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잔티움 제국
프톨레마이오스와 갈레노스를 비롯한 그리스의 학자들은 로마 제국 첫 3세기
동안 학문에 크게 공헌했다. 로마 제국이 분열된 후에도 자연 철학에 대한 중요한 공헌자들은 비잔티움
제국, 즉 옛 그리스 지역에서 나왔다. 중요한 학자들로는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주석가인 심플리키오스, 필로포누스 등이 있는데,
특히 필로포누스의 철학은 이슬람과 서유럽 자연 철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비잔티움 제국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그리스였기 때문에 고대 그리스 문헌에 대한 접근이 용이했다. 이는 라틴어를 쓰는 서유럽이나 아랍어를 쓰는 이슬람과 비교할 때 큰 강점이었다. 그러나 6세기 이후 비잔티움 지성계에서 자연철학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529년 비잔티움 황제 유스티아누스는 비기독교적이라는 이유로 아테네의 아카데메이아를 폐쇄시켰고, 많은 철학자들을 비잔티움 제국 밖으로 추방했다. 그 이후로 비잔티움의
학자들은 자연철학에 독창적인 기여를 하지 못했다.
이와 같이 동방 정교회는 학문의 발전에 악영향을 끼쳤다. 교회는 그리스
학문을 이교도적, 세속적인 것으로 취급했다. 그리스 학문
연구가 완전히 중단되지는 않았고 정교회 교리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지만, 교회는 그리스 학문을 통제했다. 그래도 그리스의 문헌들을 보존하고 서유럽과 이슬람에 전달한 것은 비잔티움의 공헌이라고 할 수 있다.
이슬람
고대 그리스 학문을 번역으로 접한 이슬람 학자들은 곧 비잔티움 학자들의 수준을 넘어섰다. 그러나 이슬람 세계에서 그리스의 학문과 자연 철학은 어디까지나 외래 학문이었다. 이는 그리스 학문을 완전히 수용한 서유럽의 카톨릭과 대비되는 부분이다. 이러한
차이의 원인은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역사에서 찾을 수 있다. 기독교는 로마에서 400년에 걸쳐 천천히 전파되었다. 그 동안 기독교도 학자들은 그리스
학문을 배우고 그것을 기독교 교리의 정립에 이용했다. 그러나 이슬람교는 군사적 정복을 통해 매우 빠르게
전파되어 100년 남짓한 기간 만에 그 지역의 지배적인 종교가 되었다.
게다가 이슬람교는 로마 제국 밖에서 시작되어 고대 그리스 학문과 직접적인 접촉이 적었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이슬람교에는 고대 그리스 학문이 자연스럽게 포용되지 못했다.
그래도 여러 이슬람 학자들과, 이슬람 세계에서 살고 있던 기독교인, 유대교인 학자들은 그리스 학문을 받아들였다. 사실 번역 작업은 이슬람교가
생겨나기 전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시리아와 페르시아의 기독교인 학자들은 그리스어 구사자들이
많아서 그리스어 문헌들을 시리아어로 번역했다(시리아어는 아랍어와 마찬가지로 셈어에 속한다). 9, 10세기에 아랍어 번역이 활발해질 때 많은 학자들이 그리스어와 아랍어를 알거나 시리아어와 아랍어를 알았기
때문에 그리스어 문헌들을 아랍어로 번역할 수 있었다. 이러한 번역들은 이후 4-5세기 동안 이슬람의 학문과 자연철학에 역할을 했다. 이슬람 학자들은
그리스 학문을 수동적으로 수용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들 나름대로 전용 했다.
그리스 학문들 중 과학exact science와 의학은 별 문제 없이
받아들여졌는데, 이 분야들은 종교적으로 별다른 논란의 여지가 없었고,
상당히 유용한 것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자연철학에서 가장 중요하게 취급된 학자는 아리스토텔레스였고, 플라톤은 신플라톤주의를 통해 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11세기
중반에는 『정치학』을 제외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든 저작들이 아랍어로 번역되었다. 여기에는 필로포누스나 심플리키오스 같은 그리스 주석가들의
작업도 영향을 끼쳤다. 아랍 학자들은 이 주석가들의 작업을 참고해 그들 스스로 주석서를 쓰거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을 이용하여 독자적인 저작을 남겼다. 이
중 일부는 라틴어로 번역되었고 서유럽에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이븐 루시드는 이슬람 세계에서는 별로
영향이 없었지만 서유럽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반대로 이슬람 세계에서의 영향은 컸지만 서유럽에서
그다지 영향이 없었던 학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중세 이슬람 역사를 전체적으로 볼 때 그리스 철학은 문제적이었다. 활발하게
연구되던 시기에도 반대편에는 이에 적대적인 사람들이 있었다. 자연 철학에 대한 사람들에 태도에는 주로
이슬람 종교 지도자들의 입장이 크게 작용했다. 이들은 그리스 철학을 외래 학문으로 취급했고, ‘falasifa’(philosopher), 즉 철학자라는 말은 경멸적인 의미로 쓰였다.
중세 이슬람에서 학자들은 세 등급으로 나뉘었다. 이슬람은 법치주의
사회였기 때문에, 가장 높은 등급은 법학자들이었다. 종교법과
관습법은 심지어 신학보다도 가치 있게 여겨졌다. 그 다음은 mutakallimun이었는데, 이들은 그리스 철학을 이슬람교의 해석에 사용한 학자들이었다. 이들은
철학을 통해 신의 계시를 보다 합리적으로 이해하고자 했다. 제일 급이 낮은 학자들은 철학자 falasifa들이었는데, 합리적인 사유와 논증을 중요하게 여겼고 계시를
경시했다. 이슬람 세계에서 자연철학을 발전시킨 것은 이들이었다.
