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nay, B. (forthcoming), "Entity Realism About Mental Representations", Erkenntnis.
심적 표상 개념은 심리철학과 인지과학에서 중심적인 개념으로 간주되었다. 그런데 신행동주의자들(Neo-behaviorists - 저자의 용어)은 표상 개념 없이 마음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다. 저자는 몇몇 심적 표상이 실재한다고 주장하며, 이 점은 이론 실재론이 아니라 대상 실재론을 통해 뒷받침된다고 말한다.
1. Intoduction: Mental Representations
심리철학자들은 대개 표상 중 명제 태도(믿음, 욕구 등)에 대해 논의했는데, 인지과학자들(과 일부 심리철학자들)은 덜 엄격한 표상 개념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인지과학자들(과 일부 심리철학자들)은 지각 체계에 있는 표상과, 우리가 행위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게 해주는 표상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신행동주의자들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을 표상에 대한 언급 없이 설명하고자 한다(신행동주의 내부에서도 정도차는 있다). 그들의 동기 한 가지는 심적 표상을 상정하는 일이 마음을 지나치게 지성화(intellectualizing)하는 것이라는 우려이다. 마음을 명제 태도를 통해 설명하려고 하면, 동물이나 어린아이의 마음에 대해 그리고 우리 일상적인 행위에 대해서는 설명하기가 힘들다.
많은 신행동주의자들은 지각에 초점을 맞추고 지각이 표상적 과정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즉, 지각적 표상이라는 것은 없다고 주장한다.
- Dana Ballard: "세계는 행위를 위한 정보의 저장소이다. 관찰자에 있어서, 그것은 '바깥에' 저장되어 있으며, 자극에서 분리되어 존재하는 몇몇 심적 상태에 내재적으로 표상되어 있지 않다".
표상주의자들: 감각 입력 → 마음속 표상 → 운동 출력
신행동주의자들: 감각 입력 → 비표상적인 처리 과정 → 운동 출력
신행동주의에 두 가지 주요 입장이 있다.
- 지각을 능동적 행위 과정으로, 세계와의 일종의 동적인 상호작용으로 보는 관점. (Noe 2004; Hurley 2001)
- 지각은 지각 대상과의 비표상적인 관계라고 보는 관점. (Campbell 2002; Martin 2004; Travis 2004; Brewer 2011).
저자는 신행동주의에 맞서 표상주의를 옹호하며, 행위자에게 표상을 귀속시키는 일을 무엇이 정당화하는지 묻고자 한다. 이것은 과학적 방법론에 대한 질문이다. 인지 과학자들은 표상이라는 관찰 불가능한 대상을 상정한다. 따라서 기존 과학적 실재론/반실재론 입장이 여기서도 적용된다.
2. Realism About Theories Versus Realism About Entities
이론에 대한 과학적 실재론:
- 과학 이론은 객관적으로 참이거나 거짓이며(과학과 세계의 관계),
- 과학은 참인 이론의 수립을 목표로 한다(과학의 목표).
이론에 대한 과학적 반실재론: 위의 두 논제 중 하나 부정.
대상 실재론: 과학 이론에 상정된 [특정] 관찰 불가능한 대상들이 실제로 존재한다.
일반적으로 표상주의 vs. 신행동주의 논쟁은 표상 이론에 대한 실재론 논쟁으로 간주되었다. 그래서 각 진영은 자신들의 이론이 상대 이론보다 설명 범위가 넓고, 단순하고, 경험적으로 적합하다는 장점을 내세웠다.
표상 이론이 비표상 이론보다 나으니까, 표상은 실재한다 vs. 비표상 이론이 더 나으니까 표상은 실재하지 않는다
저자는 표상주의 vs. 신행동주의 논쟁이 표상 이론에 대한 실재론이 아니라, 표상이라는 대상에 대한 실재론 논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3. Entity Realism
해킹(Ian Hacking), 카트라이트(Nancy Cartwright)의 대상 실재론. 미묘하게 다른데, 여기서는 해킹의 입장을 중심으로 논의한다. 대상 실재론의 핵심은 우리가 대상 x의 인과력에 대해 더 많은 증거를 확보할수록 우리가 x에 대해 실재론자가 될 이유가 늘어난다는 것이다. "존재한다는 것은 인과력을 갖는다는 것이다" (Kim 1993, p. 202). 이 점에 대해서는 특별히 논란거리가 없다.
