 주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러셀은 믿음 행위를 2항 이상의 다항 관계로 본다. 믿음 행위에 관련된 항목들은 일정 순서대로 놓이며, 첫 번째 항목은 믿음 행위의 주체이다. 나머지 항목은 믿음 행위의 대상이다. 대상들 중 첫 번째 항목은 관계가 아니지만, 실제 세계에서 다른 항목들에 해당하는 것을 묶어 낸다. 예: 오셀로는 데스데모나가 카시오를 사랑한다고 믿는다 -> <오셀로, 사랑함, 데스데모나, 카시오>
ㄴ문제점1: 믿음이라는 심리적 맥락에서는 그저 하나의 항목일 뿐인 '사'이 어떻게 실제 세계에서는 다른 것을 묶어내는가? 위의 예에서 '사랑함'의 경우가 그런 것.
ㄴ문제점2: 다항 관계는 매우 다양한데, 왜 그것을 하나의 이름으로 부르는가? 러셀의 설명에서 믿음은 3항, 4항, 5항, ..., 다 될 수 있는데, 왜 이것들을 전부 '믿음'이라고 부르는가?
ㄴ문제점3: 진리치의 소유자가 명제가 아니라 정신적 행위라면, 논리학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잇는가?
퍼트넘의 쌍둥이 지구 논증: 명제에 대한 전통적 견해에 따르면, 정신적 행위에 내용물을 제공하는 명제는 그러한 정신적 행위를 진행시키고 잇는 바로 그 사람에게 무매개적으로 주어질 수 있다. 그 사람에게 이렇게 무매개적으로 주어질 수 있는 추상적 엔터티는 가장 일차적인 의미에서 진리치의 소유자이다. 그러나 퍼트넘의 논증은 다음과 같은 함의를 갖는다. 첫째, 어떤 추상적 엔터티와의 관계를 통해 어떤 사람의 정신적 활동의 내용물이 결정된다는 생각은 의심스럽다. 그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무매개적이며 구체적인 상황을 만들어 내는 항목이 필요하다. 둘째, 어떤 사람이 행하는 정신적 활동의 내용물은그 사람에게 무매개적으로(어떤 상황적 배경 없이) 주어진다는 생각은 의심스럽다. 왜냐하면 나와 쌍둥이 나는 구별되지 않기 때문이다. 셋째, 어떤 이에게 무매개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가장 근본적인 의미에서 진리치의 소유자라는 생각은 의심스럽다. 나와 쌍둥이 나에게 주어지는 것은 심리적 차원에서 구별될 수 없다. 그러나 내가 생각한 것(물은 H2O이다)은 참인 반면 쌍둥이 나가 생각한 것(물은 H2O이다)은 거짓(쌍둥이 나에게 물은XYZ이므로)이다. > 왜 이런 함의들을 갖는지 더 생각해봐야 함
사실, 사태, 사건
명재 존재론을 지지하는 학자들은 명제와 존재론적으로 같은 부류에 속하는 엔터티들인 사실, 사태, 사건의 존재를 주장한다.
사실: 세계에 놓여 있는 어떤 것으로서, 참인 명제를 참이게 해주는 것. 명제가 참이 되려면 세계에 놓여 있는 어떤 것과 특별한 관계를 맺어야 한다. 세계에 놓여 있는 여러 개체와 속성, 종, 관계 등을 다 열거한다고 해도, 참인 명제를 참이게 해주는 것은 완전히 확인할 수 없다. 따라서 사실이라는 것이 독립적인 존재론적 범주로서 존재한다. 사실에는 개체, 속성, 연결 관계가 포함되어 있지만, 이것들과 범주적으로 구분되는 독립된 무언가이다. 사실은 옳은 그 무엇이다.
참인 명제를 잡아내는 언어적 장치(~라는 명제)와 사실을 잡아내는 언어적 장치(~라는 사실)는 형태적으로 유사하다. 언어적 형태 유사성은 그 밑에 깔려 있는 존재론적 형태 유사성에 근거한다. 명제와 사실은 모두 서로 연결된 구성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명제를 구성하는 항목들은 사실을 구성하는 항목들을 지시한다. 명제를 구성하는 항목들이 서로 연결되는 방식과 동일한 방식으로 사실을 구성하는 항목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을 때 그 명제는 참이 된다.
사실에 관한 한 견해: 사실이라는 개념은 명제의 진리 결정자로서 이해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실이나 명제가 구성 요소를 가진 것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이런 견해는 소수다.