법학자(전통주의자)들은
그리스 철학이 이슬람 신앙에 위협이 된다는 이유로 그리스 철학을 이용하지 않았다. 이들은 그리스 철학을
이슬람 신학에 이용하려던 mutakallimun들과 갈등을 빚었다. Mutalkallimun은
다시 두 부류로 나뉘는데, 그 중 좀 더 극단적인 부류가
Mu’tazilite이다. 이들은 이성의 힘이 신의 계시와 동등하다고 보았다. 이들은 그리스 철학의 논증과 방법론을 이슬람 교리를 이해하는 데에 사용했다.
이들은 쿠란에서 이성적으로 납득하기 힘든 부분을 일종의 메타포로 이해했다. 다른 부류는
Ash’arites인데, 이들은 좀 더 복잡한 입장을 취했다. 이들도 이성을 중시하긴 했지만, 쿠란의 묘사를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전통주의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이슬람의 철학자들
철학자들은 종교를 무시하고, 자연 철학과 논리를 신앙이 아니라 진리
그 자체를 위해 사용한다고 비판 받았다. 예를 들어 Ash’arite
중 한 명이었던 al-Ghazzali는 종교가 자연철학을 거부할 필요는 없지만, 신에 대한 고려 없이는 자연이 이해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철학자들을 비판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은, 신 없이 자연적 대상들을 그것들
자신의 본질과 본성에 의해 설명한다는 점에서 그대로 수용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수학도 위험하다고
생각했는데, 수학은 확실한 증명을 사용하여 사람들이 신 없이도 명확한 사고가 가능하다고 믿게 만들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이들은 논리학도 철학에 접근하는 첫 단계라는 점에서 비판했는데, 그래도 신학을 위한 보조적인 목적으로는 여전히 사용했다.
이런 맥락에서, 철학자들이 종교 지도자들에게 탄압당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 따라서 여러 철학자들은 철학과 이슬람 교리를 조화시키고자 했다. 이븐 루시드는 『결정적 논고 - 종교와
철학의 관계에 대한 해결책』[1]이라는
책에서 철학과 논리학이 이슬람 법에서 수용될 수 있는지 고찰했다. Ibn as-Salah
ash-Shahrazuri는 이슬람 전통의 전문가였는데, 그 역시 이슬람 법의 관점에서
철학과 논리학을 배우고 가르치는 일이 허용되는지, 그리고 더 나아가 논리학의 용어들을 이슬람 법의 정교화에
사용해도 되는지 연구했다.
하지만 이런 시도들이 성공적이었던 것 같지는 않다. 철학이 받아들여지려면
독립적인 가치를 갖는 학문으로 여겨지거나, 국가에서 지원하고 보호하거나, 종교 지도자들이 호의적으로 평가해야 하는데 이슬람 세계에서는 이 세 조건 중 어떤 것도 충족되지 않았다. 이슬람은 신정 국가로서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지 않았기 때문에 코란이나 이슬람 법 이해에 도움되는 과목들만이
가르쳐졌다. 따라서 교육에서 철학이 배제되었고 정규 교과로서 다루어진 적이 없었다. 이런 이유로 자연철학적 훈련을 받은 학자들이 거의 나오지 않았고, 결국
서양에서 과학이 발달할 때 뒤쳐지는 결과로 이어졌다.
서유럽
서유럽과 비잔티움, 이슬람 세 문명 모두 매우 종교적이었지만, 자연철학에 대한 태도는 크게 달랐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이
신학과 충돌하는 부분은 카톨릭에도 있었지만, 서유럽은 결국 자연철학과 논리학을 수용하고 교육의 기본
과정으로 삼았다. 반면에 비잔티움과 이슬람에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서유럽에서 세속적인 학문들은 신학에 대한 이해를 돕는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그
자체로 기독교 신앙을 강화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신학자들은 동시에 훌륭한 세속 자연철학자이기도 했다. 기독교 신학자들은 자연철학을 그저 수용한 데서 그친 것이 아니라, 상당수의
학자들은 독창적으로 기여하기까지 했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일부 측면에 대한 우려가 있긴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대학 교육과정으로 완전히 흡수됐다. 서유럽에서 자연철학의 제도화는 자연철학의 신학에 대한 독립성으로
이어졌고 둘은 비교적 독립적으로 발전될 수 있었다. 이렇게 자연철학이 제도화되는 일은 비잔티움이나 이슬람에서는
없었다.
다른 주목할 점은 교회와 정치의 분리이다. 로마의 지배 하에 있을
때 기독교인들은 신앙의 자유를 원했고, 그것이 충족된다면 로마 사회 내에 기꺼이 편입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예수가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라고 했던 것처럼, 기독교 세계에서 종교와 정치의 분리는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둘은
자주 충돌하고 다른 쪽을 지배하고자 했지만, 최소한 서로를 독립적인 실체로 받아들였다. 동방 정교회에서 이런 분리가 일어나지 않았는데, 이것은 교회 때문이라기보다는
황제가 종교까지 지배했기 때문이다. 이슬람에서 칼리프는 교회와 국가 양편 모두의 수장으로 받아들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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