더 논란이 되는 것은 대상 실재론의 방법론이다. 관찰 불가능한 대상의 인과력을 우리가 어떻게 알아낼 수 있는가?
해킹의 답변 – 어떤 대상을 우리가 조작 가능하면, 우리는 그 대상이 존재한다고 믿는 데 정당화된다.
- "당신이 그것을 흩뿌릴 수 있으면, 그것은 실재한다" (Hacking 1983, p. 23)
- "우리가 대상을 도구로서, 탐구의 기구로 이용할 때, 우리는 그 대상을 실재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Hacking 1989, p. 578)
- "우리가 전자의 잘 이해된 다양한 인과적 속성들을 이용하여 자연의 더 가설적인 부분에 개입하기 위해 새로운 장치를 만들려고 하고 충분히 자주 성공적으로 만들 때." - Hacking 1983, p. 265).
우리가 해당 관찰 불가능한 대상을 어떻게 조작해야 하는지는 열린 문제로 남아 있다.
대상 실재론에 대한 비판: 정말로 대상 실재론이 이론 실재론을 전제하지 않는가?
"우리는 전자가 무엇인지 잘 모르면서도 전자가 존재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McMullin 1984, p. 63). 해킹은 이것이 실제 과학적 실행과 잘 맞는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해킹의 입장을 받아들여서, 심적 표상 이론에 대한 실재론에 대해서는 열린 문제로 남겨두고 심적 표상에 대한 대상 실재론만 옹호한다.
4. Entity Realism About Representations
심적 표상이란 세계에 있는 어떤 먼(distal) 대상에 대한 것이다. 표상은 먼 대상에 속성을 귀속시킨다. 즉, 표상은 그 대상이 특정 속성들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표상한다.
진정한 표상이려면 오표상을 할 수도 있어야 한다.
[오표상 가능성이 표상의 필요 and/or 충분 조건인지에 대해 자세히 말하지는 않음]
오표상에는 두 유형이 있다.
- 표상된 대상이 실재하지 않을 수 있다.
- 표상된 대상이 실재하더라도 표상된 속성들을 가지지 않을 수 있다.
심적 표상은
- 반드시 명제 태도일 필요는 없다.
- 반드시 구문론적으로 구조화되어 있을 필요도 없다.
- 반드시 의식될 필요도 없다.
- 반드시 신빙성 있는 내성의 접근 대상이 될 필요도 없다.
표상은 오표상할 수도 있는 방식으로 먼 대상들에 속성을 귀속시킨다.
- 시각 체계의 표상은 진정한 표상: 빛을 받아들여서 뇌의 활성화 패턴을 만듦
- 망막의 빛 수용기(photosensors)는 표상이 아니다. 오표상 불가.
그렇다면 어떤 근거에서 표상이 실재한다고 볼 수 있는가?
- 내성을 통해서는 아니다. 내성은 신빙성 있는 방식이 아니다.
- 대상 실재론에 따른 기준이다. 우리가 특정 방식으로 심적 표상을 조작한다면, 관찰 가능한 행동에 직접적 영향이 있다는 점이다.
행동주의자들은 감각 입력(sensory input)과 운동 출력(motor output)이 있을 뿐, 그 사이에 표상적인 무언가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어떤 버전의 행동주의는 감각 입력과 운동 출력 사이에 다양한 처리 과정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들은 마음이 표상적이지 않다고 주장할 뿐, 블랙 박스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생물은 텅 비어있지 않으며 단순한 블랙 박스로 취급될 수 없지만, 우리는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에 대해 [잘] 알려진 것과 단지 추론되었을 뿐인 것을 주의 깊게 구분해야 한다" (Skinner 1974, p. 233)
신행동주의자들은 감각 입력과 운동 출력이 동적 처리 과정 내에서 매우 밀접하게 엮여 있어서, 우리가 둘 사이를 매개하는 표상을 상정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신행동주의자들은 심적 표상에 대한 대상 실재론을 거부할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이 심적 표상이 표상하는 것을 변화시켰는지 우리가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비표상적인 처리 과정이 아니라.)
