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설술과 문답법의 대조
소크라테스는 고르기아스가 지닌 기술의 힘이 무엇이며, 그가 가르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길 원한다. 그래서 그는 고르기아스의 연설은 다음에 듣고, 여기서는 문답식 대화를 나누고 싶어한다. 그 전에, 카이레폰이 소크라테스를 대신해 고르기아스의 기술에 대해 묻고, 폴로스가 고르기아스를 대신에 답한다.
▷ 카이레폰: 고르기아스가 어떤 기술에 정통하며, 그래서 고르기아스를 뭐라고 불러야 하는가?
▶ 폴로스: 사람들에게는 경험에서 경험에 의해 발견된 많은 기술이 있고, 그 기술들 각각에는 다른 사람들이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관여하는데, 가장 훌륭한 기술들에는 가장 훌륭한 자들이 관여한다. 고르기아스의 경우 기술들 중 가장 훌륭한 것에 관여한다.
위와 같은 답변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폴로스가 연설을 위한 준비는 잘 되어 있지만, 질문 받은 것에 대해 적절하게 답한 것을 아니라고 지적한다. 폴로스는 고리기아스의 기술을 칭송했을 뿐, 그 기술이 무슨 기술인지 답하지는 않았다. 즉, 그 기술이 어떤 것인지(그 기술의 특징이나 성질)에 답했을 뿐, 그 기술이 무엇인지(그 기술의 정의), 고르기아스를 뭐라고 불러야 하는지에 답한 것이 아니다.
이제부터 소크라테스와 고르기아스가 직접 문답을 주고받는다. 고르기아스는 자신이 가진 기술이 연설술이며, 자신을 연설가라고 불러야 한다고 말한다. 소크라테스는 그렇다면 고르기아스가 다른 사람들도 연설가로 만들어줄 수 있냐고 묻고, 고르기아스는 그렇다고 답한다.
소크라테스는 길게 말하는 방식보다는 문답을 계속할 용의가 있는지 묻고, 고르기아스는 되도록 짧게 답하도록 하겠다고 말한다. 그렇게 최대한 짧게 말하는 법도 그가 내세우는 점 가운데 하나이다. (*각주: 플라톤의 다른 대화편에서, 고르기아스는 모든 주제에 대해 간결하게 말하는 법과 한없이 길게 말하는 법을 창안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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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설술이 무엇에 관계하는지에 대한 논의
▷ 소크라테스: 연설술은 있는 것들 가운데 무엇에 관계하는 앎인가?
- 직조술은 옷 만드는 일에 관계하고, 시가는 작곡에 관계하듯이, 연설술은 무엇에 관계하는가?
[작중 소크라테스는 연설술을 기술이라고도 하고 앎이라고도 하는데, 기술과 앎은 동일시될 수 있는 것인가? 현대에는 ‘절차적 지식’ 혹은 ‘암묵지‘라고 부르는 유형의 지식과, 명제적 지식을 구분하는데, 기술은 전자에만 해당하는 것 같다. 플라톤은 이러한 구분을 하지 않았는가? 플라톤이 사용한 ’episteme’라는 용어를 현대어로 ‘knowledge’보다는 ‘understanding’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고 보는 견해도 참고해볼 수 있을 것 같다. ( https://plato.stanford.edu/entries/understanding/).]
<국가>편에서는 이데아에 대한 앎을 얻은 철학자들이 국가를 정의롭게 통치할 수 있게 된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이데아에 대한 앎도 ‘명제적 지식’이라기보다는 ‘기술/절차적 지식/암묵지/이해’에 가까운 것인가?
▶ 고르기아스: 연설술은 말에 관계한다.
▷ 소크라테스: 어떤 종류의 말인가? 연설술이 모든 말에 관계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연설술에 관계하는 말은, 어떻게 생활하면 건강해주는지 환자에게 알려주는 말은 아니다.
다른 기술들도 제각기 그 기술이 적용되는 대상에 관한 말에 관계한다. 의술은 환자들에 관해 말하고 이해하는 데 유능하게 만들어준다. 따라서 의술도 말에 관계하는 것 같다. 마찬가지로 체육도 몸의 좋은 상태나 나쁜 상태에 관한 말에 관계한다.
▶ 고르기아스: 다른 기술들의 앎은 거의 전체가 수작업과 그런 종류의 활동에 관계하지만, 연설술에는 그런 수작업이 전혀 없고 활동과 그 효과가 모두 말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 소크라테스: 연설술 외에도 말로 모든 일을 해내는 기술들이 있다.
- 수론(수에 대한 이론), 산술(실용적인 셈), 기하학, 장기술.
이처럼, 연설술은 말을 주로 사용하는 기술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므로, [연설술이 무엇인지 알려면] 연설술이 무엇에 관해 말로 효과를 거두는 기술인지 밝혀야 한다.
▶ 고르기아스: 연설술은 진실로 최고로 좋은 것이며 사람들 자신에게는 자유의 원인이 되고, 동시에 각자 자신의 나라에서 다른 사람들을 다스릴 수 있게 하는 원인이 되는 것인, 말로 설득할 수 있는 능력에 관계한다.
- 법정, 평의회장, 민회, 정치 집회 등에서 말로 설득할 수 있는 능력이자, 다른 기술자들을 노예로 삼을 수 있는 능력.
