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칠랜드는 관찰 가능한 영역과 관찰 불가능한 영역에 대해 서로 다른 인 식적 태도를 취해야 한다(= 관찰 가능한 영역에 대해서는 과학 이론이 참이라고 믿고, 관찰 불가 능한 영역에 대해서는 불가지론을 취해야 한다 = 경험적 적합성이 이론의 최우선적인 덕목이다)는 반 프라센의 주장을 주된 비판 대상으로 삼는다. 처칠랜드의 요점은 (1) 관찰 가능한 영역에 대한 존재론도 관찰 불가능한 영역에 대한 존재론과 마찬가지로 의심스럽고( = 이론이 참인지 알 수 없 는것과 마찬가지로 경험적으로 적합한지도 알 수 없고), (2) 경험적 적합성은 이론의 여러 덕목들 중 하나일 뿐이며, (3) 애초에 관찰 가능한 영역과 불가능한 영역의 구분이 명확히 이뤄질 수 없다는 것이다.
1. 관찰 가능한 영역에 대한 존재론도 의심스러움
저자에 따르면 관찰 가능한 영역에 대한 존재론도 관찰 불가능한 영역에 대한 존재론과 마찬가지로 이론 적재적이며 의심스럽다. 즉, 저자는 관찰 가능한 영역에 대해서나 불가능한 영역에 대해서나 인간의 인지의 차이가 없기 때문에 두 영역의 존재론을 받아들이는 데에 있어 차이를 두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역사적으로 볼 때 관찰 가능한 영역에 대한 존재론도 관찰 불가능한 영역에 대한 것과 마찬가지로 계속 폐기되어 왔다. 플로지스톤, 칼로릭, 발광 에테르 등이 관찰 불가능한 영역의 존재론에서 사 라졌다면, 마녀, 천구 같은 것들은 관찰 가능한 영역의 존재론에서 사라졌다. 후자의 것들은 관찰 가능한 것들이었고, 또한 관찰된 것이었다.
2. 경험적 적합성은 이론의 여러 덕목들 중 하나일 뿐
단순성, 정합성, 설명력 등은 좋은 이론이 갖추어야 할 덕목들로 여겨진다. 그런데 이 덕목들은 인 식적 덕목들인가? 다시 말해, 어떤 이론이 이런 덕목들을 갖췄다는 점이, 그 이론이 참이라는 근거 도 되어 줄 수 있는가? 예를 들어 다른 면에서는 동등하지만 오직 단순성에서만 차이가 나는 두 이론이 있을 때, 더 단순한 이론이 참에 더 가까울까? 반 프라센은 이런 질문에 대해 그렇지 않다 고 답한다. 반 프라센은 이론 선택의 최우선적인 기준이 경험적 적합성이며, 초경험적 덕목들은 실 용적 덕목에 불과하다고 본다. 반면 처칠랜드는 경험적 적합성이 특별히 우월한 덕목이 아니며, 심 지어 단순성, 정합성, 설명력 등의 초경험적 덕목이 경험적 적합성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덕목이라 고 주장한다.
처칠랜드는 경험적 사실을 인지하기 위해서는 특정 가정(≒ 이론)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즉, 경험 적 사실을 두고 이론 T1과 이론 T2 사이에서 선택할 때, 해당 경험적 사실은 이론과 상관없이 존 재하는 것이 아니라 T1 또는 T2에 의해 해석된 채로 존재한다. 따라서 T1과 T2의 비교는 (T1 + 경험적 사실) vs. (T2 + 경험적 사실)의, 공통적인 경험적 사실을 두고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T1 + T1에서 해석된 경험적 사실) vs. (T2 + T2에서 해석된 경험적 사실). 이와 같이 경험적 사실이 공통의 기반이 되지 못하므로, T1과 T2가 공통의 기반에 얼마나 적합한지에 따라(= 경험적으로 적합한지에 따라) 이론 선택이 일어날 수 없다. 따라서 이론 선택은 정합성, 단순성, 설명력 등 초 경험적 근거에 기반을 두고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처칠랜드는 초경험적 덕목들이 경험적 적합성보다 더 근본적임을 보여주는 사고실험을 제시한다.