심적 표상에 대한 대상 실재론을 옹호하기 위해서는 두 조건을 만족시켜야 한다.
기준 A: 심적 상태 M의 변화가 우리 관찰 가능한 행동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다.
기준 B: 우리 관찰 가능한 행동의 변화가 감각 입력의 비표상적 처리 과정에 대한 용어로 잘 설명되지 않는다.
기준 B는 모건의 준칙(Morgan's Canon)을 통해 더 명확하게 나타낼 수 있다.
모건의 준칙: "동물의 행동이 더 저차원적인 심적 기능의 결과라고 해석될 수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고차원적 심적 기능의 결과라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 (Morgan 1894/1903, p. 53)
표상에 대한 모건의 준칙: 우리가 행위를 비표상적 처리 과정의 출력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면, 표상적 처리 과정의 출력이라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
e. g. 해바라기가 해를 향하는 것은 감각 입력에 대한 반응으로 보면 충분하고, 해바라기가 해에 대한 표상을 가지고 있다고 해석할 필요가 없다.
저자는 표상적 모건의 준칙을 받아들이더라도 몇몇 심적 표상에 대해 대상 실재론을 옹호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즉, 최소한 몇몇 행위는 비표상적으로 해석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저자가 고려하는 심적 표상은 행위의 성공적인 수행과 관련되어 있는데, 저자는 이를 '운동 표상'(motor representation)이라고 부른다.
운동 표상은 행위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매개 변수들을 표상한다. 그러한 매개 변수의 예로는 행위의 대상이 되는 물체의 속성, 행위자 자신의 몸의 속성, 행위를 하기 위해 필요한 신체 움직임, 행위의 목표 상태 등이 있는데, 여기서는 단순히 물체의 모양, 크기, 위치만 고려한다.
저자는 운동 표상이 진정한 표상이라고 말한다. 즉, 운동 표상은 오표상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오표상 가능성이 진정한 표상의 필요 and/or 충분조건?]
e. g. 손을 뻗어서 컵을 쥐는 행위.
운동 표상들(운동에 쓰이는 표상들):
- 컵의 위치
- 컵의 모양
- 내 손의 위치
등을 표상하는 표상들
운동 표상은 의식될 필요가 없다(그리고 대개 의식되지 않는다). 그러면 우리는 운동 표상이 컵에 어떤 속성을(어떤 모양을, 어떤 위치를) 귀속시키는지 우리가 어떻게 아는가?
- 내성을 통해서는 아니다.
- 우리는 행위자가[내가] 그 컵을 쥐는 손 모양을 통해, 그 운동 표상이 컵에 어떤 모양을 귀속시키는지 추론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내가 접근하는 방향을 통해 그 운동 표상이 컵에 어떤 공간적 위치를 귀속시키는지를 추론할 수 있다.
- 따라서 만약 그 운동 표상이 컵에 귀속시키는 모양 속성이 변한다면, 이는 내 행동, 즉 내가 손을 쥐는 크기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줄 것이다. 위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피험자 앞에 놓인 물체를, 피험자가 눈치 못 채게 위치를 바꾸면서 잡게 한 실험 - 피험자들은 위치가 바뀌었다는 점을 의식하지 못했지만 물체를 성공적으로 잡았다.
이 점은 운동 표상이 기준 A를 만족시킨다는 점을 보여준다.
기준 B는? - 우리가 행위를 할 때 감각 입력에 대한 비표상적인 처리 과정이 아니라 운동 표상을 사용한다는 인지신경과학적 증거가 있다.
두 가지 성냥갑 브랜드 X, Y.
X가 Y보다 25퍼센트 크다(Y는 X의 80퍼센트 크기이다).
두 성냥갑의 크기를 서로 바꿨을 때, 사람들이 성냥갑을 쥐기 위한 손 크기를 성냥갑의 실제 크기가 아니라 브랜드에 맞춰 바꾸었다.
(추가적인 연구를 통해 이것은 단기 학습이 아니라 장기적인 친숙성에 의한 것이라고 밝혀졌다.)
