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yningen-Huene, P. (1990). Kuhn's conception of incommensurability. Studies in History and Philosophy of Science Part A, 21(3), 481-492.
번역: 조인래 역. 「쿤의 공약 불가능성 개념」. 『쿤의 주제들: 비판과 대응』.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1997.
쿤이 공약 불가능성 개념을 내놓은 후 이 개념은 여러 가지로 논란이 되었는데, 그 중 한 가지는 공약 불가능성의 의미에 관한 것이다. 이러한 의견 불일치의 원인들 중 두드러지는 것 세 가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공약 불가능성 개념은 두 사람(쿤과 파이어아벤트)에 의해 제시되었는데, 이 두 사람의 입장에 차이가 있다. 이 두 사람의 입장도 시간이 지나면서 변했고, 다른 사람들이 받아들이면서 여러 변종도 생겨났다.
둘째, 공약 불가능성 개념을 주장하는 여러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철학적 입장을 이 개념에 반영했다.
셋째, 공약 불가능과 관련되어 어떤 문제를 다뤄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의견 불일치가 있다.
과학혁명의 구조에서의 공약 불가능성
공약 불가능성은 이론들 사이의 관계에서 성립하는 관계적 개념이다.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제시되는 공약 불가능성은 과학 혁명, 혹은 이론 변화와 관련해서 논의된다. 이와 같은 공약 불가능성 개념에는 세 가지 다른 측면이 있다.
첫째, 과학 혁명을 통해서 어떤 이론이 다루어야 하는 과학적 문제들의 범위가 달라진다. 과거 이론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던 문제들이 새로운 이론에서는 사소한 것으로 간주되기도 하고, 반대의 일도 일어난다. 또한,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평가하는 기준도 변한다.
둘째, 과학 혁명 후에도 과거 이론의 개념이나 방법들 중 다수는 계속 사용되지만, 사용 방식이 약간 달라진다. 특히 개념 변화는 외연적 변화와 내포적 변화로 나눌 수 있다. 개념의 외연적 변화는 이론이 바뀔 때 한 개념에 속하던 대상이 다른 개념에 속하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천동설에서 태양은 행성이지만, 지동설에서는 행성이 아니다. 개념의 내포적 변화는 그 개념의 의미가 변하는 것을 말한다. 내포적 변화는 그 개념 하에 포섭되던 대상들의 속성이 변화하면서 일어난다.
셋째, "서로 다른 패러다임의 추종자들은 각기 다른 세계에서 자신들의 작업을 수행한다."(Kuhn 1970a, p. 150) 그런데 쿤은 서로 다른 세계라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명확하게 밝히지 않았다. 저자는 다음 절에서 이 구절의 의미에 대해 해명한다.
세계 구성의 이론
저자는 쿤이 '세계'라는 말을 다음 두 가지 의미로 사용한다고 분석한다.
첫째, '현상의 세계'. 이는 우리가 지각하는 형태의 세계, 다시 말해 우리가 각종 개념들을 사용하여 구조를 부여한 세계를 뜻한다. 패러다임은 감각적으로 그리고 개념적으로 이러한 의미에서의 세계를 구성한다.
둘째, '순수하게 대상적인 세계'. 칸트의 '물 자체'와 비슷한 개념으로, 우리의 지각과 개념에 완전히 독립적인 세계를 뜻한다.
쿤이 세계가 변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현상의 세계의 변화를 뜻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현상의 세계를 구성하는가? 쿤은 이 문제에 명시적으로 답하지 않지만, 저자는 쿤의 입장에서 이 질문에 답하고자 한다.
쿤은 한 이론의 구성원이 그 이론에 고유한 현상의 세계에 접근하게 되는 과정을 고려함으로써 세계 구성에 대해 탐구한다. 우리가 세계 구성에서 배워야 할 것은 세계 속에서 서로 비슷한 대상이나 상황들 사이에 성립하는 유사 관계이다. 대상들의 집합에서 각 대상의 전형적인 사례들을 배우고, 그 대조 집합과 대조해보면서 이런 관계를 배우게 된다. 이와 같은 유사 관계는 세계에서 각 개념이 적용되는 영역을 구성하는 데에 사용된다. 유사 관계를 학습할 때 다음과 같은 일이 일어난다.
첫째, 각 대상을 분간되지 않은 흐릿한 대상이 아니라, 개별저긍로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게 된다. 예를 들어 '하얀 물새'를 오리, 거위, 백조로 나눌 수 있게 된다.
둘째, 유사 집합의 용어들을 동시에 배운다면, 그 개념들의 사용법도 배우게 된다.
셋째, 현상 세계의 해당 영역이 어떤 구조, 즉 분류 체계를 가지게 된다.