사실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 명제와 사실은 모두 논리적 형식을 갖는데, 논리적 형식은 하나의 함수로서, 사실이나 명제가 갖는 요소들을 묶어 사실이나 명제를 만든다. 개별적 명제들이 있는 것처럼 개별적 사실들이 있는데, 이러한 사실들은 다음 두 형식 중 하나를 보여준다. 첫째, 한 개체가 일항 보편자, 속성, 종을 예화한다는 형식. 둘째, 여러 개체가 어떤 관계에 놓인다는 형식. 사실에 관한 이론가들은 비환원적인 일반적, 보편적 사실에 대해 이야기한다. > 이해 제대로 못 함. < 우리가 긍정 명제와 부정 명제를 구분하는 것처럼, 긍정적 사실과 부정적 사실을 구분해야 한다.
사태: 상황들. 구현됨 혹은 구현되지 않음이라는 속성을 필연적, 본질적으로 가진다. 사태는 영원히,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사태는 명제와 긴밀한 내적 관계를 맺고 있다. 명제와 사태 사이에는 일대일 대응 관계가 있다. 각 명제는 오직 사태 하나를 규정하며, 각 사태는 오직 한 명제에 의해 규정된다. 한 명제는 그 명제가 규정하는 사태가 구현될 경우 참이다. 명제가 참이 되는 것은 사태에 근거한다. 따라서 참인 명제와 세계 사이에는 대응이 있는 것이다. 한 사실이 존재한다는 것은, 사태가 구현된다는 것을 뜻한다. 어떤 사태가 구현되면 어떤 사실이 하나 나오는데, 이 사실은 그에 해당하는 명제와 대응하게 된다.
ㄴ사실, 사태 개념의 문제: 사실이라는 개념과 참이라는 개념은 너무 비슷하고, 사태라는 개념과 명제라는 개념은 너무 비슷하다. 그럼 사실, 사태 개념은 잉여적인 듯하다.
(초기)치솜은 위의 문제를 인지하고, 사건이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사태는 정신적 행위의 대상이 되며, 구현되거나 구현되지 않는다. 그런데 사태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명제이고 하나는 사건이다. 명제가 발생(구현)하거나 구현하지 않는다는 것이 진리치를 갖는다. 명제가 발생하면 그것은 사실이 된다. 명제는 모든 시간에 발생하거나 모든 시간에 발생하지 않는다.(명제에 규정성이 포함되어 있다는 입장을 취한다. 명제가 진리치를 가진다면, 그 진리치를 필연적으로 갖든 우연적으로 갖든 모든 시간에 걸쳐 가진다.) 사건은 특정 시간에 발생하고 특정 시간에 발생하지 않을 수 있다. 사건은 반복될 수 있는 것이다. 사건은 우리 인지 기능에 제공되는 내용물에 의해 개별화된다. 사건은 특정 시점에 발생할 수 있고, 그 이후로도 계속 존재한다. 그러다가 그 후에 다시 발생할 수 있다. 즉, 사건은 반복되며 재발할 수 있는 일반적인 것이며, 이렇게 반복될 수 있다는 특성을 사건의 정의로 간주한다. 예: 1883년 지진과 19xx년 지진에서 사건은 '지진'.
(후기)치솜은 사건이 개별적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사건에 대한 철학계의 일반적인 견해이다. 사건은 시간적 규정을 가지며, 공간적 규정을 갖는 개별자이다. 예: 1883년 지진과 19xx년 지진은 다른 지진이다.
사건이 개별적이라고 간주하는 견해들도 여러 가지로 나뉘는데, 김재권의 견해와 데이빗슨의 견해가 영향력이 있다.
사건에 대한 김재권의 견해: 속성 예화 이론. 사건이란 특정 시간에 어떤 우연적 개체가 속성을 예화한다는 것이다. 즉, 사건에는 구조가 있다. 모든 사건은 어떤 우연적 개체(들)과 속성, 시간을 포함한다. 그리고 사건이 존재한다는 것, 발생한다는 것은 어떤 개체(들)이 어던 개별적 시간에 어떤 개별적 속성을 가진다는 것이다. e와 e'는 다음과 같은 경우에 수적으로 동일하다. e와 e'가 동일한 개체, 동일한 속성, 동일한 시간을 포함할 때.
데이빗슨: 사건이 독립적인 존재론적 범주를 형성한다고 할 수 있는 이유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인과 관계의 각 항의 기능할 하는 것으로서 사건이 필요하다. 둘째, 사건을 기술하는 문장에 나타나는 부사의 작동 방식에 대해 설명을 해야 한다. 예: 오늘 아침 부엌에서 물이 팔팔 끓었다. 사건은 여러 방식으로 묘사되고 특징지어질 수 있는 개별적인 것이다. 한 사건은 여러 방식으로 기술될 수 있고 그런 의미에서 사건은 구조를 갖지 않는 개별자이다. 어떻게 서로 다른 사건들이 구별되는가?(무엇이 사건을 개별화하는가?) 사건들은 내재적 특성을 통해서는 개별화되지 않고, 외재적 결정 요소를 지시해야 한다. 인과와 사건의 연관 관계. e는 e'와 다음과 같은 경우 수적으로 동일하다. e와 e'가 같은 원인, 결과 모두를 공유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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