▷ 소크라테스: 그렇다면 연설술은 설득의 장인이며, 그것이 하는 일 전체와 그 핵심은 설득으로 귀결된다.
연설술의 의한 설득의 본성에 대한 논의
▷ 소크라테스: 그렇다면 연설술에 의한 설득이란 대체 무엇이며, 그 설득이 무슨 문제들에 관계하는가? 연설술 외의 다른 기술들도 설득을 하기 때문이다.
수론은 우리에게 수에 관한 것을 가르치며, 그러므로 설득을 한다.
▶ 고르기아스: 군중 앞에서 하는 설득이며, 정의로운 것들과 부정의한 것들에 관한 설득이다.
▷ 소크라테스: 앎(배워서 알고 있음)과 확신은 다르다. 확신에는 거짓된 확신도 있고 참된 확신도 있지만, 앎에는 거짓된 앎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설득을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 앎 없는 확신을 가져다주는 설득
- 앎을 가져다주는 설득.
연설술은 군중 앞에서 정의로운 것들과 부정의한 것들에 관해 어떤 설득을 하는가?
▶ 고르기아스: 확신이 생기는 설득을 한다.
▷ 소크라테스: 그렇다면 연설술은 확신을 갖게 하는 설득의 장인이지, 가르칠 수 있는 설득의 장인은 아니다.
따라서 연설가는 군중에게 정의로운 것과 부정의한 것에 대해 가르침을 줄 수 있는 자는 아니고, 설득할 수 있는 자일 뿐이다.
그렇다면 연설가가 어떤 점에 대해서 조언을 해줄 수 있는가?
- 건설에 대해서는 건축가가, 군사적인 것에 대해서는 병력 지휘에 유능한 자가 조언하듯이, 연설가는 어떤 점에 대해 조언을 할 수 있는가?
▶ 고르기아스: 건설, 군사에 대해서 결정은 연설에 따라 이루어졌다. 장인들의 선발이 있을 때마다, 그 사안에 관해 조언하는 자들과 의결에서 승리하는 자들은 언제나 연설가들이다.
- 환자가 의사에게 설득되지 않을 때 연설술로 설득할 수 있다.
하지만 연설술을 사용할 때는 승부를 다투는 다른 모든 기술을 사용할 때처럼 해야 한다. 다른 장인들의 평판을 빼앗아서는 안 되고, 정당하게 사용해야 한다. 불의를 저지르면 안 된다.
그래서 연설술을 배운 사람이 연설술로 불의를 저지른다면, 그 사람 책임이지 연설술을 가르친 자의 책임이 아니다.
연설술을 부정의하게 사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논의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논박하는 것보다 논박당하는 것을 좋게 여기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거짓된 의견만큼 나쁜 것은 없는데, 논박을 당하면 거짓된 의견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고르기아스도 자신이 그런 사람이라고 말하고 논의를 이어간다.
▷ 소크라테스: 누군가 당신에게 배우기를 원하면 당신은 그를 연설술에 유능한 자로 만들어 줄 수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는 군중 앞에서 모든 것에 대해, 가르침을 통해서가 아니라 설득을 통해서 설득력을 가질 수 있게 되는가?
▶ 고르기아스: 적어도 군중 앞에서는 그렇다.
▷ 소크라테스: "군중 앞에서"라는 것은 "모르는 자들 앞에서"라는 뜻일 것이다. 아는 자들 앞에서는 당연히 설득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연설가는 특정 기술에 정통한 사람에 비하면, 그 기술에 대해 문외한이다.
따라서 연설가가 아는 자들보다 더 설득력이 있을 때는 언제나 모르는 자(연설가)가 모르는 자들(군중) 앞에서 아는 자보다 설득력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연설술은 사실 자체가 어떤지에 대해서는 알 필요가 없지만, 설득의 어떤 계책을 통해 모르는 자들 앞에서 아는 자들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런데 연설가가 정의로운 것과 부정의한 것에 관한 문제를 다룰 때도 마찬가지인가?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아는 자들보다 더 많이 아는 것처럼 보이도록 설득할 계책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그것에 관해 모르고 있는 자에게는 연설술을 가르칠 수 없는가?
▶ 고르기아스: 모르고 있다면, 나에게 그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발제자: 뒤에서 이어지는 소크라테스의 논의가 성립하려면, 정의로운 것과 부정의한 것을 배운 뒤에야 연설가가 될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
▷ 소크라테스: 그렇다면, 당신이 누군가를 연설술에 능한 자로 만들어 준다면, 그 사람은 정의로운 것들과 정의롭지 못한 것들을 알고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어떤 기술을 배운 자는 그 기술에 능하다.
각각 관련 분야의 것을 배운 자는 그 분야의 앎이 각자에게 부여하는 그런 능력을 가졌다. 그러니까 정의로운 것들을 배운 자는 정의로운 자이기도 하다. 그리고 정의로운 자는 정의로운 것들을 행할 것이다. 그렇다면 연설술에 능한 자는 [정의로운 것에 대해 배웠으므로] 정의로울 수밖에 없고, 정의로운 자는 정의로운 것들을 행하고 싶어 하고, 불의를 행하고 싶지 않아 한다. 그런데 이는 앞에서 당신이 연설술을 부당하게 사용할 수 있다고 한 것과 모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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