사고실험: 아무것도 관찰 가능하지 않은 사람을 상상해보자. 그 사람에게는 대신 소형 컴퓨터가 두개골에 장 착되어 있는데, 그 컴퓨터가 주변 환경에 대한 믿음들을 전달한다. 이로써 그 컴퓨터는 그 사람에 게 지각 판단을 통한 정보와 동일한 정보를 제공한다. 이 사람은 관찰 가능한 영역이 전혀 없지만, 과학 활동이 가능하다. 원리적으로 이 사람이 우리와 같은 것을 배울 수 없다고 볼 이유는 없다. 이 사례에서 [경험적 적합성이 아니라] 단순성, 정합성, 설명적 통합력 등이 이 사람의 믿음들을 [이론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3. 관찰 가능/불가능 구분이 명확히 이루어지지 않음
관찰과 관련해 대상들을 다음과 같이 분류해볼 수 있다.
(a) 사람들이 (도구의 도움 없이) 관찰한 것
(b) 사람들이 관찰할 수 있지만 관찰되지 않은 것
(c) 사람들이 전혀 관찰할 수 없는 것
먼저, (a)와 (b)를 우리의 존재론에서 배제하는 것은 잘못된 것 같다. 그리고 반 프라센의 입장은 (c)를 우리 존재론에서 배제하는 것이다. 따라서 반 프라센은 (b)는 배제하지 않으면서 (c)는 배제 하도록 (b)와 (c) 사이에 임의적이지 않은 구분선을 그을 수 있어야 한다. 처칠랜드는 (b)와 (c) 사 이에 선을 긋는 일이 임의적이지 않게 이루어지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어떤 대상 혹은 과정을 관찰되지 않은(unobserved) 경우를 다음과 같이 분류해볼 수 있다.
(a) 우리 감각 기관에 비추어 볼 때 관찰할 수 있는 공간적 혹은 시간적 위치가 아니다. e. g. 주라기 시대, 안드로메다 은하.
(b) 우리 감각 기관에 비추어 볼 때 시간적 혹은 공간적으로. 너무 작거나 크고, 너무 짧거거나 길다.
(c) 에너지가 너무 약하거나 강해서
(d) 파장이 너무 짧거나 길어서.
(e) 질량이 너무 작거나 커서.
(f) 우리 감각 기관이 사용하는 힘을 통해 인지 불가. e. g. 뉴트리노
등등...
(a)~(f) 모두 관찰되지 않은(unobserved) 사례이지만, 반 프라센의 기준에 의하면 오직 (a)만 관찰 가능한(observable) 사례이다. 왜 (a)와 달리 (b)~(f)는 관찰 불가능하다고 말하는가? 이런 구분에는 적절한 인식론적 혹은 존재론적 특징이 없다. 그저 인간이 (a)를 좀 더 잘 통제할 수 있다는 우연 한 사실에 기반을 두고 있을 뿐이다. 예를 들어 우리의 이동 능력이 훨씬 떨어졌다면(e. g. 인간이 땅에 박혀 사는 생명체였다면) (a)는 관찰되지 않은(unobserved) 것일 뿐만 아니라 관찰 불가능한 (unobservable) 것이었을 것이다.
(a)가 우리에게 관찰 가능한 것은, 우리와 대상 사이의 시간적, 공간적 위치를 대상에 가깝게 바꾸 는 것이 원리적으로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b)에 대해서도 똑같이 이야기할 수 있다, 아주 작 은 대상에 대해, 원리적으로 공간적 크기(size)혹은 구성(configuration)을 바꿔서 관찰되게 만들 수 있다. 물론 그런 유연성에는 제약이 있겠지만, (a)에서도 사람이 얼마나 멀리 이동할 수 있는지에 도 제약이 있었다. 결론적으로, (a)만 관찰 가능한 것으로 취급하고 (b)~(f)는 관찰 불가능한 것으 로 취급하는 것은 임의적인 구분이다.
또한 다음과 같은 사고실험을 생각해볼 수 있다.
사고실험 2
전자 현미경 눈을 가진 휴머노이드가 존재한다고 해보자. 이 휴머노이드의 전자 현미경 눈은 생물 학적으로 만들어져서, 이미지를 인간과 유사한 망막에 투영하며, 신경생리학적 기저도 인간과 유사 하다. 이 휴머노이드에게 바이러스, DNA 등은 관찰 가능한 대상일 것이다. 그런데 반 프라센에 따 르면 인간에게 바이러스나 DNA는 관찰 가능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그 휴머노이드의 눈과 똑같이 작동하는 기구[인간이 만든 전자 현미경]를 이용해 이 휴머노이드와 단지 인과적 기원이 다를 뿐 [한쪽은 전자 현미경이 눈이고, 한쪽은 전자 현미경이 도구] 똑같은 경험을 할 수 있는데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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