이 현상은 비표상적으로 설명하기가 어렵다. 여기서 운동에 일어난 것은 감각 입력과 고차 정보(성냥갑 브랜드에 대한 정보)의 통합(integration)이다. 이 통합은 단지 감각 입력을 처리한 것이 아니라, 감각 정보와 상당히 복잡한 기존 저장 정보(기존에 경험한 성냥갑에 대한 정보)를 통합한 것이다
물론 이에 대해 신행동주의자들도 할 말이 있을 것이다. 그런 것을 검토하기보다는 다음과 같은 더 강력한 사례를 고려해보자.
'실용적 심적 이미지'(pragmatic mental imagery). 기준 B를 운동 표상보다 더 잘 만족시킨다.
컵이 내 앞에 있다고 해보자. 시각적 피드백이 내가 손을 뻗는 일을 도울 수 있다. 만약 내가 손을 너무 많이 뻗었다면 손을 덜 뻗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 행위를 컵을 보지 않고도 꽤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 컵을 보고, 눈을 감고, 열을 세고, 손을 뻗어 잡는다. 이 경우 내 심적 이미지가 내 행위를 인도한다. 이것은 운동 표상과 매우 유사한 속성들을 귀속시키는 특별한 종류의 심적 이미지이다. 자기중심적(egocentric) 위치 속성, 자기중심적 크기 속성 등. 그리고 오표상할 수도 있다.
실용적 심적 이미지에 대한 조작은 운동 표상에 대한 조작과 마찬가지의 방식으로 관찰 가능한 행동에 영향을 준다. 내 실용적 심적 이미지가 컵에 다른 크기를 귀속시킨다면, 나는 손을 쥐는 크기를 다르게 할 것이다. 따라서 기준 A가 만족된다.
기준 B는?
앞 실험을 약간 변형해서 생각해보자. 내 앞에 컵이 있고, 그것을 보고, 눈을 감고, 열을 세는데, 친구가 그 컵을 왼쪽으로 10cm 옮겨놨다고 나에게 말해준다. 그래도 나는 컵을 성공적으로 쥘 수 있다. 심적 이미지가 위치 속성을 컵에 귀속시켰고, 친구에게 들은 정보를 통해 이 위치 속성을 수정한다.
그러면 비표상주의자는 뭐라고 말할 것인가?
저자: 내가 손을 뻗는 것은 두 자극-독립적 정보적 상태의 조합에 영향을 받는다: 내 심적 이미지, 말로 부호화된(coded) 정보. 특히 두 정보적 상태 중 하나가 언어적으로 부호화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표상을 상정하지 않고서는 두 정보적 상태의 조합을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언어적으로 부호화되었다는 것은 가장 열렬한 신행동주의자도 표상적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앞서 제시했던 사례와 비교해보자. 신행동주의자들은 단지 약간의 딜레이가 있을 분 내 행위를 감각 입력에 acting on하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왼쪽으로 10cm>와 같은 정보는 지시의 자기중심적 프레임에 부호화될 수 없다. 내 심적 이미지를 수정하기 위해서 나는 두 가지 매우 다르게 부호화된 정보를 통합해야 한다.
두 다른 지시 프레임으로 부호화되었다고 통합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이 경우와 같이 언어적으로 부호화된 타인중심(allocentric) 거리에 대한 정보를, 행위자가 조절할 수 있는 자기중심 정보로 번역하는 일을 어떻게 비표상적으로 해명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심적 이미지는 존재론적으로 의심스럽다는 반론. 라일은 심적 이미지 개념을 '머릿속의 자그마한 그림'이라는 표현으로 비꼰 바 있다.
- 저자의 재반론: 여기서 말하는 심적 이미지는 라일 당시보다 훨씬 튼튼하게 과학적으로 확립된 개념이다.
다양한 버전의 표상주의 마음 이론들이 있는데, 심적 표상에 대한 대상 실재론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그 이론들에 개입할 필요는 없다.
5. Conclusion: What Kinds of Representation?
이 논의가 모든 종류의 표상에 다 적용된다고 성급한 일반화는 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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