유사 관계의 파악은 각 유사 집합에 대한 정의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각 유사 집합의 개별 사례를 통해서도 배울 수 있고, 그 정도로도 그 개념들을 실제로 사용하는 데에 별 어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있다. (이것이 과학자들이 자신들이 사용하는 기본 개념을 정의하려는 철학자의 노력을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이유이다)
이렇게 파악된 개념이 문제 없이 사용될 때, 이 개념들이 적용되는 현상 세계에 대한 암묵적인 지식이 축적될 수 있다. 이것은 같은 개념에 의한 지시 대상을 골라내는 데에 사람들마다 다른 기준들을 사용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이 기준들이 별 문제 없이 공존하고 있는 것은 서로 다른 기준들 사이에 함축 관계가 성립하고 있음을 뜻한다. 어떤 대상이 한 특징(기준)을 가진다면 다른 특징(기준)도 가진다. 따라서 서로 다른 기준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같은 개념에 의한 지시 대상을 골라낼 수 있는 것이다.
과학 혁명의 구조 이후의 공약 불가능성
두 이론은 그들이 번역 가능하지 않은 언어로 표현되어 있을 때 그리고 오직 그 경우에만 공약 불가능하다. 선행 이론과 후행 이론이 번역 가능하지 않은 경우 과학 혁명이 일어나게 되는데, 과학 혁명의 특징이 바로 관계되는 어휘를 구성하는 역할을 하는 유사 및 비유사 관계들 중 일부가 변하는 것이다.(예: 천동설에서 지구와 목성은 매우 달랐지만 지동설에서 비슷한 것으로 분류된다) 이와 관련되어, 일부 개념들의 외연이 변화하고, 그로 인해 대상들의 분류 체계가 변한다. 더 나아가 그러한 개념 속에 포함된 세계에 대한 암묵적인 지식도 변한다(같은 지시 대상을 골라내는 기준들). 그러면 두 이론이 번역되지 않는 이유는 분명하다. 용어들이 서로 양립 불가능한 분류 체계와 세계에 대한 여러 지식 주장들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앞에서 제기됐던 질문들에 대해 답할 수 있다.
첫째, 어떤 의미에서, 그리고 왜 세계는 과학 혁명과 더불어 변하는가? 현상의 세계라는 의미에서의 세계가 변하는데, 그것은 그 세계를 구성하는 유사 관계와 그 세계를 기술하는 데 사용되는 개념들 중 일부가 변하기 때문이다.
둘째, 어떤 개념들의 의미를 혁명을 통해 진정으로 변하는가? 그렇다. 유사 관계의 구성적 기능을 의미 이론으로 발전시키고, 그 의미 이론을 통해 개념들에 영향을 주는 모든 이론적 변화들 중 어떠 것이 의미 변화인지 결정하는 기준을 얻을 수 있다.
셋째, 문제 영역의 변화, 의미 변화, 세계의 변화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이 세 가지 변화의 근원이 유사 관계의 변화라는 것이다. 유사 관계의 변화는 개념의 변화를 낳고, 문제 영역이 바뀌게 한다. (다른 세계에 대해 다른 질문이 제기되고 해답에 대한 기준도 바뀐다.)
세 가지 오해들
쿤의 공약 불가능성 개념에 대해 다음과 같은 오해들이 있었다.
첫째 오해는, 쿤이 전면적 공약 불가능성 지지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쿤이 주장하는 것은 '국소적 공약 불가능성'으로, 두 이론의 많은 용어들은 공유된다. (Kuhn, Thomas S. "Commensurability, Comparability, Communicability"(1982))
둘째 오해는, 공약 불가능한 이론들 사이에 어떤 연속성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국소적 공약 불가능성 개념에 따르면 많은 용어들이 연속적이다. 게다가 애초에 『과학 혁명의 구조』에서도 이론들 사이에는 이론적 연속성뿐 아니라 실험적 연속성 같은 많은 연속성이 있음을 말한 적이 있다. 이러한 연속성이 필요한 이유 중 하나는, 새로운 이론이 기존 이론의 문제 풀이 능력 중 많은 부분을 보존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새로운 이론의 초기 버전이 과학자 공동체 내에서 수용될 일말의 가능성도 없어질 수 있다.
셋째 오해는, 공약 불가능한 이론들끼리 합리적으로 비교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공약 불가능성의 국소성 때문에 두 이론의 경험적 귀결 중 일부를 직접 비교 가능하다. 예를 들어 천동설과 지동설은 하늘에서 행성의 위치를 예측하는 능력이 비교될 수 있다.또한 번역이 불가능한 용어도 '해석'은 가능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플로지스톤'은 현대 화학의 용어로 번역은 불가능하지만, 맥락에 따라 '산소' 또는 '산소가 풍부한 공기'로 '해석'할 수 있다. 또한 두 이론은 전체적인 수준에서 단순성, 정확성, 다산성, 예측력 등의 기준들을 통해 비교될 수 있다. (Kuhn, Thomas S. "Objectivity, Value Judgement, and Theory Choice"(1977), 이 블로그 포스트 링크)
분석자의 위치 문제
자기 자신의 실재에 대한 견해를 버리는 것이 세계 구성에 대한 일반 이론을 구성하는 데에 필요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누구나 실재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자기 자신의 생각을 이용하지 않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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