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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7월 13일 목요일

[요약] 플라톤, <크라튈로스>, 383a~397b.

 크라튈로스(자연주의): 

있는 것들 각각에는 저마다 올바른 이름이 본래적으로 있다. 이름이란 사람들의 합의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이름을 붙이는 올바른 규칙이 존재한다. 사람들이 실제로 부르는 이름이 잘못 붙여진 것인 경우도 있다.


헤르모게네스(넓은 의미의 규약주의):
누가 어떤 것에 무슨 이름을 붙이든 올바른 이름이다. 어떤 이름도 각 사물에 본래 자연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다. 이름은 이름 붙이는 사람들의 규칙과 관습에 따라 있는 것이다. 어떤 것에 개인이 이름을 붙이면 그것은 이름을 사적으로 갖게 되고 나라가 이름을 붙이면 이름을 공적으로 갖게 된다.


규약주의에 대한 작중 소크라테스의 비판:
프로타고라스는 있는 것들의 본질이 사람들마다 다르게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훌륭한 사람과 나쁜 사람이 존재한다는 점은 프로타고라스의 주장에 대한 반례가 된다. 훌륭한 사람은 분별 있는 자고 나쁜 사람은 무분별한 자다. 그런데 프로타고라스가 생각하는대로 각자가 생각하는 것이 각자에게 참이라면, 누가 더 분별 있고 무분별한지 이야기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프로타고라스는 틀렸다. [프로타고라스라면 누가 더 분별 있고 무분별한지도 사람들마다 다르게 생각한다고 하지 않을까?]

에우튀데모스는 모든 것이 누구에게나 동시에 똑같이 언제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에우튀데모스도 틀렸다. 덕과 악덕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언제나 있다면, 어떤 사람들은 훌륭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나쁠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이 동시에 똑같이 언제나 있지도 않고, 사람마다 다르게 있는 것도 아니라면, 사물들 자체는 그것들만의 확고한 본질을 갖는다. [사물에 본질이 있다는 결론에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이 동시에 똑같이 언제나 있지도 않고"라는 조건이 왜 필요한가? 모든 사람에게 모든 사물의 본질이 똑같지 않다고 하기 위해서? 그런데 에우튀데모스가 모든 것이 누구에게나 동시에 똑같이 있다고 한 것이 정말로 모든 사물들이 똑같다는 주장인가? 이런 주장은 상식과 너무 벗어나 있어서 누구도 진지하게 주장했을 것 같지 않다.]

행위들도 '있는 것들'의 한 종류이므로, 본질을 갖고, 그 본질에 따라 행해지지 우리 의견에 따라 행해지지는 않는다.
e.g., 어떤 것을 자를 때,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하면 안 되고 자름과 잘림의 본성에 맞게, 그리고 본성상 그런 일에 적합한 도구를 가지고 해야 성공한다.
[행위가 '있는 것들'의 한 종류라는 생각을 너무 검토 없이 받아들이고 넘어가는 것 같다. 행위가 정말로 있는가? 있다면 사물들이 있다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 있는가? 한 행위를 다른 행위와 구분 짓는 기준은 무엇인가(도널드 데이빗슨이 이야기했듯이 전등을 끄는 행위와 스위치를 누르는 행위는 같은 행위인가?)]
말하는 것도 하나의 행위이고, 따라서 누군가가 자기 방식대로 말을 하면 안 되고, 사물들에 대해 말하고 말해지는 본래의 방식과 도구대로 해야 말하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이름을 부르는 것은 말하는 것의 부분이므로, 이름을 부르는 것도 행위의 일종이다. 그런데 행위에도 본질이 있으므로, 이름을 부르는 것도 사물들의 이름을 부르고 불리는 본래의 방식과 도구에 따라 해야 한다. 이름을 부를 때 이름을 사용하므로, 이름도 일종의 도구이다. 이름을 부름으로써 우리는 서로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치며, 사물들을 그것들이 어떤 것인가에 따라서 구분한다. 따라서 이름은 일종의 가르치는 도구이자, 본질을 가를 수 있는 도구이다.
가르치는 사람은 이름을 만드는 입법가가 붙인 이름을 사용한다. 이름의 입법가는 각 사물에 적합한 본래의 이름, 이름인 것 자체에 주목해 음성과 음절에 구현한다(북 제작자가 북의 형상에 주목해 개별 북을 만들어내듯이). 적합한 이름의 형상을 구현한다면, 어떤 음절에 구현하든 제대로 된 이름이다.
구현된 이름이 적합한지 아닌지를 아는 사람은 이름을 만드는 입법가보다는 오히려 사용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묻고 답할 줄 아는 사람으로, 변증술 전문가이다.
결론적으로 이름은 사물들에 본래 있으며, 각 사물에 본래 있는 이름을 주목하고 그것의 형상을 자모와 음절에 구현할 수 있는 사람이 이름을 만드는 자이다.

이름의 본래적인 올바름이란 무엇인가?

[각 사물에 본래 있는 이름이란 무엇인가? 사물의 경우 각 사물의 형상이 있고 실제 사물들은 그것이 구현된 것이라는 생각이 비교적 자연스럽다. 그런데 이름의 경우, 언어의 자의성을 고려하면, 그렇지 않아 보인다. (작중 소크라테스가 고유명의 뜻을 풀이하는 모습을 보면 언어의 자의성을 부정하는 것 같지만.)
본질적 이름을 일종의 개념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까? 우리는 여러 사물에 대해, 꼭 특정 언어를 통해 나타내지 않더라도, 개념을 갖는다. 예를 들어 책이라는 사물에 대해, (명시적으로 이렇게 생각하지는 않더라도) <대개 종이로 만들어져 있으며 정보를 담고 있는 글이 적혀 있는 사물>과 같은 개념을 갖고 있다. 이런 개념을 우리는 '책'이라는 이름으로 표현하고 영어 사용자들은 'book'이라는 이름으로 표현한다. 작중 소크라테스가 염두에 두는 것이 이런 구도인가?]
[사물의 본질적 이름은 그 사물의 본질 자체와 어떻게 다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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